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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아기 예수” 시편 22:1-31 (12/18/2022)

한 수녀가 어린이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멀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왔지만 묵을 곳이 없어서 동굴 마굿간에서 묵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어린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거기 있었다면 아기 예수께 어떻게 해 주었을까요?” 한 소년이 먼저 손을 들고 말합니다.

“저는 빗자루로 동굴을 깨끗하게 청소해 줄래요.” 한 소녀가 잇습니다.

“저는 커피 세 잔을 타서 하나는 엄마 하나는 아빠 하나는 아기 예수께 드릴꺼예요.” 또 한 소년이 말합니다.

“저는 저의 쟈켓을 벗어 덮어줄거예요.”

“저는 나뭇 가지를 주어다가 불을 집혀줄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소녀가 말합니다.

“저는 아기의 엄마가 허락해 준다면 아기를 내 팔에 안고 그냥 사랑해 줄거예요.”

 

모든 어린이들이 아기 예수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제일 마지막 어린이의 모습이 가장 인상 깊게 남게 됩니다. 아기 예수를 사랑으로 안아 주겠다는….

 

오늘 성탄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어떻게 우리는 아기 예수를 안아 줄수 있을까요? 2천년 전에 태어나신 분을….

오늘도 시편 강해는 계속됩니다. 다윗은 아기 예수 탄생 전 약 천년 전 쯤에 이 시를 지었습니다. 저희는 지금 2천년이 지나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드리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저희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나 저희는 주님 탄생하시던 때와는 시간적으로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천년 전, 저희는 2천년 후…. 그렇다면 다윗이 주님 탄생 천년 전에 주님을 대했던 모습에서 우리는 본받을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볼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오늘의 시편을 통해서….

 

사실 오늘의 시는 고난주일 내지 성금요일에 더 맞는 시편입니다. 아니 저도 한번도 이 시편을 성탄주일 본문으로 삼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시편의 전반부 특히 전반부 중에도 1절만 읽어도 금방 알게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쳤던 바로 그 음성을 들을수 있는 귀절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7, 8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로마 군인들의 조롱소리를 듣는듯 합니다. 17, 18절,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말씀대로 로마군인들은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갑자기 달라집니다.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절로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24절,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곤고한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7, 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곤고한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은 온 인류에게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소망 가운데 시를 쓰고 있습니다.

 

곧 일견해 읽으면 전반부는 절망의 시이고 후반부는 소망의 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 가지 정반대의 내용이 한 시에 담겨지게 되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천년전에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의 모습을 이렇게 낱낱이 알고 시로 고백할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과연 다윗은 천년후에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알고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주석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전반부에 나온 고난의 이야기는 원래 다윗의 이야기라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10년간 광야에서 쫓겨 다녔습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자기의 삶이 갈갈이 찢겨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왕이 될 것을 약속하셨는데 왕이 되기는 커녕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철저한 방랑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방랑자만이라도 다행입니다. 때로는 원수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발견했습니다. 어느날은 자신의 속옷 마져 빼았깁니다. 사람들이 자기 속옷도 서로 나누려다가 어쩔수 없이 제비 뽑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도 자신의 속옷처럼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을 느끼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의 삶이 산산조각이 나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다윗은 절망 가운데서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님께….

 

그런데 갑자기 절망의 노래가 소망의 노래로 바뀝니다. 21절,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상반절은 “구하소서” 간구를 드리고 있는데 하반절은 이미 확신에 차 있습니다. “구원하셨나이다.”

간구와 확신이 한 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간구와 확신 사이에는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을 다윗이 경험한 것 같습니다.   절망 가운데서의 간구는 어느 순간 소망의 확신으로 변한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절망 가운데 간구를 하는데 어느 순간 다윗은 놀라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다윗이 당한 모든 아픔이 바로 당신이 천년후에 겪을 아픔이라고….

물론 이 것은 오늘 시편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도 만나고 주님도 만난 경험을 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지난번 청년부 헌신 예배 때 나눈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 다윗은 주님과도 대화를 하여 왔던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다윗의 고백은 180도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소망과 감사 그리고 찬양으로 변합니다.   죄인인 자기가 겪었던 모든 것을 주님께서 언젠가 겪게 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후반부를 통해서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껴안고 있는 심정으로 소망과 감사의 노래를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9-31,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어느덧 다윗은 아기 예수를 껴안고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소개한 마지막 어린이는 아기 예수를 껴안아 주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마음을 소유한 어린이인 것 같습니다. 온 인류를 위해 아니 자기를 위해 언젠가 산산조각이 나실 아기 예수를 껴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습이 금번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아기 예수를 껴안는 자들은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결론적으로는 다윗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을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정호승 시인의 시에서 이들이 누릴 축복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는 천주교인인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절망이 없는 희망은 없다는 것을 다윗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를 지은 것입니다. 이에 천년 후에 오신 주님도 다윗의 위대한 시가 바로 당신을 예표하는 시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다윗의 위대한 시를 그대로 재연하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망이 없는 희망이 없음을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귀하신 몸을 절망 가운데 산산조각 내신 것입니다.    절망이 있는 참 희망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다윗이 수녀님에게 아기 예수에게 어떻게 할 것이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당연히 마지막 소녀와 같이 답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아기 엄마가 허락해 준다면 아기를 내 팔에 안고 그냥 사랑해 줄거예요.”

그리고는 절망의 동굴에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소망의 아기를 안고….

 

아기 예수는 2천년 전에 소망의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절망은 소망을 위해 존재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산산조각 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예쁜 살이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아기 예수를 꼭 안아 주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절망의 동굴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찾아 가십시다. 이웃의 절망 안에 아기 예수의 소망의 꽃이 필 것을 소망하십니다.

 

오늘 유아세례를 받은 저희 자녀들 모두 아기 예수를 꼭 안고 절망의 동굴에 갇힌 이웃을 찾아 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아기 예수가 절망의 동굴 마굿간에 탄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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