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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날짜 : 2015.02.01
예배명 : 제직 임직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성경본문 : 빌 3:7-1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50201.wmv

7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세시봉 그룹이 있는데, 멤버 중에 하나인 이장희 가수가 있습니다. 그가 지은 노래 중 ‘내 나이 육십 하고 하나일때’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나는 그땐 어떤 사람일까. 그때도 울 수 있고 가슴 속엔 꿈이 남아 있을까.”
저도 7080세대이니 분명히 이 노래를 들었을텐데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이 가사를 접했는데 눈에 확들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현재 정확히 육십하고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희 가수가 27세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27세에 61세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저는 이장희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27살에 사도바울의 생애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빌립보서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을 줄 압니다.
정확한 사도바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수는 없지만 대개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62세에 하나님 품에 안기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울러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에서 기록되었고, 로마 감옥 생활후 얼마 후에 하나님 품에 안기셨을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도 육십하고 하나일 때 기록했을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60세 전후로 기록한 서신임에는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이 가수가 빌립보서를 쓴 사도바울을 알고 있었다면 다른 가사로 노래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육십하고 하나일 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꿈의 사람이 되었을까.”

사도바울이 꿈의 사람인 것은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자, 생각해 보십시다. 사도바울의 나이는 지금 육십하고 하나,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종종 60넘으신 분들이 대학 졸업장을 받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물론 그것도 멋진 모습입니다. 그들도 멋진 꿈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도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로마제국의 감옥에…. 로마의 감옥도 사도바울의 꿈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물론 달리 생각할수도 있겠습니다. 감옥이 그의 꿈을 더욱 키운 곳이라고…. 그러나 아무나 감옥에서 꿈이 커 가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에 갇힌 것 말고 그의 꿈을 방해할만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아픔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전체를 살펴 보면 바울의 많은 아픔이 서려 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10년전에 개척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데 바울이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받은 선물에 대해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편지를 쓰는 숨은 이유가 있었는데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선물을 보내긴 했어도 그들의 바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빨리 자기들에게 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상 그럴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 대신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먼저 보냅니다. 미안했던지 보내면서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칭찬을 늘어 놓습니다. 물론 선물에 대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울은 디모데를 기다리는 빌립보 교우들의 마음을 달래기 바빴던 것입니다. 결코 기쁨의 서신이 아닙니다. 그뿐 아닙니다. 4:2절에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 안에 불화가 계속 있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10년간 수고하였지만 아직도 앞이 요원하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바울의 꿈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이뿐일까요? 1:17절을 보면,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깐 이마 또 까’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도바울을 더 어렵게 하려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도 그의 꿈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러면 과연 61세의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도 꿈의 사람으로서 살수 있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제가 본 교회 목회초기에 몇 차례 독수리에 대해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매는 죽은 동물을 먹기를 좋아하지만 독수리는 항상 산 동물을 좋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매는 폭풍이 올 때면 동굴 같은 곳으로 숨어 들어 가지만 독수리는 폭풍 위를 뚫고 올라가 하늘 위를 폭풍이 지날 때까지 날아 다닌다는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최근 독수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독수리는 30년 좀 넘게 살게 되면 무뎌진 부리가 자라 목을 찌르고 날개의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날카롭게 자란 발톱마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고통의 과정을 밟아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 선택하게 됩니다. 만일 새 삶을 선택하면 6개월 정도 먹는 것도 포기하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합니다. 6개월씩이나….
높은 산정에 둥지를 틀고 암벽에 수도 없이 부리를 쳐 깨뜨리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부리가 나면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고는 그 새 부리로 낡은 날개의 깃털도 뽑아내고 새 깃털이 자라 날갯짓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견기기 힘든 고통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때 독수리의 몸은 피범벅이 됩니다. 그런데도 독수리는 그 고통의 벽 앞에서 자신을 전부 새롭게 갈고 새 삶의 문을 연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부활한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도 독수리를 좋아했고 자주 생각했지만 이제 육십하고 하나가 된 저는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정말로 독수리처럼 되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독수리에 대한 지식 너무도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저처럼 이 놀라운 독수리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는 독수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고상한 지식을 알고 있었고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런 고백을 하는 사도바울은 어떤 삶을 살까요? 그는 고백합니다. 10,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바울은 독수리에 관한 지식이 필요 없었습니다. 독수리와 비교도 안 되는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자기의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기에 감옥에 갇혔어도 그리고 수고한 열매가 안 보일지라도 아니 열매는 커녕 억울한 체험을 해도 그는 꿈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12-14절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의 지식을 소유한 자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막을수 없습니다. 감옥도 이웃의 시기도 이웃의 싸움도 그의 나이도….왜냐하면 그는 가장 무서운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두려워하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사도바울이 바라보는 부름의 상이 무엇이기에 그는 죽음 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고 그 나이에 그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까요? 달려가지 않아도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 것이고 그러면 그 때 준비된 하늘의 상을 받을텐데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읽으면 분명히 부름의 상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면류관인지 아니면 금으로 만든 큰 성과 같은 저택인지 알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부름의 상을 그처럼 보이고 손에 쥐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Os Guiness라는 신학자는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보좌 앞에 온전한 모습이 되게 하시고자 부르셨다고 표현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염두에 두고 사도바울의 고백을 읽으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부름의 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이 최고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이 땅에서 몇 년 더 하늘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 6개월간 모진 고통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서게 되기 위해서 60세가 넘어서도 어떠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온전한 성숙을 위하여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당했던 모든 어려운 일들도 그로 말미암아 최고의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하는 축복의 선물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는 언제나 꿈과 정열의 모습으로 온 세상을 독차지한 듯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실 올해는 전보다 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아울러 교회적으로도 많은 도전을 느낍니다. 특히 재정적인 면에서…. 그렇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마저 도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이 모든 여건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독수리가 되게 하기 위한 선물이 아닐까요?

오늘 제직임직예배로 드립니다. 저희 교회는 일년에 두 차례 임직예배를 드리는데 2월 첫째 주일과 9월 세째 주일에 드립니다. 잘 아시는대로 9월에는 신임 안수 집사, 권사, 장로 임직식입니다. 반면 2월에는 신임은 서리집사님들뿐이고 그 외에는 재임 안수 집사, 장로, 그리고 구역장 및 소그룹 인도자들을 위한 임직식을 갖습니다. 신임 서리집사님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들은 첫번째 임직이 아닙니다. 신임서리집사님들도 곧이어 두번 세번 임직을 받게 될줄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임직 받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사도바울의 고백은 큰 도전과 용기를 준다고 봅니다.
먼저 신임 집사님들께 말씀드립니다. 많은 기대와 꿈을 안고 오늘 임직을 받으실줄 압니다. 한편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믿고 주님의 이야기에 몸을 던지십시요. 꿈과 정열의 사람이 되십시요.
재임직 받으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임기가 시작되시는데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보다 더 용맹스러운 독수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폭풍우를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가 되십시요. 아니 그보다 죽음의 세계를 넘어 하늘나라의 푯대를 향해 달려 가십시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위한 달음질을 계속하십시요. 여러분의 달음질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일뿐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세대의 시인 다니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스스로를 초월하여 이루고자 한 바를 성취할 수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불쌍한 존재겠는가?” 말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지 않으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삶이겠는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될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직분 잘 감당하면서 올해도 열심히 달려 가십시다.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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