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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생명을 취하라” 디모데전서 6:17-19 (11/05/2023)

C. S. Lewis교수가 제자와 함께 옥스퍼드 캠퍼스 근처의 무덤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자가 매우 흥미롭게 쓰여진 한 비문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이 비문 좀 보세요. 굉장히 재미있는 비문이 쓰여 있네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유언에 의해 쓰여지다. “갈 곳 모르는 무신론자 여기 누어있다.”’ 루이스 교수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을 합니다.

“재미라니, 이제 그는 갈 곳을 알지 않았겠나! 너무 늦었지! 너무 늦었단 말야!”

무덤에 육신이 묻힘과 함께 그 사람은 다시 돌아 오지 못할 영원한 곳에 이미 도달해서, 자기가 갈 곳이 바로 이곳이었음을 깨닫고 지금은 바로 그 곳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비통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재미있는 비문을 적어 달라고 했지만 이제는 영벌에 처한 가운데서 이 유언을 써달라고 했던 그 때를 후회하고 있을 것임을 루이스는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실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았군 그래서 지옥 형벌을 영원히 맛볼 수밖에…. 나는 주님을 구세주로 믿으니 영생이 보장되어 있지….”

맞습니다. 영원한 부활 축복을 받으신 것을 늘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춰서는 또 안 됩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 주일로 지키는데 이땅에서 사시는 동안 청지기 사명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김성택 목사님께서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를 통해서 은혜로운 말씀 전해 주셨습니다. 월요일에는 이 지역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셨는데 목사님께서 경험한 재미 있는 이야기로 시작하셨습니다.

몇년 전에 오랫만에 한국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모자 가게를 지나는데 아주 멋진 모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독일제 모자였는데 가격은 파격적으로 저렴했습니다. 유명한 Adidas 모자였습니다. 물론 값이 싸니 냉큼 사셨습니다. 미국에서는 도저히 그 가격에는 살수 없는 가격이었습니다.

한참 후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았는데 상표가 Adidas가 아니라 Adidos ‘a’가 아니라 ‘o’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주 설교 원고를 적으면서 재미 있는 현상을 보았는데 Adidas를 적을 때는 콤퓨터에 빨간 underline이 나오지 않는데 Adidos를 적으니 금방 빨간 underline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콤퓨터도 구별을 하는데 목사님의 눈은 구별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표에 비해서 값이 너무 저렴하니 냉큼 사고 만 것입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주일로 지키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함입니다. Adidas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기 위함입니다. Adidos가 아니라….

청지기들이 바로 Adidas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청지기의 삶을 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Adidas와 Adidos를…, 그러나 하나님은 구별하십니다.

 

그동안 디모데후서 강해 말씀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청지기 헌신 주일을 맞이해서 디모데전서 마지막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디모데전서도 후서와 같이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전서에는 더 상세하게 목회지침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목회 지침서라고 생각되는 이 디모데전서를 마치면서 무엇을 강조하는지 살펴 보면 큰 의미가 있을줄 압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그러면 부자가 아닌 분들은 일단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숨 놓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럴까요?

 

사실 사도바울 답지 않게 목회지침서의 마지막은 문맥의 흐름이 좀 어색합니다. 어떻게 보면 디모데전서의 휘날레는 바로 전 귀절들은 11-16절 말씀입니다. 디모데에게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중요 부분만 말씀드리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로 시작해서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으로 마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다. 이 때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는 당연히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읽었을 것입니다. 모두 청중은 편지가 마쳤구나 하면서 “아멘” 했을 것입니다.

제가 늘 설교 마지막을 “말씀을 거둡니다” 로 시작해서 성경말씀을 낭독함으로 설교를 마치는데 성경말씀을 마친 후 “아멘” 하고는 또 다른 말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이를 들으며 모든 교인들은 어리둥절해졌을줄 압니다. 그중에서도 부자들은….

 

그런데 제가 부자가 아닌 분들은 한숨 놓아도 되는지 살짝 운을 띄워 드렸죠. 실은 디모데에게 휘날레로 권면하기 전에 마지막 지침서를 보아야 합니다. 9, 10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도바울은 부하려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마음만 있지 정작 부자는 되지 못하고 파멸의 길에 빠진 사람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곧 목회지침서로 생각되는 디모데전서는 이런 순서로 마칩니다. 먼저는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그리고는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아멘’으로 끝내는 것 같더니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이미 부자가 된 자들에게 주는 훈계로 마칩니다.

 

사도바울이 어떤 의도로 지침서의 마지막을 좀 어색하게 마치는지는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두 가지는 알수 있습니다.

첫째로 재물에 대한 가치관이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함을 사도바울은 꽤 뚫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에 대한 말씀을 지침서 마지막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두 부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 또 하나는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

이 둘에 속하지 않은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부자로서 계속 부하려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니 실은 이렇게 나눌수도 있겠습니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 그리고 부자, 그런데 부자는 또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렇게 마지막을 마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먼저는 부자를 포함한 모든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이들에게 주는 공통적 교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그리고는 편지를 마칩니다. 제 모습과 견주면 “말씀을 거둡니다” 하면서 마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 가지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부하려 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에게 명하여….”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마지막에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만 꼭집어서 훈계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부자들이 잘 하면 세상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부자들이 실은 정치 경제 등 모든 제반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던 관계 없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에 공통적 현상입니다.

 

Oxfam International 자료에 의하면 2013년 십년전 자료이지만 세계 100명의 부자들이 그 해에 번 돈으로 온 세계의 가난을 네번 해결하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100명의 부자가 한 해 번 돈을 내어 놓으면 온 세계는 4년간 아무도 가난하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쩔수 없고, 교회를 다니는 부자들이 Adidos가 아니라 Adidas가 되면 저는 확신합니다. 전 세계의 가난도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교회는 매 주일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로 들끓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해당무!”  그런데 어떤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 사는 Asian American의 10%가 가난층에 속한다고 합니다.

 

사실 사도바울 당시는 전 인구의 90%가 빈곤층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사도바울은 실은 10%에 해당하는 부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10%가 잘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 당시 사도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10%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은 청지기 헌신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우리만 잘 하면 세계 빈곤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는 새롭게 부흥하게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Adidos가 아닌 Adidas가 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온 이웃들에게 Adidas가 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17절,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겸손히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참 부자들입니다. 이들이 Adidas입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삽니다.

 

예수전도단의 창설자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승리의 삶’

자기의 것을 포기할 때 더 놀라운 축복이 임함을 역설합니다. 사실 자신의 책 ‘네 신을 벗으라’에서 여러 가지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소개하고 그러나 도리어 채우시는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포기한 항목을 하나 하나 나열합니다. 첫번째는 사랑하는 이들 곧 가족을 내려 놓을 때 받은 축복을 나열합니다. 두번째로는 재정을 내려 놓을 때 받은 축복을 나열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더니 더 크게 축복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 명예, 감정 등을 내려 놓음을 통해 승리의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첫번째가 가족 두 번째가 재정 그러나 도리어 넘치는 축복으로 돌아 왔음을 고백합니다.

 

재정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주신 집을 사역을 위해 내어 놓았는데 결국 사역도 잘 되고 집도 다시 허락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의뢰한 것입니다.

 

아울러 이처럼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8절,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4세기 암브로시우스라는 교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소유물이 소유자의 것이 되어야지, 소유자가 소유물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재물을 소유물처럼 사용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고 나눌 줄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소유물의 노예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시게 될줄 압니다.

“소유물에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모두 포기하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로렌 커닝햄 목사님께는 하나님께서 직접 영감으로 알려 주셔서 자신의 집도 내어 놓았지 아무나 다 커닝햄 목사님의 흉내를 낼수 없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의 전통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 오면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멜기세덱 왕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어서 야곱도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는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커닝햄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동안 맡겨 주신 것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도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인데 이제는 20일조 곧 20분의 1을 이런 마음으로 드려도 되지 않나요?”

 

설교 서두에 무덤 비문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았고 지금 죽어도 영생을 얻게 되어 있다고 말씀을 나눴습니다. 영생의 확신이 없으신 분은 십일조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으신 분들께만 십일조가 해당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하십니까? 비몽사몽 중에 누가 나타나서 말했나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이라고…. 우리의 의로움은 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혈을 흘리셨고 이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칭하신 것입니다. 곧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움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함의 의로움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 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천국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한편 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하여 십일조를 받으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후 나머지는 알아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 십일조를 대신하는 기준을 만들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기준은 죄성으로 물든 기준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 왔다면 청지기의 삶의 기준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만 만드실수 있습니다.

곧 우리 스스로 기준을 만드시느라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만든 기준은 틀릴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도 십일조를 드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분들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들의 말씀을 들으십시요.

우리의 구원의 길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처럼 청지기로서의 삶의 기준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곧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삶에 기준을 세우실수 있는 의로우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은 이미 선한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고 너그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시작됩니다. 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는 천국에서 놀라운 축복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부터 Adidas의 삶을 삽니다. 하늘 나라에 놀라운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C. S. Lewis는 그의 소설에서 어느 주인공을 통해 다음과 같이 천국에 대해 말합니다.

“마침내 저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여기는 저의 진정한 나라입니다. 저는 여기에 속합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 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제가 일생 동안 찾아 왔던 나라가 바로 이 땅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늘 나라에서 이런 고백을 나눌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놀라운 청지기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참 천국의 자녀로 살아 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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