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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두 주 전 미국 일부에서는 개기일식이 일어났습니다. 보스톤에는 부분일식 약 93%의 일식이었다고 합니다.

개기일식이 지나간 곳 중 하나가 오클라호마 주인데 그 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고 합니다. 농기구를 가지고 나와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행사입니다. 이유는 오클라호마 주에는 미 원주민, 곧 First American부족인 Choctaw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실제로는 앨라배마 주와 미시시피 주에서 강제 이동당한 First American들입니다.

이들의 전통 중 하나가 개기일식 때는 모두 나와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인 즉슨, 이들은Fʋni Lusa라는 다람쥐가 배가 고파서 태양을 먹고 있기에 이 다람쥐를 쫓아 내기 위해서 굉장한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 개기일식 시간은 정확히 4분 28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기일식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전통이 생긴 이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저 나름대로 추측하기는,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원래 고향 앨라배마와 미시시피에서 쫓겨나서 오클라호마에 와서 Indian Reservation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들이 사는 땅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언제 또 쫓겨날지 모릅니다. 오직 믿는 것은 하늘의 태양빛이었습니다. 태양빛 덕분에 언제가 쫓겨날지 모르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놀랜 나머지 농사를 멈추고 요란한 소리를 낸 것입니다. 태양이 얼마나 소중함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전통에서 나오는 행사인 것 같습니다.

 

지난주부터 요한복음을 나눕니다. 특히 ‘I am’ 시리즈로 나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I am the bread of life’에 대해 나눴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주님은 그냥 자신을 소개하는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I am’으로 소개하시는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밝히신 바로 그 이름 ‘I am’을 사용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신데 바로 세상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I am’을 7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당신을 어떻게 표현하시나요?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나는 세상의 빛이라.”

 

그러면 어떤 배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요? 지난주에는 무리들이 유월절이 가까이 올 무렵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배부름을 경험하고는 주님을 다시 찾아오니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주석가들은 장막절 기간 마지막 저녁에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 말씀 전인 7:37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명절이 바로 장막절이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신학적인 내용을 설명해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유대교에는 삼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이 세 절기에는 모든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장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조들의 광야 40년을 기억하면서 선조들이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셨습니다.

주석가들은 조금 전에 봉독해 드린 7:37은 마지막 날 낮에 주님께서 외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밤이 되었습니다. 장막절 기간은 밤에도 환히 불을 켜 놓았습니다. 광야의 밤을 비추던 불기둥을 연상케 하기 위해서….

곧 이날은 마지막으로 메노라에 불을 환히 키는 날입니다. 일년 후에 다시 장막절이 와야 불을 다시 킵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지막 날 마지막 메노라 불을 보면서 좀 서운한 느낌도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1년을 또다시 기다릴 생각을 갖고…. 이러한 배경에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물론 좋은 기회를 타고 말씀하시지만 누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믿어 주었을까요?

 

어느 소설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옵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편지를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아마 선생님처럼 외로운 사람이었겠죠?”

어떤 분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도 하였을줄 압니다. 이 소설가는 본인이 외로운 삶을 살았던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외로운 사람이었겠죠?”

 

아니나 다를까, 금방 반응이 옵니다. 13절,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세상에 자기가 자기를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있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 곧 주님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외로움은 더욱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반문하십니다. 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사실 주님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시고 계십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한 사람도 당신 편에 있지 않아도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시다고 증언하십니다.

 

그리고는 한참 설교를 하시는데 이를 못 참는 바리새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니 주님께서는 성전을 도망나가십니다. 참 빛은 성전을 도망나가고, 마지막 메노라 불빛만 예루살렘 성을 밝히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로운 마음을 안고 도망나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롭고 쓸쓸한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메노라 불빛은 그냥 기름을 태워서 비추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빛인데….”

 

그러면 장막절의 불빛이 사라진 후 바리새인들과 주님은 각기 어디로 향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내년도에 또 켜질 장막절의 미노라 불빛을 생각하면서 자기들 공동체로 향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을 하면서….  반면 예수님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은 맹인을 찾아 가십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끼리끼리 몰려 다닙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기에 어두운 곳을 찾아 가십니다. 빛이 필요한 곳은 바로 어두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에 삼킨 바 되어 갑니다. 주님은 외롭지만 참 빛임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맹인을 빛의 증인으로 바꾸십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참 빛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빛이라고 말하는 가짜 빛 공동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어두운 곳에 가면 자기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움에 자기들이 삼켜버림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온 세상 창조의 시작입니다. 이제 주님은 영원한 세계의 빛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키 위해서 주님은 맹인을 만난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맹인을 빛의 증인으로 삼기위해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맹인이 순종해서 눈이 밝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주님은 당신은 세상의 빛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눈 뜬 맹인을 가만히 둘리가 없습니다. 9: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를 마을에서 쫓아냅니다. 빛의 증인을 마을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마을에서 쫓겨난 맹인을 찾아가 당신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곧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 빛을 만드셨는데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손수 빛이 되셔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조 시 당신이 만드신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빛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맹인은 얼떨결에 답합니다. 36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에 주님은 답하십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런데 맹인의 고백에서 빛의 증인된 자들의 특징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표현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바로 빛의 증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인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조 시 만드신 세상을 밝히는 빛은 그냥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그 자체가 되신 것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Charlie Mackesy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소개합니다. 소년과 말의 대화입니다. 소년이 말에게 묻습니다.

“여태껏 무엇이 네가 말한 가장 용기 있는 말이었니?” 말은 대답합니다.

“Help!”

 

하나님께서 스스로 빛이 되신 것을 믿는 것은 아주 특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의역하면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도와 주세요.”

평생에 가장 용감한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때 맹인의 영적인 눈은 띄이게 됩니다. 참 빛 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도와 주세요.”

 

어떻게 보면 웃겨 보입니다. ‘믿던가 안 믿던가’이지 어떻게 이런 고백이 믿음의 고백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웃기는 고백으로 인해 맹인의 영적인 눈은 띄게 된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약 두 주 전에 보스톤 지역은 개기일식은 아니었지만 부분일식으로 지나갔습니다. 그 때 저는 어느 목사님을 만나고 있었는데 마침 목사님이 태양을 보는 안경을 갖고 오셨습니다. 저도 잠깐 보았는데 사과 한쪽 파 먹은 것 처럼 조금 달에 가려진 태양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 안경 없이는 태양을 보면 눈이 크게 상처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든 생각은, 이 안경 없이는 태양빛을 볼수 없듯이 주님의 빛을 보는 안경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도와 주세요.”

어떻게 보면 웃기는 안경입니다.

 

한편 개기일식을 보는 안경도 웃기는 안경입니다. 제가 그 안경을 갖고 왔는데 보여드리겠습니다. 웃기지요? 바로 이 시각장애인의 모습입니다. 그의 모습은 웃기는 모습입니다. 그의 고백은 웃깁니다. 그러나 그 고백 덕분에 그는 참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 고백 없이는 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 이미 믿고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주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41절,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리고 이 안경을 쓰고 참 빛을 만난 사람은 어둠 속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서 입니다.

내일이 Earth Day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는 지구를 비추는 태양에 대해서는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빛은 특별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웃기는 믿음.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아직 이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갑니다.

 

지난번 제직수련회시 제가 보여드린 사진입니다. 전라북도에서 선교를 하셨던 Reynolds 선교사님 서재의 사진입니다. 바로 한글로 최초로 신·구약 성경 번역이 완성되는 장면이라고 소개해 드렸습니다.

Reynolds 선교사님은 빛을 소유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둠으로 가득찼던 조선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특히 한글성경 번역을 완성함으로써 어두운 조선 땅을 환히 주님의 빛으로 채우신 분이십니다.

 

그는 조선 땅을 그냥 밟았을까요? 이런 고백을 하고 밟지 않았을까요?

“내가 믿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선교사님들은 모두 이런 고백을 하는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어둠의 땅을 밟은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빛이 되셨음을 믿는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부터 BNI클래스가 시작되었는데 특히 한국이 복음화되기까지 기여한 역사들을 종교개혁부터 시작해서 아주 짜임새있는 멋진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중 영국 청교도로서 City upon a Hill을 이 곳에 세우고자 모험을 감행했던 John Winthrop 주지사의 설교도 나누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해 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송과 영광(praise and glory)이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언덕위의 도시가 될 것이다.”

 

청교도들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기 위해서 험한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여정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세워졌고 이제는 한국 이민교회가 바로 보스톤에서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이어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보스톤에서 이 고백의 주인공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둠 속의 빛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내가 믿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이신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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