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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어느 교우님의 수필집에서 읽은 이야기를 먼저 나누겠습니다. 젊은 시절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느날 생쥐들만 보전하는 연구실에 들어가셨는데, 새끼를 낳는 장면을 보셨습니다. 3주일 전에 이미 몇 마리를 낳았는데 다시 출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쥐들은 이처럼 번식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실은 이 날은 이미 난 세 마리를 어미와 분리시키러 들어 갔다가 또다시 출산하는 장면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쥐들은 자기들이 새끼 낳는 장면을 들켰다고 하면 아예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어짜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테니 자기들 손으로….

이에 조금도 망설일 틈이 없이 연구실을 빠져 나올수 밖에 없으셨다고 합니다. 생쥐에게 들킬까봐….

사실 연구용 생쥐들은 값이 꽤 나가는데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몇 마리를 낳았는지 보시고 싶으셨지만 꾹 참고 방문을 나왔습니다. 3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연구실을 들여다 보셨다고 합니다. ‘어미에게 먹히지 않고 무사히 살아있을까?’ 조바심을 가지고…. 그런데 그 염려는 눈 녹아내리듯 사라졌습니다. 그 날은 생쥐네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셨다고 합니다. 다음의 글로 수필을 마칩니다.

“생명은 어떤 것이든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것, 산다는 일은 크고 작은 걱정과 염려의 연속이기에 생명으로 인하여 얻을수 있는 아주 작은 기쁨이라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생쥐의 생명으로 인해 아주 작은 기쁨을 누리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으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 인간이 생쥐의 생명의 소중함을 감사하고 있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 대해 어떠하실까요?

 

오늘 ‘I am’ 시리즈 세번째 강해 말씀을 드립니다. 반복이 중요하니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요한복음을 구성할 때 쓴 방법 중 하나가 ‘I am’시리즈입니다. 이 ‘I am’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그 ‘I am’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로는 ‘I am the bread of the world.’ 두번째로는 ‘I am the light of the world.’ ‘하나님인 나는 세상의 떡이다.’ ‘하나님인 나는 세상의 빛이다.’ 지난 두 주간 이 내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I am the door for the sheep.’ ‘하나님인 나는 양의 문이다.’

 

제가 지난 두 주간 주님께서 ‘나는 세상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실 때 두 번 다 어떤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세상의 떡이다’ 말씀하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울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말씀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양임을 은연중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장막절을 배경으로 말씀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장막절에는 저녁마다 광야 40년의 불기둥을 상징하는 메노라 촛대가 켜지는데  마지막날에 켜져있는 촛대가 곧 꺼질 것을 내다 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짜 빛이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그리고는 주님은 당신이 빛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시각장애인을 찾아가십니다. 두 가지 장애를 모두 고쳐주십니다. 육신적 시각장애와 영적 시각장애…. 한편 이 시각장애인을 괴롭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1, 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는 ‘진실로 진실로’로 말씀을 시작하신다고….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외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대단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시작하셨는데 너무도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담을 타고 넘어가는 자들은 당연히 절도며 강도이고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바로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싱겁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려고 “Amen, Amen” 하셨나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래도 계속 또 평범하고 지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양의 목자가 문으로 들어갈수 있는 이유는 문지기가 알아보기 때문임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5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아, 주님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시려고 “아멘, 아멘” 하시면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바로 바리새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참 목자가 아니라서 양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바로 도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돌려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이 간단한 비유를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그들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권력자들과 늘 가까이 지내서 모든 일들이 순탄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줄을 서서 따릅니다.

자기들이 문 가까이만 가면 문은 늘 열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도적과 강도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다시 입을 여십니다. 이번에는 어쩔수 없이 ‘I am’을 사용하십니다. ‘나 하나님은…’을 사용하십니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다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로 말씀을 하십니다.

“I am the door for the sheep.”

 

처음에는 문지기와 목자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다짜고짜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문이다.’

“나 스스로 있는 하나님인 내가 바로 문이다.”

 

이를 듣고 바리새인들은 더욱 혼란해졌을 것입니다.

“목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문이래…?” 주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8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은 당신이 문인데 당신을 하나님이자 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곧 이를 받아드리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바로 절도며 강도야” 소리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반면 당신을 하나님이자 문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한편 이 당시 구약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문’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을 줄 압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의 마지막 축복을 빼앗고는 형 에서에게 쫓겨 삼촌 집으로 도망갑니다. 벧엘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꿈에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에 야곱이 잠을 깨서 외칩니다. 창 28:17절,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늘의 문이 땅에 내려온 것입니다. 이 문을 통해 하늘의 축복이 쏟아져 내려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양들을 위한 하늘의 문이심을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후로 모든 유대인들은 야곱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 문을 체험할수 있을까?’ 이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고 있는 하늘 문을 소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I am the door.”

 

그런데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 바로 축복의 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요즘도 비슷하지만…. 이 당시는 헤롯 왕가가 통치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헤롯 왕가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타락했겠습니까? 그들과 한통속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종교지도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는데 그는 물론 대제사장 계열에 들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로마 총독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 받습니다. 그렇다면 말 다했죠. 어느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최근의 예루살렘 발굴 작업에서 아주 호사스런 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집이 분명 가야바나 혹은 장인 안나스 대제사장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곳에 있었다면 그 대제사장이 누렸던 호사스러움에 놀랐을 것입니다.”

이 당시 세상 축복의 문은 헤롯 왕가와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이들에게 딱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I am the door.” “내가 바로 축복의 문이다.”

 

처음 어느 교우님이 생쥐를 아끼는 모습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한 인간이 생쥐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손수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하늘의 문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손수 문이 되셨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다시 한번 BNI강의 내용을 나눌수 밖에 없네요. 지난주 강의에는 안타까운 내용을 많이 들었습니다. 청교도 신앙으로 목회자들을 세우려고 John Harvard 목사님이 하버드를 세웠고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었지만 후에 유럽에서 계몽주의 등 새로운 철학과 신학 사조가 들어 오면서 Unitarian목회자들이 배출되었고 현재까지 타운마다 큰 Unitarian 교회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는 Dedham 타운에 가면 제일 가운데 큰 Unitarian교회가 있고 그 옆에 작은 회중교회와 성공회 교회가 있습니다.

Unitarian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습니다.

곧 주님의 이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나 하나님인 내가 바로 축복의 문이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손수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축복의 문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빵이 되시고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축복의 문이 되셨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 가십시다.

 

노예로 살면서 이 문으로 들어갔던 많은 흑인 가정이 있습니다. 그 중 Howard Thurmann목사님이 BU 교목으로도 수고하셨고, 특히 마틴 루터 킹의 멘토이며 흑인 인권 운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친할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노예로 있을 때 종종 목사님들이 노예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했는데 항상 같은 내용을 전했다고 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할머니는 나중에 글을 배우면 결코 성경의 이 말씀은 읽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후에 하워드가 글을 읽게 되었을 때 할머니에게 성경을 읽어 드렸는데 어쩔수 없이 사도 바울의 서신은 읽지 않았고 단지 사랑장 곧 고린도전서 13장만 읽어드렸다고 합니다.

한편 다른 특별한 목회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회자는 설교 마지막에는 늘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그 목회자는 일어서서 천천히 방에 있는 모든 흑인들을 둘러 보고는…,

“여러분은 노예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깜둥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할머니는 이 말씀을 할 때마다 몸을 곧게 하고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멀리 내다 보셨다고 합니다.

 

이 때마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서 너희를 위한 문이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먹은 것입니다. 노예들 가운데 겸손히 하늘의 문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온 세상은 헤롯과 가짜 대제사장의 음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노예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서 너희를 위한 문이다.”

이 음성을 들으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수녀가 공항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몸에는 온통 타투로 가득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 함께 있는 여자는 배가 부른 것을 것을 보아 곧 아기를 출산할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녀는 아이 밴 것을 축하한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은 웃으면서 아이의 이름은 ‘히스기야’로 이미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히스기야 왕처럼 기도 응답도 받고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경건한 사람들이고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본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궁금해서 언제부터 그렇게 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실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바로 죄수들 사이에 하늘의 문으로 오심을 체험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죄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죄수로 취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하나님으로서 너희의 축복의 문이다.” 그 후 온 가족이 하늘의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먹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태어날 히스기야와 더불어….

 

이 놀라운 축복의 문으로 함께 들어가십시다.

 

감옥에서 만난 이들은 축복의 문을 통과한 결과 죄수들이지만 자기들은 왕을 낳은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들이 아들의 이름을 히스기야로 지었을 때 하늘 문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십시다. 저희 교회 자녀들 모두 히스기야와 같은 왕 같은 자녀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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