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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니…” 요한복음 15:1-8 (06/23/2024)

오늘은 엉뚱한 농담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드라이브를 즐기던 어느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서로 말도 않고 썰렁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차창 밖으로 개 한 마리가 얼쩡거리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빈정대며 말합니다.

“당신 친척이잖아? 반가울텐데 인사나 하시지?”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가 그 개에게 소리쳤습니다.

“안녕하세요? 시아주버님!”

아내가 되받아친 것입니다. 당신 형이라고….

 

그동안 주일예배를 잘 드리신 분들은 오늘이 예수님의 ‘I am’ 시리즈 마지막 설교인 줄 잘 아실텐데 왜 이런 엉뚱한 조크로 시작하시나 의아해하실 줄 압니다. 하여튼 오늘이 주님의 이름 ‘I am’ 씨리즈 마지막 일곱번째 설교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해드릴텐데, 이번에는 이름 중에 동물 내지 식물과 관계된 것이 있는지 염두에 두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I am the bread of life,” “I am the light of the world.” “I am the door.” “I am the good shepherd.”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지난주는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일곱번째인 오늘은, “I am the true vine.”

‘선한 목자’는 사람이니 동식물과 관계 없다고 생각하면, 오늘 함께 나누는 주님의 이름만이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동물이 아니라 식물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라….”

 

그동안 주님의 이름에 대해서 나누어 왔는데 기회가 되면 제 이름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오늘 밖에 없어서 좀 생뚱맞아보이지만 저의 이름도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영길인데 한자로는 ‘영’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두 가지가 눈에 띄입니다. 하나는 영원을 뜻하는 길 ‘永’, 또 하나는 영화롭다 할 때 쓰는 꽃 ‘榮’.

제가 필라델피아 연합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담임 목사님이 저를 이처럼 재미있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길 저 길 가보다 영원한 길이 있어 영원한 길을 택한 이영길 목사입니다.”

저도 웃었고 참석자들 모두 웃었습니다. 저는 더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말씀드린대로 흔히 사용되는 ‘영’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을 뜻하는 ‘영’입니다. 또 하나는 영화를 뜻하는 ‘영’입니다. 저는 두번째 榮입니다. 저의 한자 이름에 충실한다면 이렇게 표현하셨어야만 합니다.

“이 길 저 길 가보다 영화로운 길이 있어 영화로운 길을 택한 이영길 목사입니다.”

 

요즘은 늘 그 목사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두 가지 이름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삶도 살고 영화로운 삶도 살고….

 

그런데 주님은 몇 가지 이름이라고요? 일곱 가지…. 오늘은 마지막 이름을 나눕니다. 여섯 가지 이름 중 하나도 뺄 수 없지만 이제는 그 동안 여섯 가지 이름을 총망라하는 기가 막힌 이름을 생각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이 마지막 이름을 말씀하시고 골고다로 향하시게 됩니다.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주님은 마지막으로 당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라.”

그뿐 아닙니다. 농부를 소개하십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저는 한글번역이 참 마음에 듭니다. 띄어쓰기가 없이 쓰여져 있습니다. ‘참포도나무.’ 아예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로도 그렇고 영어로도 그렇고 띄어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The True Vine.’

그러면 참포도나무는 어떤 나무일까요?

 

‘참포도나무’라는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흔한 나무가 포도나무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포도나무지만 특별히 택한, 무언가는 내적으로는 크게 다른 나무라는 뜻일줄 압니다.

지금도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은 예수님도 하나의 사람이었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석가모니와 비슷한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이름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나는 참포도나무라.’

 

Brother Lawrence라고 17세기 프랑스 어느 수도원에서 부엌에서 요리사로 후에는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면서 수도 생활을 했던 평신도 수도사가 있습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틈틈이 적어 놓은 글이 나중에 발견이 되어 출간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영성학계에 소중한 자료가 되어 있습니다. 웨슬리 등 많은 목회자 내지 신학자들이 애용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실은 어릴 때 가난해서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합니다. 정확히 16살 때입니다. 전쟁터에서 추운 겨울인데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겨울 나무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꽃이 피며 나뭇잎들이 울창해 질 것을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을 느낀 것입니다. 비록 추운 겨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보라를 맞으면서 묵묵히 견뎌야 하지만 바로 그 나무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움직이는 동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것이 아닙니다. 말없이 서 있는 겨울 나무를 통하여 느낀 것입니다.

 

그후 부상을 입고 일찍 제대합니다. 겨울나무를 만난지 10년 후 곧 26살에 수도원에 들어가고 가장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지냅니다. 부엌 창문을 통해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늘 체험하였고, 소박하게 글을 쓰면서 평범한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왜 Brother Lawrence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을까요? 그의 삶은 어릴 때부터 아무 일도 안 되는 힘든 삶을 삽니다. 결국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군대에 입대한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겨울나무를 만납니다.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것입니다.

실은 자기 자신의 삶이 겨울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바로 주님의 모습임을 느낀 것입니다. 늘 실패의 삶을 살았는데 그래서 늘 추웠는데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임재의 증거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겨울나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성한 여름나무가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온 세상이 전쟁에 휩싸인 것을 보면서 주님은 전쟁터 한 가운데 겨울나무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언젠가 봄이 오고 열매를 맺히게 될 인류 역사를 기대하면서…. 요즘은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방에 있는 겨울 나무 가운데 함께 하실줄 압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은 스스로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인류의 죄로 인해 모진 눈보라와 폭풍이 몰아치는 세상에 말없이 서 계시고 계신 것입니다.

동물들이라면 눈보라와 추위를 피해서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그러나 참포도나무는 오고 가는 모진 세월의 비바람과 폭풍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농부인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농부라고 표현하신 것은 기가 막힌 표현이십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한번 심은 포도나무를 날씨를 피해 옮겨 심으시지 않으십니다. 심겨진 그 곳에 그대로 두십니다. 대신 함께 아파하십니다.

 

올해 뉴질랜드에서 tree of the year로 선정된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이름은 ‘걸어다니는 나무.’

뉴질랜드인들에게는 겨울 나무에는 관심이 없는듯 합니다. 가만히 있는 곳에 머물러 있는 나무는 땔감으로나 사용되지 어떤 흥미를 주지 못하는가 봅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의 영성은 나무의 영성이 아니라 동물의 영성, 강아지 영성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처음에 소개해 드린 조크에도 아내를 강아지로 비유했다가 도리어 바가지를 쓰는 일들이 우리들 사이에 종종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동물의 영성을 가진 자들의 특징입니다. 식물의 영성을 가진 자들은 이웃을 늘 받아줍니다. 이웃에게 좋은 것을 나눕니다. 동물의 영성을 가진 자들은 이웃을 비판합니다. 결과적으로 그 비판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 옵니다.

 

우리들의 영성이 동물의 영성이 될 줄 아시고 주님께서는 오래 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포도나무는 농부에게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달라 하나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농부에게 철저히 모든 것을 맡깁니다.

 

얼마전 임영수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지금까지 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 교인들은 하나님께 길들여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요즘은 걸어다니는 나무가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추우면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하고, 우리 자녀는 늘 따뜻한 곳에서 살게 해 달라고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꿋꿋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최고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길들여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참포도나무되신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농부로 모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길들여지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포도나무이신 것입니다.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자꾸 걸어다니는 포도나무가 될 것을 잘 아시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걸어다니는 나무는 제거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버지께 길들여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래서 주님게 붙어 있는 자들은 더 열매를 맺게 하려고 더욱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AI시대가 되면서 장단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AI에 길들여 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컴퓨터를 켜면 모든 광고나 자료들을 AI가 골라서 보내 주고 있습니다. 안 볼래도 어쩔 수 없이 잠시라도 보게 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무엇엔가 길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아시는 참포도나무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참포도나무라는 AI에 길들여지는 길을…. 움직이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자동적으로 깨끗해지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포도나무는 이 세상 그 어느 AI보다도 파워풀한 최고의 AI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러한 최고의 AI가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참포도나무라는 AI에 길들여지면 그 때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길들여지면 우리는 자연히 열매를 많이 맺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열매를 많이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지가 되어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니 말입니다. 참포도나무라는 AI에 길들여졌으니 말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은 붙어 있는 가지들을 통하여 무성한 열매를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즐겨 읽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다시 열어 보았습니다. 시집 이름은 ‘민들레의 영토’였습니다. 34편의 시가 소개되어졌는데, ‘민들레의 영토’를 포함해서 6편의 시가 식물 소재로 해서 지어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도라지꽃,’ ‘코스모스’, ‘겨울 나무’, ‘해바라기 연가,’ ‘장미의 기도.’

그런데 동물에 대한 시는 한 편도 없었습니다.

 

깊은 영성의 세계에 접한 분들의 모습은 동물 보다는 식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이해인 수녀와 Brother Lawrence의 공통점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해인 수녀의 시 제목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겨울 나무.’

 

첫 연과 가운데 그리고 마지막 연만 소개해 드립니다. 거의 반복입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생각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목숨 이어가는

참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

감사하고 있읍니다

살아온 날

살아갈 날

넘치는 은혜의 바다

…………

내 목숨 이어가는

너무 고운 하늘을

먹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홀로 고운 하늘을 바라 보면서 지난 날을 감사하고 또 앞으로 올 날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해인 수녀의 삶인가 봅니다.

 

한편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십자가에 오르시기까지 철저히 하나님께 길들여지신 주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은 찬바람 부는 갈보리 산에 심겨진 참포도나무가 되셨습니다. 이로서 당신의 일곱 가지 이름을 완성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참포도나무라.”

 

한 때 겨울나무처럼 보이셨던 주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진실로 참포도나무가 되셨음을 요한계시록 기자는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우리는 이 위대한 참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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