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늦게 온 오순절” 사도행전 2:1-13 (07/14/2024)

“늦게 온 오순절” -사도행전 2:1-13

벌써 2년이 지났네요. 2년전 2월 24일 아침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저희 교단 신문에 안타까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종교적 세력 다툼이라고, 곧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다툼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러시아 군대가 출정할 때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이 축복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대가 출정할 때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부들이 축복합니다.

지난주에도 이 전쟁의 피해자들을 돕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총회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목사님은 러시아 말도 하고 우크라이나 말도 하시는 분인데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대화하면 심한 배신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의 가족들이 러시아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가족들에게 등에 칼을 맞은 기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말합니다.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나의 집은 더 이상 없습니다. 나를 받아 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요즘 중동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중인데 이는 어쩌면 민족간의 전쟁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기독교간의 전쟁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 국가간의 전쟁은 역사 속에서 흔히 찾아 볼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유롭에 있었던 30년 전쟁입니다. 종교개혁 후 개신교와 카톨릭 국가들이 1618년부터 30년간 전쟁을 치루면서 800만명의 희생자를 낳은 끔찍한 전쟁입니다.

곧 30년 전쟁이나 지금도 진행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모두 예수 이름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이름으로 이런 끔찍한 전쟁들이 치루어질수 있을까요?

지난 두 달 여간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7가지 이름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다시금 일곱가지 이름을 소개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참포도나무라.’

자 이런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주인공들이 될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 첫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저는 실마리는 바로 첫 단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곧 오순절의 의미를 모르고 오순절의 정신을 지키지 않을 때 예수의 이름은 잘 못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유대교에 큰 절기 셋이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곧 성령강림절 이전에 이미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지켜 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죠. 이 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유월절 후 50일이 지나서 오순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 날 유대인들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처음 난 열매이기 보다는 가장 좋은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곧 유월절 후 50일이 지나서 가장 좋은 열매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오순절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장막절이라고 해서 추수를 다 마친 후 옛날 광야 생활하던 것을 기억하며 1주일간 천막을 치고 생활을 합니다.

한편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 절기가 있는데 이 중 숫자로 되어 있는 절기가 있습니다. 당연히 오순절입니다. 유월절 후 50일이라고 해서….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국이나 미국이나 숫자로 절기를 삼은 날이 있나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즘 한국의 큰 절기는 구정과 추석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성탄절 초파일 등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냥 가장 좋은 열매를 드리는 절기라고 하지 50일후 드리는 절기로 하셨을까요? 왜 숫자를 넣으셨을까요?

‘기다림’입니다.

유월절후 하루 하루 세면서 오순절을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어릴 때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저의 마음은 기다림으로 채워졌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하루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지난 후 하루 하루 손꼽아 기다립니다. 50일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이를 주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10일전, 10일 후는 오순절인데,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고의 열매를 주시는 날이고 이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최고의 열매를 받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기다리라.”

한편 주님께서는 짖꿋게 한 가지는 빠뜨리셨습니다. “오순절까지 기다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으로만 말씀하셨을 줄 압니다. “오순절까지….”

오늘 설교 제목이 좀 요상합니다.

‘늦게 온 오순절.’

실은 올해 성령강림절 곧 오순절은 이미 한 달 전에 지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동안 예수님의 일곱 이름에 대해서 강해 설교를 하다보니 오순절 날에도 주님의 이름을 나눌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 늦게 오순절 설교 말씀을 나눕니다.

한편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요한은 주님의 일곱 이름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요16: 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런데 성령은 누구에게 임한다고요? 오순절 절기가 되어서 사방에서 절기를 지키러 순례자들이 모여왔습니다.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행2: 2-4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교육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제자들이 갑지가 bilingual trilingual이 되었습니다. 7, 8절,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 이 날이 바로 오순절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50일간의 기다림의 훈련이 마치는 날입니다. 기다림의 훈련이 마치는 날 성령께서 가장 좋은 열매가 되셔서 인간사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오순절을 지키는 자들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완수한 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성령 하나님께서도 그토록 기다리셨던 날입니다. 창세전부터 기다리셨던 날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것을….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7주간을, 50일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결국 구약에서 약속하신 오순절의 최고의 열매가 되셔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순절은 이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기다리셨던 날입니다.

곧 오순절은 성령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간들의 기다림이 만나는 날인 것입니다.

제가 요즘도 성경을 보면 가장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후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아기 예수는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대신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입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셨어야만 하는가…?’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예언적 사건이었습니다. 앞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가장 비참한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는…

그것이 말씀드린 30년 전쟁이요. 요즘은 우크라이나 전쟁이지 않을까요?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할까요? 머리로는 압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의 의미를 모릅니다. 기다림의 비밀을….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아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일곱 가지 이름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 이름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오순절의 기다림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들과 함께 당신의 나라를 펼쳐 가십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래전 성령을 받을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 오순절을 제정하셨습니다. 수백년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기다림의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얼마전 ‘아는 형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귀한 것을 배웠습니다. 배구 선수 김연경 선수가 나왔습니다. 국제 무대에서도 활약한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키가 192cm인데 실은 중학교 때까지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수비 역할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키가 많이 커서 후에는 공격수로 전환되었는데, 실은 공격수들이 수비까지 겸비한 선수는 많지 않아서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선수가 될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편 씨름 장사 이만기 선수에 대해서도 언급도 했는데 이만기 장사도 처음에는 몸이 크지 않아서 기술로 씨름을 하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커지면서 기술에다가 힘이 더해져서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곱 이름을 아는 것은 기술 습득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에 기다림 가운데 성령의 축복을 받을 때 놀라운 천하 장사들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가 되는 천하장사들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천하장사들과 운동선수와 큰 차잇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기술에 더해 체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체격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연료를 필요로 하십니다. 기다림이 사라질 때 성령의 파워도 사라집니다. 성령의 파워가 사라질 때 예수 이름은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이름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늘 기다려야 하는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를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일들은 실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연료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인이라서 순수히 오순절을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상생활에서 원치 않은 기다려야 할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이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사소한 일들은 매우 귀중합니다. 오순절을 기다리는 마음을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무릎 꿇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만기 씨름 장사 이야기를 하니 얼마전 읽은 김윤나 씨의 글 ‘씨름의 방식, 왈츠의 방식’이 떠오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을 보면 ‘씨름’이 떠오른다. 씨름에서 두 사람은 동지가 아니라 적이다. 서로의 힘과 기술을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반면 왈츠는 다르다. 왈츠는 동행이다. 버티지 않고 함께 간다. 파트너가 앞으로 몇 걸음 나오면 상대방은 그만큼 물러서서 균형을 맞춘다.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보조를 맞추고. 한 명이 화려한 동작을 구사할 때 나머지 한 명은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해 나간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왈츠를 가르쳐 주십니다.

음악에 7음계가 있지 않습니까? 도레미파솔라시. 예수님의 이름도 7가지 음계와 같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함께 왈츠를 만들어 가십시다. 주님의 7가지 이름을 묵상하며 매일 오순절을 기다리십시다.

매년 50일을 기다림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루함을 넘어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견디지 않을 때 우리는 이웃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기다리는 자들은 그 누구와도 왈츠의 파트너가 됩니다.

실은 우리가 기다림의 힘든 시간을 가질 때 이미 주님은 우리와 함께 월츠의 파트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스도의 일곱 이름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온 세계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성복 교수님의 ‘오늘 아침 새소리’라는 시입니다.

“병이란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으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오순절은 그리워하는 자들의 축제입니다. 이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일곱 가지 이름을 아시는 교우 여러분 오순절의 축제에 참여하십시다. 비록 늦게 온 오순절이라도….

일곱 가지 이름을 가지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06 “다윗과 아기 예수” 시편 22:1-31 (12/18/2022) webmaster 2022.12.19
305 “시인의 기다림” 시편 42:1-5 (11/27/2022) webmaster 2022.11.28
304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시편 50:1-15, 23 (11/20/2022) webmaster 2022.11.21
303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19(11/06/2022) webmaster 2022.11.07
302 “21세기의 종교개혁” 시편 137:1-9 (10/30/2022) webmaster 2022.10.31
301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 시편 110:1-7 (10/23/2022) webmaster 2022.10.24
300 “약속, 고난, 승리” 시편 34:1-22 (10/09/2022) webmaster 2022.10.12
299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고린도후서 8:1-15 (10/02/2022) webmaster 2022.10.05
298 “종의 형체를 가지사…” 빌립보서 2: 6-11 (09/18/2022) webmaster 2022.09.19
297 “아침의 기도” 시편 8:1-12 (09/11/2022) webmaster 2022.09.12
< Prev ... 1 3 4 5 6 7 8 9 10 11 12 38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