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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게 하소서” 시편 90:10-17 (07/21/2024)

오늘은 사자성어로 시작합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사자성어입니다. 哺는 먹을 포인데,  반포(反哺) 곧 반대로 먹을 것을 주는 효행을 뜻합니다. 곧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을 것을 주는 효행을 표현한 것입니다. 실은 ‘부모에게 먹이를 주는 까마귀의 효행’을 뜻하며, 중국 진나라의 이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진나라에서 학식이 깊고 덕망이 높기로 유명했던 이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진나라의 무제가 아들의 선생으로 이밀을 임명하려하자 이를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가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살 때 어머니도 돌아가시어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 할머니가 96세가 되시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봉양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다 늙은 어미에게 먹여 은혜를 갚듯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게 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상록기도회 헌신예배를 맞이하여 반포지효 사자성어로 시작하니 어르신들을 잘 공경하자는 의미로 받으실 줄 압니다. 맞습니다. 한편 어르신들에게도 귀한 도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모세의 시입니다. 시편에 기록된 모세의 유일한 시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중에 가장 오래된 시로 간주됩니다. 약 기원전 1200년경에 지어졌습니다.

먼저 모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120세에 소천하셨습니다. 분명 80세에서 120세 사이에 이 시를 썼을 줄 압니다. 적당히 젊은 나이인 80세에 썼다고 생각하겠습니다. 80세가 된 시인의 시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80세의 시인이 쓴 시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신선한 느낌? 아니면, 죄송합니다, 라떼의 느낌?

‘라떼’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설명해 드리면, 나이드신 분들이 젊은이들에게 ‘나 때는’ ‘나 때는’하기에 비꼬는 말로 커피점에서 파는 ‘라떼’로 표현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라떼의 느낌이 드는 시라면 오늘까지 많은 분들에게 회자하는 시가 되지 않았겠지요. 그러면 기대를 가지고 이 시를 열어 보겠습니다.

 

오늘의 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수 있다고 봅니다. 11절까지가 전반부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한마디로, 이 시 전반부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인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인생의 특징을 또 이처럼 노래합니다.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

일견해 읽으면 분명 모세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합니다. 7, 80년이 수고와 슬픔뿐이었는데 이마저 금방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묵상하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이제 7학년에 되었으니 이 시를 저 나름대로 해석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7학년이 되기 전에도 모세의 이 표현은 늘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 7학년이 되지 않아도 이 표현에 공감할까요?

저 나름대로 낸 결론은 우리는 매일 좋은 일을 바라며 하루 하루 1년 1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좋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일이 안 생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일은 안 생기는 대신 하루가 멀다하게 우리가 원하지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기억에는 우리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을 모세는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고 바랬던 일은 거의 안 생기고 세월이 흘렀으니 세월은 날아간 느낌이 아닐까요?

 

그런데 모세가 이와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려고 이 시를 지었을까요? 11절,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여기에 이 시의 반전이 있습니다. 허무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의 해결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비법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고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아야만 순식간에 지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여기서 모세가 오고가는 세대에 최고의 지도자가 될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 알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생의 모습을 알고 이를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애굽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도 늘 원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짐승과 뱀과 전갈을 만나면서 양떼를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은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늙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 중 하나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드는 자신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진노의 그림자를 느끼는 자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줄 압니다.

하나는 요즘 성형수술이 발달되었는데 돈으로 젊은 외모를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니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순식간에 늙는 우리의 삶을 깨닫고 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곧 나이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돈으로 해결하려는 분, 또 하나는 기도로 해결하려는 분….

그런데 기도 제목은 구체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한편 이 기도를 얼마나 간절히 하냐 하면, 13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주전 12세기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젊음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때 간절히 기도해야 젊음이라는 우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런데 도리어 이때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됩니다. 나이듦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나이듦이 진노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돈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나이듦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기도합니다. 지혜로운 마음으로 나이듦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이 때 나이듦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멋진 길을 선택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독일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입니다. 헤세는 ‘늙음은 젊음만큼 인생의 한 가지 좋은 숙제’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단어는 ‘좋은’입니다. 늙음을 ‘좋은 숙제’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시 ‘늙어가기’ 마지막 연입니다.

 

“그럼에도 난 계속 힘껏 싸우겠다.

세상과 맞서겠다.

영웅이 되어 승리하지 못한다면

투사로서 쓰러지겠다.”

 

그는 끝까지 멋지게 늙는 투사로서 삶을 마치겠다는 것입니다. 실은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투사로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쓰러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지혜로운 마음을 소유한 멋진 투사들은 노후를 어떻게 살까요? 14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루 하루를 최고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수고와 슬픔뿐으로 기억에 남을지라도 오늘 하루를 최고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이 더 눈에 띄입니다.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괴롭고 화를 당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매번 늙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음이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루 하루 늙는 것 안에 귀한 샘물이 흐르도록 해 달라고….

 

Marc Agronin이라는 어르신들을 많이 치료한 정신과 의사가 흥미로운 책을 지었습니다. 제목은 ‘The End of Old Age.’ (노년기의 종말) 그는 서론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Old is the Problem and Aging is the Solution.’ (늙었다는 것은 문제다. 한편 잘 늙음이 해답이다.) 그래서 그는 서론 전 서두를 다음의 단어로 마칩니다. ‘Creative aging’ (창조적으로 나이들기.)

그 책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늙음이라는 환경은 어쩔 수 없는데, 이 환경 가운데 최고의 꽃을 피우자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든 사람이 언젠가 윤경문 목사님이 설교 시 소개해드린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Henry Matisse)입니다. 그는 몸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자 평소의 화법을 포기하고 종이 오리기를 통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늙지 않았더라면 그런 화법이 생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티스는 늙었음의 문제를 잘 늙음에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6절,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모세는 당대뿐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 창조적 늙음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마땅히 창조적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을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하루 하루 창조적으로 늙어감은 후손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기에 모세는 고백합니다. 17절,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비록 티끌에서 와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티끌로 돌아가야 하지만 티끌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후손들을 위해서, 아니 후손의 후손의 후손의 계속되는 후손들을 위해서….

 

그런데 모세가 대대 후손을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1절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모세는 자기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끝없이 위로 올라가는 조상들의 거처는 하나님이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잠시 지나가는 티끌로 살고 있지만 그의 역사관은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민족의 역사 중에 현재라는 티끌과 같은 시간을 자기가 책임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록 작은 시간이지만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는 영원을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을 Creative aging을 하자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Creative aging을 하시는 분들은 모세의 고백에 동참합니다.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역사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80살 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문제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두번째로는 오늘의 시 덕분이라고 봅니다. 이 시를 고백하면서 온갖 수고와 슬픔을 뜷고 자기가 한 일을 견고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바로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상록기도회분들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어르신들로 인해 인류는 희망이 있습니다. 졸업식 때마다 연사들은 젊은이들에게 그대들의 어깨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맞습니다. 젊은이들의 어깨에 인류의 미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편으로는 어르신들의 등에 인류의 미래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일선 목사님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습니다.

‘등에는 십자가 입에는 노래.’

등은 기도의 등인 것입니다. 곧 젊은이들의 어깨와 어르신들의 등에 인류의 미래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까마귀들의 어르신 공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다음의 이야기가 까마귀들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미국 워싱턴대 John Marzluff교수팀은 까마귀들에게 나쁜 기억이 생기도록 하고 그 기억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실험했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못생긴 난폭한 남자 가면을 쓰고 새들을 붙잡아서 붙잡힌 새들에게 기분 나쁜 경험이 생기도록 했습니다. 나쁜 경험을 한 까마귀들은 그 가면을 쓴 사람이 나타나면 피해 도망갔는데, 가면을 거꾸로 써도 즉시 알아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8년 전 그 가면을 쓴 사람으로부터 나쁜 일을 당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까마귀들까지 모두 그를 기억하고 공격하거나 피했다는 겁니다. 새들에게 한 번 찍히면 끝나는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억력이고 학습능력입니다. 마치 인간 사회에서 조상들로부터 후손들에게 지식이 전수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워싱턴대 실험을 정리하면, 까마귀들은 기억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을 뿐 아니라, 정보를 확산시킬 수 있는 소통능력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후손들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왜 까마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부모 세대가 늘 부모 공경을 하니 부모의 경험을 그대로 전수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후손들도 당연히 부모 공경 곧 자기들을 공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까마귀들이 이런데 우리는 더 좋은 것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좋은 길은 Creative aging입니다.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은 우리 자손들에게 이어집니다. 그러니 티끌과 같은 어렵고 힘든 환경일지라도 최고의 삶을 사십시다. 이를 위해 모세의 기도에 동참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매일 기도드리십시다.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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