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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I)” 전도서 12:1-8 (08/25/2024)

약 한달전 상록기도회 헌신예배 설교시 ‘creative aging’(창조적으로 나이들기)에 대해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우님은 그동안 graceful aging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어도 creative aging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다고 하시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셨습니다. 한편 creative aging을 언급한 책의 저자는 말미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칩니다.

 

저자는 정신과의사인데 할아버지도 의사이셨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할아버지는 쇠약해지셨고 병상에 누어 계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손자 의사에게 한 가지 선물을 사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한 후 손자인 저자는 옛날 의사들이 사용하던 가죽 진료 가방을 사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물론 가죽가방을 선물로 주시고는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로 그의 책 ‘The End of Old Age’를 마칩니다. 왜 저자는 이 이야기로 creative aging을 설파하고 있는 그 책을 마무리 짓고 있을까요? 할아버지로 부터 받은 보이는 선물의 소중함을 강조하려고…? 이에 대해서 잠시 후 다시 나누겠습니다. 아니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풀어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구약 지혜서중에 하나인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전도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당분간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전도서 전체를 다룰수는 없고 전도서의 여러 특징들을 고려할 때 몇 번 쯤 말씀드려야 할지 아직 정리가 안 되서 당분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주일에 김성천 목사님이 구약을 안 읽었어도 읽은척 할수 있는 팊을 주셨습니다. 구약을 크게 셋으로 구분할수가 있는데, 율예지, 곧 율법서, 예언서, 지혜서. 당연히 전도서는 지혜서가 되겠습니다. 지혜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 다섯 권으로 통상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저는 오늘은 12장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전도서 강해를 하려면 1장 말씀부터 나누는 것이 맞는데 마지막 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첫 설교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긴데…, 한 마디로 헷갈리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1장부터 계속 헷갈리고 또 헷갈리다가 12장에 도달하느니 일단 12장을 통해서 전도서에 대한 감을 잡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덜 헷갈릴 것 같애서 마지막 장을 첫 강해 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헷갈리는 책이냐 하면, 제가 전도서를 정하고는 갖고 있는 주석책을 찾아 보았더니 놀랍게도 세권씩이나 있었습니다. 대개 두 권 정도 갖고 있고 간혹 세권 주석책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요한복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긴 세권의 주석책을 거의다 읽다시피 했습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줄이 다 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권의 주석책을 거의 다 읽어도 남은 것은 헷갈림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너무 헷갈리니까 읽고 또 읽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두 권 더 읽었으면 좀 나았을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전도서를 공부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전도서를 공부하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많은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실은 오늘의 구약이 편성되기까지 중요한 회의가 1세기 Jamnia에서 열렸는데 이 때 두 학파가 전도서로 인해 충돌합니다.

보수적인 Shammai학파는 안 받아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반면 진보적인 Hillel 학파는 받아드리고자 했습니다. 끝내 성령 하나님께서는 힐렐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의 정경으로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저는 전도서 강해의 대모험을 시작합니다. 이유는 전도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여러분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제 설교도 많이 헷갈릴 것입니다. 아마 제일 좋은 전도서 설교는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헷갈리는 설교가 아닐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유는 전도서를 읽어보면 언제나 은혜를 받습니다. 한편 언제나 헷갈립니다.

 

오늘 전도서 12장부터 시작하는데, 아마도 오늘 12장 말씀 때문에 헷갈리는 내용이 많을지라도 정경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나중에 하늘 나라 가서 하나님께 여쭤봐야 하겠지만….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12장이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그중 오늘의 제목인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말씀이 눈에 띄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전도서 전체 본론의 마지막입니다. 9절부터는 소위 말하는 epilogue입니다.

한편 전도서의 본론의 시작은 1:2절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라.” 그리고 전도서 본론의 마지막은 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곧 헛되다는 것으로 시작해서 헛되다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전도서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오늘 12장부터 시작하는데 실은 1장부터 읽고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헷갈리면서 은혜를 받다가 이제 12장 본론의 마지막에 왔습니다.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 상반절,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실은 전도서에는 ‘헛되다’라는 단어가 37번 나옵니다. 계속 헛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이에 몸을 가다듬고 계속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 내려 갑니다. 1절 하반절과 2절,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여기서 청년의 때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나이로 구분하는 것 보다는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곧 곤고한 날은 더 이상 기력이 없어 활동할수 없는 때를 말하는데, 이 전에 계신 분들은 모두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어느 분에게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0세 되신 분이 콤퓨터를 배우러 오셨다고 합니다. 왜 이 나이에 배우러 오셨냐고 하니, 젊었을 때 언제 은퇴하면 좋냐고 누구에게 물었더니 60세에 은퇴하고 10년 재미있게 살다가 70세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삶의 수순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60세에 은퇴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70이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지 않았고 10년후면 떠나겠지 생각했는데 어느새 80이 되었고 어느새 90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들은게 후회된다고 하면서 이제라도 배우겠노라고 해서 콤퓨터 학원에 등록하셨다는 것입니다.

90이 되었지만 아직 곤고한 날이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곤고한 날이 이르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저자는 본론 마지막에 와서 놀라운 멧세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아마도 Hillel학파는 이 말씀에 꽂혔고 Shammai학파는 헛됨의 홍수에서 끝까지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동양화를 볼 때 늘 관심을 두는 것이 있습니다. 동양화는 대개 풍경화가 많은데, 그림에 문외한이니 그림 앞에서 남들처럼 감격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꼭 하는 것은 동양화 앞에서는 사람을 찾아 보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눈에 띄면 천천히 감동이 찾아 옵니다.

저는 전도서를 하나의 동양화로 생각한다면 헛됨이라는 검은 붓으로 그린 그림 안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고 상상해 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창조주를 기억하는 작은 존재가 아닐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자는 마지막 동양화의 배경을 그리고 있다고 봅니다. 3-7절 말씀을 통해…. 나이들어 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7절만 봉독해 드립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헛됨이라는 주제의 동양화 작품의 마지막 마침은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헛됨의 대명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는데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은 다음주부터 계속 살펴 보겠지만 전도서에도 은혜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될수 밖에 없다는…, 이유는 그동안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다시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헛되니….’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처음 소개해드린 정신과 의사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제가 당신의 책 마지막에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가죽 가방이야기로 훌륭한 책을 마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에 가죽가방 이야기로 마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솔직히 가죽가방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죽가방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들, 곧 할아버지의 멋진 삶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손자가 받은 선물은 할아버지의 삶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도리어 할아버지의 삶의 가치를 드높이는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전도서를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헛됨의 홍수 가운데서 창조주를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살았던 전도자의 모습을 보게 하는 책이 아닐까요? 모든 것이 헛됨으로 가득차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양화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작품을 180도 바꾸어 놓듯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작은 순간 순간들로 인해 헛됨의 세계는 어느덧 180도 뒤바꿔지는 위대한 역사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멋진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헷갈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문학작품은 창조주 하나님만 알고 계신 이야기를 모방한 문학작품이 아닐까요? 헛됨으로 가득차 있지만 어느덧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피게 하신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런 작품이 진정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민족의 가슴에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님만 알고 계실 것만 같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요즘 한류가 전세계를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실줄 압니다. 얼마나 한류의 태풍이 전세계를 뒤집어 놓고 있느냐 하면 얼마전까지 보스톤 미술관 (Museum of Fine Art)에서 한류 전시회까지 열었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추천을 해서 가 보았습니다. 마음이 뿌듯한 느낌이 드는 좋은 전시회였습니다. 전시회 마지막 방은 souvenir를 파는 상점이었습니다. 한바퀴 삥 도니 한국책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된 한국과 관련된 책입니다. 특별히 한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Tales of a Korean Grandmother’. (한국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한국문학의 시작은 아마도 할머니들의 입에서 들려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비롯해서 많은 옛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한 가지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A Story for Sale.’(‘팔려고 만든 이야기’ 라고 할까요.)

저는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자집 내외가 있었는데 너무 심심해서 하인에게 이야기를 하나 사오라고 하면서 큰 돈을 줍니다. 하인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에게 주인 어른이 이야기를 사오라고 했다면서 큰 돈을 보여 줍니다. 농부는 돈이 많이 필요했던 참입니다. 자기가 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리속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습니다.

마침 학이 논에서 걸어 오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말합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닥아 옵니다.” 이에 하인은 외우기 위해서 그대로 큰 소리로 따라 합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닥아 옵니다.” 이 때 학이 멈추고 무엇인가 찾기 시작합니다. 농부는 말합니다.

“그는 서서 무엇인가 듣고 있습니다.” 하인도 따라 합니다.

“그는 서서 무엇인가 듣고 있습니다.” 농부가 학의 모습을 보고 또 말합니다.

“고개를 숙여 살살 움직입니다.” 하인도 따라 합니다. 순간 학이 날라갔습니다.

“그는 떠났습니다. 도망갑니다. 곧 안전해 질겁니다.”

 

이것이 끝이라고 하니 하인은 무슨 깊은 내용의 이야기로 알고 큰 돈을 줍니다. 하인은 계속 농부에게 들은 이야기를 외우면서 집으로 옵니다. 도착한 후 농부에게 들은 그대로 주인 어르신께 들려 줍니다. 어르신은 무슨 깊은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밤에 계속 외웁니다.

마침 부잣집이라 도둑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닥아 옵니다.”

도둑은 깜짝 놀라 멈춥니다.

“그는 서서 무엇인가 듣고 있습니다.”

겁이 난 도둑은 수구리고 기어갑니다.

“고개를 숙여 살살 움직입니다.” 도둑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움직임을 알지? 이 집은 신비스러운 영이 돌보는 집이네. 빨리 달아나야겠어.” 주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영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는 떠났습니다. 곧 안전해 질겁니다.”

도둑은 친구 도둑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더 이상 그 집에는 도둑이 들지 않았습니다.

 

한류의 시작은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요? 헛됨으로 가득찬 세상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히 추측도 할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도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러한 이야기로 온 세상은 가득차 있다고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하물며 이런 세상에서 창조자를 기억한다면 더욱더 놀라운 세상을 체험할 것임을….

 

율예지, 곧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전도서 저자는 이 지혜서를 통해서 이미 십자가를 바라 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를 이기신 주님을 만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헛된 세상에서 멋지게 사십시다. 우리의 헛수고를 그냥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헛 살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귀한 소재가 되었음을….

헛수고로 가득차 보이는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사십시다.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세상만사가 진행되지 않더라도, 아니 거꾸러 갈지라도…. 그 가운데 창조주를 기억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당했던 일화 중 하나입니다. 교수대에 처형된 동료 유대인들을 유대인들이 안타깝게 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교수대에 달린 동료 유대인들을 보면서 삶의 헛됨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원망어린 불평을 한 것입니다. 이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교수대에 함께….”

 

그 교수대에 달리신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헛되고 헛된 세상의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곳에 오르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의 헛됨은 끝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헛됨을 노래하는 전도자는 또한 말씀합니다.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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