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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1-7 (05/03/2020)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 예술가들이 젊은 예술가에게 주는 조언을 묶어서 내 놓은 책 ‘젊은 예술가에게’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중 오노 요코라는 예술가가 다음과 같이 젊은 예술가에게 조언을 합니다.

 

“당신의 작업으로 소통할 사람이

딱 두 명뿐일수도 있습니다.

속상해 하지 마세요.

자기 작업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때 속상해 하세요.

당신의 작업은 존재할 것이고

계속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목을 받게 되든지 못 받게 되든지 간에

당신의 작업은 우리 세상을 계속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조언을 받은 젊은 예술가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남들이 알아주던 안 알아주던 더욱 용기를 얻어 열심히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자주 들으셨을줄 압니다. 삶은 예술이라고…. 그런 의미에선 우리 모두 예술가들입니다. 그러면 위에 조언을 들으시고 앞으로 더욱 멋진 삶을 사시게 될줄 압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실 오노 요코 예술가는 최소한 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조건으로 자기 작품으로 소통할 두 사람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작업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때 속상해 하세요’라는 표현에서 오노 요코는 최소한 자기 작품에는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오노 요코는 자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또 한 두 명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다.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오노 요코와는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주님도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주님이 참포도나무됨을 믿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만족치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사람이 두 사람씩이나 없어도 상관 없습니다. 주님이 참포도나무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이심을 믿는 자들은, 오노 요코의 말을 빌리면, 우리 세상을 계속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2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주님을 참포도나무로 여기고 주님께 붙어 있는 자들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는데,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이처럼 열매맺는 가지로 하여금 더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획기적인 표현을 하십니다. “내게 붙어 있어”. 4절 말씀을 보면,

당신은 참포도나무인데 당신에게 붙어 있는 것이 바로 당신 안에 거하는 것이고 당신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붙어 있으라’는 표현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붙어 있으라.”

 

저는 지난 25년간 본 교회 목회를 하였는데 한번도 이 표현을 쓸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골고다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과 하나 되고자 하는 자를 어떻게 하든 붙드십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뗄레야 뗄수 없게 붙드십니다. 아니 해부학적으로 기가 막히게 연결시켜서 당신과 하나로 만드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요즘 많이 어렵죠. 주님을 붙드세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꼭 붙드십니다. 우리들의 손의 힘이 약해져도 주님은 우리들의 손을 놓치 않으십니다. 아니 놓치 않을 정도가 아닙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은 그냥 우리를 붙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의 일부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본체이고 우리를 가지로 삼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의 놀라운 겸손이 빛이 납니다. 사실 열매는 어디에 맺히죠? 가지에 맺힙니다. 열심히 포도나무는 양분을 빨아 올립니다. 그런데 그 양분으로 열매를 맺히는 것은 가지입니다. 당신에게 붙어 있는 가지로 하여금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당신은 십자가를 지셨고 열매는 가지들이 맺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해질수는 없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교만하여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농부되시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제거해 버리십니다. 대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농부 하나님 아버지의 손재주가 기가 막힙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시는 놀라운 실력을 갖고 계십니다.

 

제가 어릴 때 대광학교 안 교장 사택에서 살았습니다. 앞 마당에 포도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었습니다. 학교 원예부에서 심어 놓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 기억에는 한 번도 열매를 맺혔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물론 두 가지 이유가 있겠죠. 한국에서 포도나무는 그냥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듭니다. 토양이나 날씨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수 있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종종 원예부에서 일꾼들이 들러서 포도나무를 보고 간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일꾼들이 포도나무를 손질한다면 본체를 할리가 없습니다. 가지를 손 봅니다.

여기에 가지의 특권이 있습니다. 농부는 나무 본체를 만지지 않습니다. 가지를 만집니다. 농부의 손이 닿는 곳은 가지입니다.

 

이기주 작가의 새로 나온 책 ‘말의 품격’에서 그는 서문을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몇 해 전 할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할아버지가 눈을 감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며칠째 할아버지의 의식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째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 “손…”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훗날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환자가 숨을 거들 때 “손”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입을 벌릴 기력조차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가족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손 좀 잡아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저는 손의 신비를 새롭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서 악수를 한적이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씬디 목사님이 오셨는데 팔꿈치로 악수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이 감사한 것은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지라도 우리는 매일 농부되신 하나님의 손길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특권입니다. 아마 천사도 부러워하는 것일줄 압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도 부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로 하여금 농부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농부가 되셔서 우리에게 매일 닥아 오십니다. 그리고 농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럴수 밖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들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도요…?”

그렇습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교회사 학자들이 기독교의 부흥에 전염병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년마다 이런 큰 전염병이 세상을 뒤엎는 것 같은데 초대교회 때도 매한 가지였다고 합니다.

주후 16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천연두라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약 15년간 지속되었는데 제국의 4분의 1내지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합니다. 이 때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0.08%정도에 불과했지만 전염병 확산에 대한 교회의 대처는 세상의 칭송과 커다란 호응을 얻어냈다고 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형제 중 대부분은 끝없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이들만 생각했다. 많은 형제가 그처럼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료하다 환자들을 따라 죽거나 그들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교도의 모습은 완전 달랐다. 그들은 누군가 병들어 아프기 시작하면 멀리 떠났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도 도망쳤다. 죽음을 맞이할지 몰라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거나 누구와도 사귀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의를 기울였으나, 그들이 죽음을 피해 달아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후 약 백년 후 키프리안이 카르타고 주교로 있을 때 이 때는 아마 홍역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휩쓸게 됩니다. 키프리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무섭고 치명적인 유행성 역병이 우리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을 찾아내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니 이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든 동족간에 마땅히 그래야 하듯 서로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일이든 의사가 환자를 버리지 않고 돌보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

한편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크리스천의 치사율은 일반인 보다 훨씬 낮았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을 죽음에 노출시킴으로써 더 풍성한 생명을 누렸고 그들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회복력도 더 강했는데 다름 아닌 죽음 앞에서도 확고한 소망를 지녔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공동체로서도 더 강해져서 각자가 직면한 고통을 통해 서로에 대한 결속이 더욱 끈끈해졌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주후 300년경에는 기독교가 6백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3년만에 콘스탄틴 대제를 통해서 로마 국교가 된 것입니다. 그냥 로마 국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 더욱 십자가의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아울러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을 늘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코로나가 창궐한 오늘도 일어날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 안에 내 스스로 만족할만한 것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인정해 주는 한 두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이고 우리의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일상의 회복을 위해 기도드리고 계신줄 압니다. 저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딱 한 가지 일상 빼고….

요즘 보스톤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습니다. 전에 한 시간 다니던 길을 요즘 30분이면 충분히 다닙니다. 그러나 저는 일상으로 회복해 다시 한 시간이 걸리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빼 놓고….

주일날 traffic이 꽉차는 보스톤이 될 것을 기도드립니다. 주일날 교회로 가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희 보스톤이 코로나의 hotspot입니다. 뉴욕주와 뉴저지 뒤를 이어서 세번째 입니다. 어서 속히 보스톤이 복음의 hotspot이 될 것을 기도드립니다.

 

이것이 가능합니다. 전염병이 창궐할지라도 주님께 붙어 있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자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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