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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옳으니라.” 에베소서 6:1-4 (05/10/2020)

 

얼마전 미주 크리스챤 신문에 게재된 어느 목사님의 글입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 고3 수험생을 둔 권사님이 있었다. 아이가 고3이 되던 해에 교역자를 찾아가서 상담 후 간략하게 단언을 했다고 한다. 아들을 고3 1년 동안은 교회에 보내지 않을 것이며 아이에게는 미래를 위해 고3 한 해 동안만 교회에 빠지고 공부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 그 어머니 권사님은 이제 아들에게 다시 교회에 나가도록 권했는데 돌아온 아들의 답이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저도 알만큼 다 알아요’

뭘 안다는 말인가? 어머니에게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보다 세상의 일에 성공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성공 앞에서라면 언제라도 내팽개칠수 있는 그런 신이기에, 그런 수준의 하나님을 구태여 자신이 믿고 따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 새삼스럽게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자녀는 바로 부모님들의 모습을 닮아 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어머니 주일로 지키는데 자녀를 잘 키운 어머니들은 더 많은 감사를 받아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를 잘 못 키운 어머니들에게는 어머니 날이 고통의 날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궂이 어머니 날을 지킬 이유가 있을까요?

 

사도바울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래도 어머니 날을 지키라고 했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사도바울은 부모 순종에 대해서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있습니다.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의 자녀 교육이 어떠했던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

조금 전에 소개한 그 학생과 같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부모에게 순종하라. 너희 부모가 고3때 교회 안 가도 된다고 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는 다시 교회를 가라고 한다면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머니 날을 지킬 것을 주장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하겠죠. 이에 대해 바울은 당연히 다음과 같이 설명했을 것입니다. 2, 3절 말씀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사실 이것은 바로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입니다. 십계명 중에 4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5계명부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계명인데 그 전 4계명까지는 약속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려 주셨는데 특히 5계명에는 약속까지 붙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세상을 통해서 당신의 무궁무진한 축복의 세계를 나타나기 위하심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의 세계를 마음껏 나타내 보이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를 보고 감격할 어떤 인격체가 필요하셨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려 놓고는 늘 자기 혼자서만 보면서 즐길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는 자기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매한 가지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만드신 위대한 세계를 감상도 하고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곧 인간을 통해서 당신의 축복의 세계를 더 놀랍게 승화시키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은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인간들로 하여금 가장 쉽게 놀라운 당신의 축복의 세계를 누리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부모 공경이었습니다. 부모 공경함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축복의 세계를 더욱 펼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사도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한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은 부모의 잘 잘못에 상관치 않으십니다. 어떤 부모이던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온 세상에 펼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히말라야의 노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노새

/박경리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

 

이 시를 접하고 나면 한 가지를 알수 있습니다. 박범신과 박경리 모두 부모공경의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분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은 새롭게 나려집니다.

 

그래도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녀 교육이 잘 되어야지 부모 공경도 잘 하지요?”

물론 그 면도 무시할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녀 교육이 부모 공경보다 더 앞서 가진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녀교육이 부모공경보다 더 중요하다면 사도바울은 먼저 자녀교육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 그 다음으로 언급했을 것입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에서 4절 말씀을 1절 말씀보다 앞세웠을 것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그리고는 부모들에게 자녀 교육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자녀 교육에 상관 없이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또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그것도 그냥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창의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자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모 공경을 기쁨으로 창의적으로 잘 해서 인류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저는 레오날도 다빈치를 꼽고 싶습니다. 현재 최고의 미술작품으로 하나 같이 레오날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많은 사람들이 꼽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모나리자의 신비스러운 미소는 레오날도 다빈치의 어머니의 미소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레오날도 다빈치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이상하죠. 사실 레오날도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납니다. 결혼하지 않은 관계에서 태어나서 생모에게서 다섯살까지 자라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모가 결혼을 하면서 생모를 떠나 아버지 품으로 돌아 갑니다. 다행히도 계모의 성격이 좋아서 원활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모나리자의 미소는 바로 생모의 미소였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면서 웃을까 울을까 안타까움과 함께 축복을 기원하는 신비스러운 미소였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사생아로 이 땅에 나오게 한 아들에 대한 미묘한 심정도 담겨져 있었지 않을까요?

 

다빈치가 자기를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았더라면 ‘모나리자’가 태어날수 있었을까요? 루우블 박물관에 가 보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모나리자 앞에는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얼굴은 사생아를 낳은 어머니의 모습인 것입니다.

죄성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한 어머니였지만 그러기에 더 신비한 미소를 온 세상에 남길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 죄인된 어머니를 공경했기에 그런 미소를 볼수 있었고 끝내 작품이 되어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각자의 죄성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부모에게는 신비한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부모 공경하는 자들은 그 신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도 복을 받고 부모도 복을 받고 이웃도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안에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창의적으로 어머니를 공경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얼마전 부모 공경을 창의적으로 했던 한 사람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노래자’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벼슬을 할수도 있었지만 부패한 정권에서 일하기보다 농사짓고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초나라 왕이 보석과 비단 등을 보내며 고위직을 제안했을 때도 거절합니다. 물론 아내의 공도 컸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노래자는 일흔 살이 되어서도 부모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까봐 늘 부모 앞에서 때때옷을 입어 어린이의 모습으로 장난감이나 새를 갖고 놀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합니다.

어린 재롱과 함께 노래자는 하루 세끼 부모의 식사 음식을 늘 손수 지어 드렸는데 항상 달콤하고 보송보송하여 잘 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정성을 다했고, 부모가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고 합니다. 노래자의 효심은 ‘이십사효’라는 중국의 유명한 스물 네 명의 효자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책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후에 조선시대 정조는 수원 화성행성에 ‘노래당’을 세우기까지 이릅니다. 지금도 수원 행성에 가면 볼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아마 노래자의 부모님들에게는 이런 효도가 제일 적합하기에 이런 효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면 그 당시로는 그가 보여줄수 있는 가장 창의적인 효도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창의적인 효도라고 하니 부담을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계시니 쉽게 말씀을 드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 보기에는 부모님들이 살아계실 때 하는 효도는 모두 창의적인 효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하게 드릴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효도에는 힘든 것이 꼭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희 장인 어른이 편찮으실 때 집사람을 1년에 두 번 한국에 가서 봉양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남들처럼 유럽 여행도 다닐수 있었지만 일체 휴가는 한국행으로만 잡았습니다. 물론 효도하기 위해…. 물론 저도 아버님을 뵈어야 하니…. 효도는 부모님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더 놀라운 축복이 따라 옵니다.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금주 설교준비를 마친 후 금요일 오전이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즘 저희 청년들이 어른 공경을 잘 하고 있는데, 꽃소리 hotline을 통해서 어려운 시기에 웃음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Joke 를 들으려고 눌렀더니 어느 청년이 joke대신에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노래자’와 같은 분이 바로 청년의 아버지였습니다.

어린이 날과 어버이날을 잘 지키고 계신데 어린이 날에는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식사를 사 주시고 어버이 날은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식사를 사드리신다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효도는 오늘도 저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 볼수 있음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코로나도 우리들의 창의적인 효도로 인해 내려오는 축복의 세계를 막지 못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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