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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1서 4:7-12 (07/05/20)

오늘은 7월5일입니다. 어제는 미국의 생일 July Fourth이었구요. 어제 미국의 생일을 축하하였는데, 오늘이 생일인 분들에게도 축하드립니다. 물론 7월 4일이 생일이신 분들도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축하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태어나지 않았지만 오늘을 생일처럼 여기시는 분들께 몇 배의 축하를 드립니다.

그게 무슨말이냐구요? 오늘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오늘을 생일로 여긴다구요…?

 

작고하신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님이 지은 ‘생일’이라는 영미시 산책집이 있습니다. 영문시들을 번역하고 시 한편 한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함께 담아 편집한 책입니다. 약 40개의 시가 담겨져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을 ‘생일’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마도 40개의 시 중에 ‘생일’이라는 시가 제일 마음에 들기에 그렇게 정한 것 같습니다. Christina Rossetti의 시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생일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를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My love has come to me.)

 

로제티는 자기의 삶이 시작된 날은 바로 사랑이 찾아 온 날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찾아 왔기에 사랑하기 시작하였고 사랑하기 시작했기에 삶이 시작된 날 곧 생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로제티는 자기의 생일에 관계없이 매일 매일을 생일로 즐기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축복을 누릴까요?

오래 전 이런 축복을 누렸고 또 누리도록 권고하신 분이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사도요한입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도 매일 매일 생일의 축복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매일 매일 폭죽을 터뜨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저자 사도요한은 당신의 믿음의 공동체 사람들에게 이 생일의 축복을 나누고 있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도요한이 당신의 믿음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다가 이처럼 사랑하자고 외치는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사랑하자고 외치는 배경은 바로 전 귀절들을 통해 쉽게 알수 있습니다. 4:1-6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사랑을 외치는 마음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어느 한글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 공동체에는 묘하게 두 문제의 공동체가 있었는데 한 그룹은 예수님의 인성은 인정하지만 신성은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인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제 3의 그룹도 있었을 것이구요.

늘 이 두 그룹은 다투며 서로를 비난하고 있었고 요한은 이들 가운데에서 참 복음을 가르치려고 고전분투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이 두 그룹 사이에서 요한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말로 가르치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이들이 참 복음의 축복을 누릴수 있는 길은 토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놀라운 지혜를 짜냅니다. 일석 이조의 효과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도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깨우치게 할수도 있으리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머리로 주님의 인성이 어떻고 신성이 어떻게 아무리 연구해 보았자 우리의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7절 하반절과 8절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제 이 말씀을 듣고 두 그룹에 속한 교우 모두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 그러면 당분간 토론은 그만하고 사랑해야 겠네. 그런데 사랑하면 결국은 우리가 믿는 것이 증명이 될거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

그러면서 서로 서로 사랑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토론을 중지하자고 하는 것이 사랑일까?”

 

이에 요한은 계속 써내려 갑니다. 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두 그룹 모두 공감합니다. 두 그룹 다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계속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비난의 씨앗은 남아 있습니다. 한 그룹은 이 독생자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또 한 그룹은 완전한 인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계속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에 두 그룹은 가슴이 찔끔합니다. 비난과 사랑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먼저 하는 것입니다. 늘 비난을 먼저 퍼붓곤 한 두 그룹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요한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먼저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얼마전 사랑은 먼저 하는 것임을 알고 실천하며 사는 한 젊은이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이 시끄러운데 버팔로에서도 인종 문제로 인한 protest가 있었습니다. 밤 늦게 프로테스트로 인해서 온 거리가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안토니오라는 흑인 학생이 듣고는 밤 2시경에 거리에 나가 보았습니다. 엉망이었습니다. 혼자서 거리를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0시간 가량….

그 다음 날 도시 청소부들이 왔을 때는 이미 깨끗해져 있었고 안토니오가 혼자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sns에 올렸고 곧 이어 지방 방송국에서 알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를 듣고 한 사람은 자기가 팔려고 내 놓은 차를 안토니오에게 주기로 합니다. 어느 보험회사에서는 1년간 무료로 차보험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돈을 모은 후 대학을 가기로 했었는데, Madaille College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도 받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인데 그저 자기 마을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청소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학생은 정말 마을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 많은 선물도 받았습니다. 생애 가장 큰 생일 선물 곧 사랑의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안토니오가 많은 사랑의 선물을 받았지만 자동차를 준 사람이나 보험회사나 대학교 총장이나 안토니오에게 뺏을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먼저 사랑한 사람입니다. 곧 안토니오는 진정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은 갚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이에 이 말씀을 듣는 요한 공동체 교우들은 하나님께는 갚을수는 없지만 그 사랑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더 이상 비난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려지니깐 놀라운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전에는 늘 들었었지만 지나쳤는데 이번엔 10절 하반절 말씀이 가슴에 깊게 와 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말씀에는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양과 소를 화목제물로 희생시켰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양과 소가 희생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죄송스럽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뻔뻔하지만 후자를 당연히 택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Lawlite's Blog | 프라도 미술관 그리고 <궁정의 시녀들>, 스페인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키스의 ‘시녀들’이라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가운데가 스페인 공주이고 주위에 공주를 섬기는 시녀들이 서 있습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그림 오른쪽에 검정색 옷을 입고 있는 시녀입니다. 모양이 좀 특이합니다. 난쟁이 시녀입니다.

이 난쟁이 시녀는 공주를 위해 코메디도 하면서 온갖 심부름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역할중 하나는 공주가 잘 못 했을 때 대신 매를 맞는 역할도 했습니다.

난쟁이 시녀에게 동정의 마음이 당연히 갑니다만,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공주의 입장입니다. 공주의 잘 못 한 것을 난쟁이 시녀가 맞는다는 것은 공주와 난쟁이 시녀는 동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쟁이 시녀가 매를 맞으면 공주가 맞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로 촛점을 바꾸면, 우리의 잘 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매를 맞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와 동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어쩔수 없이 소와 양으로 대신 매를 맞게 했습니다. 그러나 소와 양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대신한 것뿐입니다.

 

이제 사도요한의 이 멧세지를 바로 들은 사람들은 그 동안 어느 그룹에 속해 있었든지 몸이 얼어 붙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동격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몸이 얼어 붙어 있는데 요한은 계속 말씀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더 이상 비난도 사라지고 머리 속에 논리도 사라집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 이외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습니다. 계속 말씀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생일이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힛틀러 정권에 많은 고통을 받았던 유대인 음악가 Gunter Raphael이라는 작곡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유대인이지만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유는 바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하는 1700년대 사람인 반면 Gunter Raphael은 1900년대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200년 거리를 두고 음악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라파엘은 바하의 음악세계 안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하를 통해서 매일 매일 생일을 맞이 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바하를 통해서 라파엘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 이유는 바하의 희생적 삶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어느 음악 평론가에 의하면 바하는 모짜르트 보다 더 천재면 천재이지 부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하의 위대함은 자기의 천재성으로만 음악을 펼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끝없이 공부하는 이성적 음악가라고 합니다.

음악의 원리를 연구하고 거기에 당신의 천재성을 담은 놀라운 음악가라는 것입니다. 1008개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기의 천재성만으로도 충분히 음악인으로 영화를 누릴수 있었는데 온 인류를 위하여 끝없이 노력함으로 음악의 길잡이가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음악으로 만날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희생적으로…. 매일 매일이 생일을 맞이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온 세계에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는 바하처럼 대 음악가가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사랑할수 있지 않을까요? 안토니오처럼…. 우리들의 먼저 사랑한 자취는 이 땅에 남아서 100년 200년 후에도 열매를 맺게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동격이 되셔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는데 우리도 우리와 동격인 아니 주님과 동격인 이웃을 먼저 사랑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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