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인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라는 시를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많은 시인들이 가난하게 사는데 조병화 시인은 아내가 의사이어서 생활도 부요했다고 합니다.
곧 생활이 고되지 않아서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렸기에 도리어 누리고 있는 것과 헤어질 것을 아파하다가 이런 시를 짓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가난하던 부하던 삶을 다시 뒤돌아 보게 하는 시를 쓰신 것 같습니다.
텍사스 주의 어느 한 부자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유서에 쓰여진대로 하관식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가 소유한 아니 소유했던 금색 캐딜락 뒤에 그가 있는 관을 부착시켜 놓았습니다.
장례 디렉터의 싸인과 더불어 캐딜락이 천천히 파 놓은 무덤으로 굴러내려 갑니다. 캐딜락이 멈췄을 때 흙을 위에 덮기 시작합니다. 그는 끝까지 금색 캐딜락과 헤어지기 싫었던 것입니다. 아니 금색 캐딜락과 함께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것과 헤어지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금색 캐딜락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흔히 보이는 차를 타고 무덤까지 내려 갔다면 더 우수꽝스러운 일이 되었을줄 압니다.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는 둘 다 우스꽝스러웠겠지요.
그러면 금색 캐딜락을 구경조차 해 보지 못한 사도바울은 언젠가 세상과 헤어질 우리를 위해 어떤 충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까요? 1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종종 이런 말씀을 들으신줄 압니다.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지어진 집에서 산다.’
결국 좋은 말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말로 지어진 집에서 살고 나쁜 말을 많이 한 사람은 나쁜 말로 지어진 집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좋은 말을 많이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아주 색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비판은 우리를 이끄는 금색 캐딜락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비판하면 비판할수록 우리 앞에는 멋진 캐딜락이 번쩍 거립니다. 그리고 그 캐딜락이 가는데 따라서 우리는 뒤에서 이끌려 가는 것 같습니다. 금 캐딜락이 어디로 끌고 가는 것도 모른채….
한편 이 당시 자기의 캐딜락을 더 멋지게 금으로 도색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을 가지고 비판합니다. 먹는 것으로 비판할 땐 어떤 금색깔이 나올까요? 이뿐 아닙니다. 3절 말씀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어떤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먹는 사람을 비판함으로 금도색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금도색하는 또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우리는 모두 하인인데 왜 서로 비판하느냐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5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그런데 어조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꾸짖는 것보다는 서로 상관치 말라는 어조입니다. 다음 절로 가 볼까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은 지금 펀치 라인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비판의 눈에 걸려든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실은 하나님을 위한 숨은 행위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눈에 ‘왜 저 사람 저러나’ 하는 이면에는 그 사람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안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슬러 보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가 이웃을 비판할 때 십중 팔구는 그 사람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행위가 배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십중팔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열의 하나는 정말로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행위가 있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두 세명의 증인과 함께 권고해야 할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열이면 아홉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한 어떤 동기가 담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바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열에 한번 겨우 맞을까 말까하는 비판으로 금도색하지 말라고 권고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결국 우리는 비판의 생각이 들 때면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시려고 하나 보다.’
이런 생각에 젖으면 우리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처럼 보였지만 졸지에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웃을 그렇게 볼 때 우리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이웃의 삶을 아름답게 상상한다면 우리도 어느덧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도바울이 이 고백을 할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이 먼저 이웃에 대한 비판의 눈을 내려 놓고 존경의 눈으로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일줄 압니다. 그러니 온 이웃이 훌륭하게 보입니다. 이웃을 훌륭하게 볼수록 자신도 훌륭한 삶을 살아 가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잔치 음식상에는 항상 해골을 갖다 놓는다고 합니다. 이유가 있는데 인생은 짧으니 하루 하루를 보람되고 기쁘게 살자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함께 잔치를 나눌 때도 기쁜 마음으로 나누자는 것입니다.
해골을 옆에 두고 잔치를 하면서 이들은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어지는 연습을 바로 하는 삶이 아닐까요?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할까요? 그를 필요가 없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주님을 바라 볼 때만 가능해집니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에 주님께서 세상을 한번 뒤집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뒤집어 볼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이웃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이웃 안에 엄청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님의 것이 된 자들만이 세상을 거꾸러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데 가장 큰 방해꾼이 누구라구요?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형제를 비판하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는 삶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과 멋지게 헤어지는 연습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1, 12절 말씀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주님을 바라보며 형제 안에 있는 놀라운 것을 볼 때 우리는 심판대에서 상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형제 자매가 얼마나 귀합니까? 이들이 없이는 칭찬을 받을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의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사는 것이 참으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도 금 캐딜락이 아니라 주님께서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는 영광을 누리지 않을까요? 짧은 인생 가장 보람있게 사는 길은 십자가의 주님께 우리가 탄 차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헤어지는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최근 어느 영성가의 책을 읽었는데 그 영성가는 영성생활을 위해서 최근에는 Anton Bruckner의 교향곡을 자주 듣는다고 하십니다. 물론 저는 처음 듣는 작곡가이구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갑니다.
“왜 내가 이 분의 음악을 듣느냐구요? 음악적으로는 글쎄…. 사실 제 취향도 아닙니다. 아마 영적인 친족관계(kinship)이라고 할까요. 물론 최고의 음악으로 생각은 안 합니다. 훌륭한 음악일수는 있겠죠. 그런데 나에게 도전을 주고 인격적으로 무척 가까운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바하나 베토벤 보다도 더 영성가에게 위로와 축복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지내는 형제 자매도 어쩌면 Bruckner와 같은 분들이 아닐까요? 때로는 우리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이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무척 가까운 친족으로서 영적인 세계를 느끼게 하지 않을까요? 그 위대한 성인들 보다더 더 놀라운 세계를 누리게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이웃 안에서 어떤 성인보다도 더 소중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고백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는 언젠가 아름다운 삶을 이땅에 남겨 놓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