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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옳소이다마는…” 마가복음 7:24-30 (08/09/2020)

희망의 사제라고 알려진 차동엽 신부님이 명동성당 주임을 역임하신 신부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행색이 멀쩡한 여자분이 찾아와서는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저희가 이 동네에 새로 이사 왔는데, 한번 오셔서 미사 좀 드려주면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요. 날짜를 맞춰보시죠.”

그래서 사무장에게 시켜 방문일자를 정하고 약속된 날 미사 도구를 꾸려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습니다. 집안을 들어가 보니 전혀 신앙인 가정의 분위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집주인은 절차나 예법도 모르고 있었고,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지 이렇게 경위를 밝혔습니다.

“사실은요, 제가 좀 망설였죠. 이사를 와서 복을 빌고 싶은데, 무당을 불러 굿을 할까 하다가 요즘엔 서양식이 대세니 서양식 굿을 한번 바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신부님을 모신 거지요.”

“네-에! 그러면 신자가 아닌데 미사를 청했단 말입니까?”

“왜요? 안 되나요?”

 

그 다음 신부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그 신부님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떻게 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쉬운 귀절이지만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소재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일어나서 거기를 떠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를 떠나셨는지 살펴 봐야 합니다. 그 전 귀절들을 살피면 게네사렛 땅인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땅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땅 곧 두로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지형도 지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상황입니다. 바로 전 귀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와서 예수님이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님도 비난을 퍼 부셨습니다. 7: 20절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곧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반박하시고 그 곳을 떠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신 것입니다. 곧 지형도 지형이지만 그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벗어나기 위해 두로 지방으로 가셨고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숨으려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3년간 공생애 중에 단 한번 이방 땅으로 나가셨습니다. 바로 두로에 가셨습니다. 쉬러 가시기 위해서는 이방 땅이 더 좋았겠죠. 한편 소문은 벌써 나간 것 같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주님 발 아래에 엎드립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사실 처음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말다툼을 하시고는 속이 상하셔서 이방 땅 두로로 피신하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오셔서 잘 쉬시고 다시 모시고 갈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은 다 났고 이제 한 이방 여인이 주님 발 아래 엎드리며 딸을 위해 간구합니다. 제자들은 난감해졌습니다. 잘 못 모시고 온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주님께로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아니나 다를까 주님은 젊잖게 ‘No’하십니다. 제자들은 무릎을 치면서 ‘기가막힌 답변이시다’ 생각하며 혀를 찹니다. 당연히 주님은 이스라엘인들을 위해 오셨는데 왜 이방인에게 좋은 일을 해 줍니까? 잠시 쉬기 위해 이방땅에 피신 오신 것 뿐인데….

 

그런데 제자들이 기분 좋아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당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헬라인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많이 괴롭혔었습니다. 아니 로마인 보다 훨씬 잔인하게 통치를 했었습니다. 지금 로마가 다스리고 있는 것이 훨씬 고마울 때였습니다.

한 마디로 헬라인들은 할례를 못하게 하였고 할례를 하면 아기와 부모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제사를 지낼 때도 양과 소 대신에 율법에서 허락하지 않은 돼지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신성모독입니다. 그야 말로 원수 중에 원수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속으로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주님을 향해 속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더 망신을 당하기 전에 돌아가겠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인이 대답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순간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벙벙해집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반응을 곁눈으로 살펴 봅니다.

잠시 생각하신듯 입을 엽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로마인들보다 더 악한 헬라인 가족을 살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뭐가 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귀에 생생하게 들려 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 말’은 곧, “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말에 화가 나셨던 주님은 이 이방 여인의 말에 완전히 화가 녹아 내려진 것입니다.

 

사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혈루증 걸린 여인이 몰래 와서 주님의 옷깃을 만졌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한편 같은 현장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대신 이번에는 ‘이 말을 하였으니….’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택하신 민족인 곧 말씀을 이미 받은 이스라엘인들을 고쳐 주실 때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 말을 하였으니…,” 이 말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이 어떤 말이기에 그 여인의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일까요? 이것을 이방인들의 믿음으로 받아 주신 걸까요?

 

이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한 때 잘 나가는 여인이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다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이름난 의사에게도 찾아가 보고, 철학자에게도 찾아가 보고,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의 모습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helplessness.’ 생애 처음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데 그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이 들려 옵니다. 예수라는 용한 사람이 자기 동네에 오셨다는 것을…. 한편 망설여집니다. 자기네 민족이 괴롭혔던 민족인데…. 그래도 어떡합니까? helpless하니…. 모든 것을 다 내팽개치고 달려 갑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외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해도 상관 없습니다.

“Lord, I am helpless.”

 

처음 소개해 드린 신부님을 초대한 그 여인이 축복기도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하나의 사치로 신부님을 찾은 것인지 helpless해서 신부님을 찾았는지 큰 차이가 있을줄 압니다.

helpless해서 신부님을 찾아 왔다면 그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지 않았을까요? 말씀과 율법을 전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은 helpless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율법도 모르고 믿음이란게 뭔지 모르는 사람도….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helpless하셨던 분이십니다. 인간들의 죄를 바라 보면서,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helpless한 모습으로 달리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helpless하신 분으로 오신 것을 제일 먼저 증거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주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양은 helpless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양은 절대로 집을 나가면 혼자서 찾아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보다 더 한 것은 어린양은 한번 누우면 혼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누운 인간들처럼…. 이처럼 어린 양은 helpless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인간들의 죄 앞에서 helpless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어린 양이 되셔서 제물로 바칠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 helpless한 모습으로 나오는 자들을 주님은 그냥 돌려 보낼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아니 오늘도 helpless를 고백하며 당신을 찾아 오는 자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아울러 이들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아니 들어주실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사실 주님은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심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여인의 helplessness가 이방땅으로 복음 전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후에 주님의 제자들이 온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갈 때 그들은 바로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생각하면서 세상으로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두로로 향하셨던 발걸음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helpless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온 세계를 위해서 더욱 놀라운 일들을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보혈이 필요한 helpless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인하여 새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1995년 여름이었으니까, 꼭 25년 전 일이다. 시카고 위튼 칼리지에서 열린 KOSTA에 참석하여 예배와 여러 강의 가운데 큰 은혜를 받고 있었다. 그 때 강사 중의 한 분이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이셨다. 강의라기보다 간증에 가까웠는데 그는 S대를 졸업하고 그 당시 학력 좋은 젊은이들 누구나 그랬듯이 대기업에 취직해 소위 연봉 높은 “화이트칼라”가 되는 일을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생각도 못했던 근육무력증이라는 병명과 함께 8년간을 쓰러져 누워있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을 때엔 다른 친구들은 저 만치 앞서 나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회사라도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긴 힘들어 모(某) 여대 근처 외진자리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사를 발판으로 대기업의 사원이나 임원은 못되었지만 자신이 직접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생각했던 “대기업 사원”이 아니라 8년의 질병을 주었고, 꿈도 안 꾸었던 여성 옷 장사를 하게 하셨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이유가 있으신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 사장님은 helplessness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맛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하시는 축복의 도구가 되신 것입니다. 그는 사업에도 성공했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helpless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들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의 도구인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Helplessness가 인간사에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찍 깨달은 분이 잘 아시는 윤동주 시인입니다. Helpless한 아기의 모습을 생각하며 ‘애기의 새벽’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애기의 새벽

우리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Helpless한 아기가 울 때 새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침이 새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의 폭풍 가운데서 우리 모두 helpless한 느낌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때가 어쩌면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요? 새로운 인류 역사를 펼쳐 나갈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온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내 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있다면 helplessness. 여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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