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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52 (09/06/2020)

 

오늘은 재미있는 사진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의 엉덩이에 눈을 그려 놓았습니다. 눈을 뒷쪽에 그려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자주 소들이 사자들의 먹이가 되곤 합니다. 어떻게 소를 사자들에게서 보호하나 연구를 하고 있던 차에 사자들의 특성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자들은 자기의 먹이가 될 동물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면 금방 포기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의 엉덩이에 눈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먹이감의 눈을 보고는 소는 공격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틀켰다’ 생각되면 다른 먹이를 찾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자가 있습니다. C. S. Lewis가 지은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사자로 표현합니다.

“아슬란은 사자예요. 아주 대단한 사자.”

 

그러면 이 사자 예수님은 어떠했을까요? 사람들에게 들키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숨어 있길 원했을까요? 소를 잡으려는 사자처럼…. 37절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사람들 가운데 서서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을 보면 분명히 숨어 있길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에게 들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들키기를 원하셨을까요? 배경을 살펴 보면 더욱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배경은 본문 첫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때가 어떤 명절인지 먼저 살펴 봐야 할줄 압니다. 본문 전 말씀 요7:2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초막절은 3대 절기 중 하나인데 특히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며 지내는 절기입니다. 이 때는 1주일간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온 가족이 생활을 합니다. 광야 40년을 기억하면서…. 그런데 오늘의 장면은 마지막 날인 명절 끝날입니다. 이를 ‘큰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날 열리는 특별한 행사가 있습니다. the water-drawing festival인데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옵니다. 성전뜰에 있는 제단에 물을 붓습니다. 아울러 포도주도 함께 붓습니다. 물과 포도주가 제단을 넘쳐 흘러 내려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마지막 날의 축제는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 1년의 추수를 마치면서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데 새로 오는 1년 동안 물이 풍성해서 풍년이 오게 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예식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탈무드에는 물을 길러 오는 예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기쁨이 어떤지를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이 날 최고의 축제가 벌어지는 날입니다. 화려한 불 빛 밑에서 춤과 노래로 온간 흥분 가운데 휩싸입니다. 이날은 황홀경에 잠기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외롭게 외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주님은 당신에게 와서 생수의 강을 맛 보라고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서 길어 온 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를 꼬집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 어디에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12: 2, 3절 말씀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이는

길으리로다.”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초막절 끝날 물 길러 오는 예식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주님은 바로 당신이 그 우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당신이 이사야에서 말씀하시는 그 우물이며 메시야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축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시끄럽게 춤추고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는데 한 이상한 사람이 서서 큰 소리로 외치니 몇 명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의 소리의 위력이 있습니다.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워낙 큰 소리가 나면 듣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는데, 어느 날은 조용한 데담 마을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립니다. 어느 집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듣기 싫어도 어쩔수 없습니다. 들립니다. 소리는 듣기를 원하던 원치 않던 들려 오면 들어야 합니다. 부부 싸움도 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다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를 아셨던지 소리를 질러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쟁론이 일어납니다. 41절 이후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한편 오늘 본문 말씀 뒷부분을 보면 계속 주님에 대해서 쟁론이 계속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잡아 오라고 한 것입니다. 스스로 메시야로 주장했기에…. 이에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51절 말씀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는냐?”

니고데모는 듣기만 하지 말고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이라고 주장합니다.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생깁니다. 이에 잡길 원하는 자들은 답합니다. 7:52절 말씀입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모두 듣기는 들었습니다. 최소한 소문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듣는 것은 들려 오는대로 듣는 것이지만,  보는 것은 의지적 선택입니다.

 

반면 니고데모는 보는 자였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소문을 듣고 판단한 사람들이었고 니고데모는 소문을 들은 후 찾아 가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보는 자들은 무엇을 보게 될까요? 각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이들에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보는 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주님은 외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듣기만 하고 보기를 거절하고 있지 않을까요?

 

처음에 아프리카의 사자들은 보이길 꺼려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이는 순간 사자는 다른 먹이로 향합니다. 그러나 C. S.가 말하는 아슬란이라는 사자는 다릅니다. 이 사자는 보여지길 기다립니다.

보여진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자들을 성령으로 사로 잡으십니다. 그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십니다.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은 역사의 창조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 옵니다.  TV뿐 아니라 유튜브과 SNS를 통해서 본의 아니게 수많은 정보를 듣습니다.

반면 본다는 것은 우리가 에너지를 쏟으면서 볼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TV로 뉴우스를 보는 것 같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정보를 들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가장 중요한 보는 훈련을 놓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희 교회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로 인해서 요즘은 아주 쉽게 설교 말씀을 접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면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설교를 듣기만 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난다면 하나의 정보일 뿐입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볼수 있을까요? 니고데모가 주님을 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복음 3:2절 말씀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니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보기 위하여 밤 중에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모든 소문이 잠잠해진 한 밤 중에 주님을 찾아 가는 자들이 주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머니 주일이 되면 종종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훌륭한 어머니를 통해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 어거스틴이겠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어머니를 모셨던 무엇을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이라고 한 두번 들으셨을줄 압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입니다. 자신의 급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나라 이름을 지을 때 천천히’라는 의미의 ‘서(徐)’와 평평할 평(平)를 성과 이름에 넣었습니다. 천천히 평평하게 선교하겠다는 의지가 보여지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아버지가 호적에 없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납니다. 더구나 그녀가 3세일 때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 가버립니다. 9세에 할머니를 잃은 후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 찾아 미국으로 건너 갑니다. 다행히 가톨릭미션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뉴욕시립병원 실습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개종이라고 하지만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건너 온 셈입니다. 그녀는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는 한국 선교를 지망합니다. 그리고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를 통해 간호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습니다.

 

그녀는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사역합니다. 그야말로 일제강점기 초창기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는데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고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쉐핑이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시체를 해부해 연구 자료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 선교사님이 이런 훌륭한 삶을 사실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어도 주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많은 저주의 욕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녀는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성령의 강권하심에 붙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코로나가 창궐한 이 때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합니다. 요란한 소음 사이에 들려 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바라 보십시다. 보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 놀라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창조의 주인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처럼….

 

말씀을 거둡니다.

다시 사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아슬란은 사자예요. 아주 대단한 사자.”

“오오.”

수잔은 말합니다.

“나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안전한가요? 나는 사자와 만난다는게 불안하게 느껴져요.”

“안전? 누가 안전에 대해서 말했나요? 물론 그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합니다. 그가 그 왕이라고요. 내가 말했잖아요.”

C. S.Lewis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분명히 그도 시편 23편을 알고 있을텐데, 우리는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그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그는 언젠가 안전이 우상화 되어 있는 시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C. S. Lewis는 안전을 위해 주님을 바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을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안전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안전수칙을 잘 지키면서 밤 중에 선하신 주님을 뵙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선한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정말로 안전한 우리들의 피난처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로 인해 생수의 강이 온 세계에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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