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로나 백신으로 인해서 확진자 수가 많이 감소했음을 잘 아실줄 압니다. 그 통계를 볼 때마다 저는 백신 개발을 위해서 헌신한 분들 특별히 항거리에서 온 카리코 박사가 생각이 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고 다른 많은 분들의 수고가 합력해서 이뤄낸 성과인줄 압니다. 그리고 그 분을 생각하면 이민자가 얼마나 귀한 일을 해 낼수 있는지 고무적인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한편 오늘은 다른 백신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한국인들이 간 질환이 많은데 특히 음식을 같이 나눠 먹곤해서 B형 간염환자가 많습니다. 물론 요즘은 많이 줄었을줄 압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 간 연구로 가장 이름을 날렸던 김정룡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이 간정룡 박사였습니다. 특히 간염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드디어 간염 백신을 개발하였습니다. 상품화시키려고 보건사회부에 모든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보사부에서는 된다 안된다 연락이 계속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간염 백신이 개발되어서 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룡 박사님은 그 때 다시 보사부를 찾아 가서 왜 당신이 개발한 백신을 아직 승인을 안 해줘서 프랑스와 미국에게 빼앗기게 했냐고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대답하는 말이,
“기준이 없어서 허가를 내 줄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FDA(식품의 약국)에서 승인이 되어서 이번에 코로나 백신이 출시되었는데, FDA가 승인할수 있었던 것은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듣게 되었는데 강사인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이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는 바로 기준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곧 중진국의 특징은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아니고 만들어진 기준을 수용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생산하는 나라가 될 때 선진국이 된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저도 깊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속히 우리 조국 한국도 백신을 만들뿐만 아니라 백신 승인을 위한 기준까지 만드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편 조국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포스트 팬데믹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출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바로에게 떨면서 하고 있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떨면서 말하고 있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 당시는 지금 보다 훨씬 전 세계가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지역의 신이 있다고 모두가 믿고 있었던 때입니다. 애굽이 강한 것은 애굽의 신이 강해서 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신이 온 세상의 기준을 생산해 내는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를 모르고 있을리가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들은 것을 그냥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가 답합니다. 2절,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예상대로입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경멸하듯 대꾸합니다. 한편 모세는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말하는 것을 들으며 좀 찔끔했을지 모릅니다. 이에 모세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3절,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말을 조금 바꿉니다. 여기서 ‘히브리’의 뜻을 살펴 보면, ‘히브리’는 ‘건너 온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가나안으로 왔을 때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으로 이미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온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곧 건너 온 나그네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건너 온 자들이니 건너 가서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함을 바로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전염병에 다 죽을 거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좀 연장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팬데믹 기간 우리들의 모습을 좀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 넘게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많은 바램 가운데 지나지 않았습니까?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사람을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처럼 모세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로 앞에 왔지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바로에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1년 넘게 늘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경험을 했듯이 말입니다.
이에 바로의 반응은,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전처럼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게 하지만 물자도 알아서 구하면서 전처럼 똑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의 원망이 누구에게 오겠습니까?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그 원망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가 잘 안 되니 ‘히브리인의 하나님’ 곧 ‘건너 온 자들의 하나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비굴하게 할 것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로의 진노요 이스라엘의 원망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하늘은 이스라엘인들의 원망으로 가득채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지난 기간 온 세계가 팬데믹으로 인한 인간들의 두려움으로 가득채워졌듯이…. 제 생각에는 지금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숫자 보다 인간들이 뿜어낸 두려움의 바이러스 숫자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6:1,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모세는 분통이 터져 있는데 하나님은 아주 calm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원망도 들으셨는지 안 들으셨는지 몰라 볼 정도입니다.
도리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가 어쩔수 없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쫓아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쫓아내겠습니까? 자기들 보다 더 강함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자기들이 기준의 생산자였는데, 진짜 기준의 생산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보낼수 밖에 없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400년전에 야곱과 그 자녀들을 강대국 애굽으로 보내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애굽 보다 강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종살이를 거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팬데믹을 허락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도 작년 1년여간 얼마나 안절부절하였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calm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공포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하라” 말씀하시지만 오늘 저희들에게는 “출팬데믹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러면 이러한 진정한 출팬데믹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통해 해답을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왜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절기를 지키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시간상 다시 설명해 드리지 못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유월절이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게 10번째 재앙을 내리는 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지킵니다. 이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민족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뛰어 넘었기에 유월 곧 pass over했다고 해서 유월절 Passover가 절기가 된 것이 아닙니까?
곧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은 바로 Passover를 경험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애굽은 힘과 지식으로 기준의 생산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 내지 나라가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과 나라는 400년의 애굽 종살이의 훈련기간을 마친 후 유월절을 경험한 민족과 나라임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팬데믹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오늘날 유월절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작년도 팬데믹 기간 중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꽃소리 핫라인이 개설되어서 많은 분들에게 큰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었습니다. 그 중 부자지간의 재미있는 대화 코너가 있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은 무슨 라면일까요?
유준이가 좋아하는 치즈라면? 치즈두개 넣은 것? 아니요..
그럼, 아빠가 좋아하는 랍스터 다리 넣은 해물라면? 그건 엄마가 오늘 먹었는데..
그럼 무엇일까요?
정답은.. 주님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월절을 경험한 가정에서 나뉘어지는 대화입니다. 팬데믹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라면’ 때로는 삶속에 갈팡질팡할 때 ‘주님이시라면.’
사실 그동안 코로나 백신으로 많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출팬데믹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백신이 필요합니다. 이 백신은 ‘라면’백신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라면” 노래를 부르며 담대히 절기를 지키는 참된 기준의 생산자들로 하여금 새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이 위대한 시간에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출팬데믹 하라.”
사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고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돌진하여 내려 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백신을 개발한 카리코 박사처럼 뭔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우리처럼 준비가 안 된 자들을 부르실까요?’
1900년경 평안도 정주 땅에 백사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일하러 가는데 보니까 선교사님이 교회를 짓는데 흙으로 벽돌을 구워가지고 교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렇게 짓다가는 금방이라도 비가 오면 다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감동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땅을 팔아서 교회를 짓도록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선교사님이 볼 때 감사하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치고 나면 나중에 무얼 먹고 살겠는지…? 그래서 선교사님은 백사겸을 데려다가 교회 사찰집사를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찰집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총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로 연희 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이 합해서 연세대학교가 될 때 초대 총장이 된 백낙준 박사입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님은 연세대 초대총장뿐 아니라 문교부 장관, 참의원, 국무총리 서리 등 여러 분야에서 크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백낙준 박사님처럼 기준의 생산자가 되자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기준의 생산자는 바로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님이셨습니다. 유월절을 경험한 분은 바로 백사겸 아버님인 것입니다.
물론 백낙준 박사님은 후에 얼마 동안 한국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기준의 생산자는 그의 아버님 백사겸 집사님이셨습니다.
누구나 백낙준 박사처럼 될수는 없습니다. 연세대 총장은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준의 생산자가 될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유월절을 경험하는 자는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코로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팬데믹 끝자락에서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노래를 부르며 출팬데믹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기준의 생산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고 보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하가 생각이 나네요. 음악의 기준을 만들어내셨기에 그렇게 불려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지나서 포르켈이라는 저자가 바하의 전기를 저술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그를 자랑스러워 해라. 그에 어울리는 나라가 되라.”
바하가 독일의 국격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하는 독일의 국격의 기준만 된 것이 아닙니다. NASA에서 1977년도에 Voyager I이라는 우주선을 우주에 띄웠는데 2025년까지 우주를 탐험한다고 합니다. 이 우주선에 7개의 classical music을 보냈는데 그 중 바하의 음악이 3개 들어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하의 3가지 음악을 보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자들의 기준이다’ 보여주기 위해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서 팬데믹을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팬데믹 끝자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보는 자들로 인해 온인류를 위한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을 세우시기 위함이 아니셨을까요?
그러므로 팬데믹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기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 축복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자랑스러워 하십시다. 그리고 기쁨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 보십시다. 유월절 절기를 삶의 광야에서 지키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