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소설가가 지은 소설 ‘상도’에 이어서 드라마를 통해서 소개된 조선 시대 거상 임상옥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줄 압니다. 저는 소설과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 그 분의 이야기를 접하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순조 시대에 의주에서 인삼을 판매해서 크게 부자가 되었는데 이 분이 널리 소개되어진 이유는 그 분의 인생철학 때문인줄 압니다. 그는 자신의 부로 많은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특히 의주에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많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많은 이재민들을 구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수가 되기도 합니다. 후에 헌종은 더 높은 지위로 올리기 원했는데 상인이라고 무시하는 양반들 때문에 더 오르지는 못하고 다시 모든 지위를 내려 놓게 됩니다. 그리고는 평민으로서 이웃을 돕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던 중 어느 날 자기와 거래했던 사람들 특히 자기에게 빚을 지은 사람들을 다 모읍니다. 그리고는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보는 앞에서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웁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어차피 빚이란 것도 물에 불과한 것,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다고 어찌 받을 빚이요, 갚을 빚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상인으로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을 그들에게 돌려 주는 것 뿐이다.”
그리고는 또 말합니다.
“재물을 모으기 보다는 함께 나누는 장사를 하십시요.”
한편 모인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금덩이를 나눠줍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삶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재물은 물처럼 평등해야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곧아야 한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사는 미국 사회 아니 자본주의 사회는 빚의 사회라고 볼수 있습니다. 빚으로 운영되는 사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한편 빚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빚 때문에 도리어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빚 때문에 잘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고 많은 중산층 사람들은 빚으로 인해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갑자기 임상옥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차용증서를 다 불태운다면 어떨까요? 최고의 날이 될줄 압니다. 저희 교회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융자가 있는데 하루 아침에 없어진다면….
오늘 대강절 첫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첫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 가면서 언젠가 네번째 촛불이 켜질 날을 기대하면서 한주 한주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대하는 주님은 어떤 선물을 가지고 찾아 오실까요? 임상옥 처럼 우리들의 차용증서를 다 찢어 주시는 분이실까요? 아니면…,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주님은 어떤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북왕국 아합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제가 오래 전 신학생일 때 이스라엘을 방문했었는데 이스라엘은 전국토가 유적지로 가득차 있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편 유적지 팻말에 가장 많이 써 있는 왕의 이름이 아합왕과 솔로몬왕이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했을 때는 바로 솔로몬과 아합왕 시절이었음을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북왕국은 아합왕 시절 부강해졌지만 아합왕은 그 어느 북왕국 왕보다 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연고인지 부강한 국가를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가만히 놓아두실리가 없습니다. 17:1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이렇게 말하게 하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얄ㄹ 통해 가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하고는 엘리야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습니다. 엘리야는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고 지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냇물이 가뭄으로 인해 마르게 되었습니다. 까마귀가 물까지는 날라다 줄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시냇물이 마른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르밧 여인에게도 말씀을 해 놓으셨을까요? 잠시 후 살펴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으로 향하니 성문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봅니다. 금방 이 여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여인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물을 가져오라고 부탁내지 강권합니다. 이에 여인이 처음 보는 사람의 부탁이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물을 가지러 가는데 한 가지 더 말합니다.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처음 본 사람이 물까지는 좋은데 떡까지 가져 오라고 하니 여인은 좀 기가 막혔는지 자기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이 여인은 시돈 지방의 사르밧 여인 곧 이방여인입니다. 시돈 지방은 바로 이방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음식을 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 위해서 성문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문으로 나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의인이 나타나서 밀가루와 기름을 듬뿍 주었으면 좋겠다.” 상상하며 성문으로 나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선지자 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물과 떡 한 조각을 가져 오라고 합니다.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에게 떡 한 조각을 달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떡 한 조각을 줄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상상했던 사람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여인은 이방여인이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소문은 듣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쯤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눈 앞에 자기가 만나고 싶었던 엘리야 선지자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속에 있는 생각을 엘리야에게 쏟아 놓은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가진 것으로 음식해 먹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여인에게 미리 명령해서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도록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은 생략하시고 결과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르밧으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죤 칼빈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True knowledge of God is born out of obedience.”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여인 사르밧 여인에게 가라고 했을 때 인간적으로는 많은 회의가 생겼을 것입니다. 이방여인이니 자기를 모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여러가지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찾아 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순종의 선지자 엘리야는 여인의 신세타령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나요? 놀랍게도 갖고 있는 재료로 엘리야 당신을 위해 먼저 만들고 나머지로 아들과 자기를 위해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말을 덧붙이는데, 14절 말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결국 엘리야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사르밧까지 찾아 왔듯이 여인도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결과, 16절 말씀,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르밧까지 찾아 온 엘리야에게 순종했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여인이 기다렸던 바로 그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밀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르밧 여인도 순종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 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통해서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자신의 목숨을…. 이제 제2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아마 아들도 엘리야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키우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7절 말씀입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이에 여인은 엘리야에게 폭발합니다. 결국 아들은 죽이고 자기만 살리게 하려고 온 것이냐고 고함쳤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모든 꿈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뻔 했던 것입니다.
이에 난처하게 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어쩔수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아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이를 살리십니다. 여인이 말합니다. 24절 말씀,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멀리 사르밧까지 보내신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단순히 엘리야를 살리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떠한 것임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대강절 첫째 주일 설교를 이 이야기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처음 임상옥이 많은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우리의 하나님은 단순히 빚만을 탕감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곧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만을 이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르밧 여인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을 당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나의 소원만 이루어지길 바라신다면 주님을 기다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임상옥을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아울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시게 하시려고 올해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이 주님을 우리는 대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 무엇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미리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할수 없이 좋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곧 기다림은 모험입니다.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것을 향한…. 올해도 대강절 기간 위대한 모험을 감행하십시다. 그러나 이 모험은 실패할수 없는 모험입니다.
얼마전 청년부 헌신 예배시 골든콘웰 조은아 교수님께서 오셔서 은혜로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조 교수님은 여러 복음송가를 지으셨는데 복음성가를 작사한 과정을 책으로 펴내셨습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 교수님은 20살에 러시아 선교를 서원하고 토론토에서 러시아학과를 다니다가 본토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안고 러시아에 가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합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하루 한끼만 먹으며 공부와 섬김의 생활을 계속합니다. 3년간의 러시아 생활을 마치고 왔을 때는 모든 면에서 지쳐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급기야 하나님께 드렸던 선교의 헌신도 부인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뜻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글을 써내려 가십니다.
“그날은 경복궁 근처에 자리한 오랜 친구의 미술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아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몸을 녹이고 있던 나는 하나님께 소리 내어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들었다.
“하나님, 도대체 이 세상에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거기에 내 소망을 걸겠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한결같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있다면 거기에 내 삶을 던지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변하지 않아서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세상에 나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있다면, 그 안에서 좀 쉬고 싶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를 기다린들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반항은 통곡으로 변했고, 모든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다. 아니 단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실어였다. 하나의 실체였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였다. 깨어나야 할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글을 써 내려갔고, 곡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지은 노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주여 내 영을 고요케 하사
십자가를 품게 하시며
주여 내 영을 잠잠케 하사
십자가로 만족케 하소서
조은아 교수님은 사르밧 여인의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대강절 기간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의 촛불을 밝히십시다.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기대하며 우리는 사르밧 여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