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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 18-25 (12/12/2021)

김미월 작가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요약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강절 설교에 잘 맞는 이야기라서 소개해 드립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아침에 지구가 바로 다음날 새벽에 멸망할 것이라는 소식을 지난밤에 들었는데 어렴풋이 기억하게 됩니다. 이유는 지난밤에 만취한 상태로 뉴스를 보았는데 큰 행성과 지구가 부닥치는 것과 같은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술 취한채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정신이 들면서 그 소식이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 이제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여느날처럼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 오면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들려서 원장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그동안 들었던 피아노 곡에 대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학원으로 가려는데 문득 생각이 듭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텐데 알아서 무엇하게….”

그러면서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실은 이 청년은 취업 준비생입니다. 그동안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 왔는데 갑자기 든 생각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도전합니다.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죽음 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곧 작가가 주는 첫번째 도전은,

‘오늘 하고 있는 일이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인가…?’

 

두번째 도전은 주인공의 친구의 말을 통해 던지고 있습니다. 친구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가장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치아교정을 마친 사람, 제대를 하루 앞둔 사람, 원하는 학교에 입학한 사람, 힘들게 집을 마련한 가장….

한 마디로 기다릴 미래가 있는 사람들이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기다릴 미래가 어떤 것일지는 또다른 이야기일줄 압니다.

 

제가 이 소설에 대해서 듣고 생각난 질문은 바로 소설가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은 질문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교우 여러분,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의미있는 삶, 억울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바울은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그와 상관 없는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때 도리어 놀라운 세계가 확실히 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놀라운 영광의 세계가 지구 역사 저너머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넘어 있는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사도바울은 이미 1절 말씀에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고난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 때는 아주 핍박이 많은 때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도바울은 로마 교인들이 받는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을줄 압니다. 물론 나중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읽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썼겠지요. 그런데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도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로마 교회 교인들 처럼 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일까요?

 

일단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계속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바울은 갑자기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놀라운 관찰력입니다.

 

한국의 국민화가로 알려진 이중섭 화가를 잘 아실줄 압니다. 이 분의 대표작이 황소 그림이지 않습니까? 많은 소를 그리셨습니다.

재미 있는 일화가 있는데 소만 보면 늘 뚫어지게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뚫어지게 관찰하는 수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도 피조물들을 뚫어지게 관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도바울은 깊은 관찰 끝에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관찰한 것을 로마 교인들은 물론 이제는 우리들에게까지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그러면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릴까요? 20절 말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런데 실은 사도바울은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의 집 뒷마당에 새 먹이 통을 설치했습니다. 저희 집에 다른 pet이 없으니 새들을 저희 집 pet으로 삼고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집사람이 먹이 통에 먹이를 채웁니다. 요즘 새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하루가 지나면 다 먹이가 없어집니다.

하여튼 열심히 먹이를 주어 먹는 새들을 보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또 예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의 눈에 들어 온 피조물들의 첫 모습은, 먹으면 또 배고프고 또 배고프고….

실은 새들을 포함해서 많은 피조물들이 거의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허무해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한편 사도바울의 예리한 관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들이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다니는 고단한 삶을 살지만 그들 안에는 깊은 소원이 있는데 자기들도 이처럼 먹이만 찾아 다니다가 죽는 곧 썩어지는 삶에서 해방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피조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아무 목적 없이 허무에 굴복하도록 만드셨을리 없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사도바울의 관찰은 계속됩니다.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들 눈에는 새들은 아침마다 먹이를 주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기다립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먹이를 기다리는 이유는 더 큰 것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조물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인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이 그린 소들이 왜 그렇게 멋져 보이는지 알 것 같습니다. 피조물들 안에 있는 고통이 도리어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고통의 이유는 허무한데 굴복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최고의 것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강절 셋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왜 대강절에 Advent wreath가 생겼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중세기부터 대강절에 Advent wreath를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소나무로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12월 추운 겨울에 눈 속에 보이는 푸른 소나무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눈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있는 소나무로 보인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푸르름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 고통 가운데서 견디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보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길 원하는 피조물들이 이러한 고통 가운데 있다면 정작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23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이 고통 중에 있는데 우리는 피조물과 달리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을 받은 우리도 탄식과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의 모습을 사도바울은 24, 25절 말씀에서 설파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바울은 놀라운 신학을 설파하고 있다고 봅니다.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기다림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은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피조물의 기다림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영광의 자유를 바라보며 고통 중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Advent wreath를 둥글게 만들지 않았나 어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둥글게 만든 이유는 영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결혼 반지가 둥근 이유도 영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소나무들은 이 땅에서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소나무들의 소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소나무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지만 잠시 있는 동안에 앞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맛보기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dvent wreath를 둥글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도 교회 현관문에서 Advent wreath가 교우님들을 매주 환영합니다. Advent wreath는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의 자유를 누릴 것을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은 잠시 후 영원히 사라질지라도….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참음으로 기다릴 때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자유에 이미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바로 우리들의 이 모습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음으로 기다릴 때 언젠가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를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고 피조물들은 그 안에 빛나는 빛을 바라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온 세상 피조물들도 고통 중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음으로 기다릴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 교회 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참음으로 기다려야 하지만 그러한 박해 가운데 있지 않아도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이 동반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죄성은 주님을 기다리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죄성은 이 땅의 삶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삶의 길이를 이 땅으로 국한 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들의 죄성은 우리를 하나의 피조물로 전락시키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것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결국 피조물보다 더 못한 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들의 죄성과 싸우는 것입니다. 죄성의 박해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통쾌한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길이가 이 땅으로 국한 되어 있는 피조물들은 우리 모두가 죄성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며 영원한 영광의 자유를 누리도록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안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대강절 기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즐거워 하십시다.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십시다. 다시 오실 주님은 당신의 옥체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주님을 사모할 때 우리는 이미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온 세계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들과 더불어…. 눈밭에 피어 오르는 상록수가 되어 가십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은 의미 있는 삶입니다. 결코 억울한 삶이 아닙니다. 그 때 우리는 눈밭에서 빛나는 상록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말씀을 거둡니다.

버지니아에 사는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토요일에는 자녀 학업을 위해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새벽에 가서 밤 늦게 다시 버스를 타고 버지니아로 귀가한다고 합니다.

어느 날 토요일 밤에 가을비가 촉촉이 적시고 있었는데 생각 보다 비가 많이 내렸고 미리 우산을 준비한 사모님 가족은 괜찮았지만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다른 승객들은 자켓 모자를 쓰거나 비를 피하려 건물 처마로 들어 갔습니다.

버스는 늘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승객을 싣고 정확히 출발했었는데, 이상하게 비가 오는 그날은 버스가 주차장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버스회사에서 긴급으로 텍스트와 이멜이 왔습니다. 중간에 사고로 버스가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승객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해했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져 사모님은 딸과 함께 우산을 쓰고 하나는 옆에 승객에게 빌려주었습니다. 함께 기다리는 사람은 인도전통의상을 입은 부모님과 가족, 네 명의 젊은 프랑스 배낭 여행객들, 중년 백인 여성, 잔뜩 쇼핑을 한 멋쟁이 흑인 아가씨들….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가 새로 버스가 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도가족의 아들은 비를 뚫고 달려가 매번 기사에게 워싱턴행 버스가 아닌지 확인을 하곤 했습니다.

모두들 추위와 기다림에 지쳐갈 때 버스 한대가 들어왔습니다. 시간 전에 들어온 버스라 별 기대 없이 있는데, 차에서 내린 기사가 “워싱턴 버스!”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함께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기사는 고생했다며 친절하게 큰 페이퍼 타올을 건네며 물기를 닦으라고 했습니다. 우산을 빌려준 여대생은 언제 다녀왔는지 음료수 두 병과 함께 우산을 돌려 주었습니다. 인도가족은 혹시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스낵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했고 그 사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사람들은 서로 서로 충전라인을 나누며 전화기를 충전했습니다. 히터로 따뜻한 버스안의 온도와 안도의 웃음소리들….

서로 너무나 다른 각각의 나라, 각각의 인종은 그 순간 서로에게 모두 위로가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자들은 어느덧 서로에게 꼭 필요한 상록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매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모일 때 얼마나 신비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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