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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태복음 5:1-8 (04/03/2022)

오늘은 베토벤의 독백으로 말씀 서두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예술 속에서 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내게 더 가까이 있음을 잘 안다. 나는 두려움 없이 그와 의논한다. 나는 항상 그를 알아보고 이해했다. 나는 내 음악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 운명은 행복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내 음악을 듣는 사람은 누구든 다른 인간들을 짓누르는 온갖 불행에서 놓여 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이 고백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물론 목사인 저는 이 고백을 읽고 금방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베토벤과 같은 고백을 당당하게 할수 있는가? ‘나의 설교를 듣는 사람은 누구든 온갖 불행에서 놓여 날 수 있을 것이다’ 당당하게 말할수 있는가?’

 

베토벤의 고백은 베토벤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 질문을 던지기 전 우리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음은 누구나 공감하실줄 압니다. 베토벤은 자기의 음악이 모든 사람을 온갖 불행에서 놓여 나게 하는 근본 이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와 더 가까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고 베토벤은 항상 하나님을 알아 보고 이해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산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듯 합니다. 어떻게 베토벤은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살았다고 고백을 할수 있을까 궁금한 생각도 듭니다.

 

한편 이런 놀라운 삶이 가능함을 주님은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이하여 여섯번째 팔복의 말씀을 나눕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을 볼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을까요? 물론 들었겠죠. 그런데 구약 말씀을 잘 아는 제자들은 금방 모세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을줄 압니다.

 

모세가 출애굽후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광야 생활을 막 시작하고는 시내산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십계명과 함께 율법을 받습니다. 이제 율법을 받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까지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짧은 광야의 삶이었지만 모세는 벌써 자신이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루가 멀게 새로운 일이 생기니 이 큰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까지 갈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함께 갈 한 사람을 지시해 달라고 아룁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출애굽기 33:1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도 모세는 아직 못 믿어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면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22, 23절,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등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그런데 주님은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원어로 직역을 하면,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죽기 때문에 모세에게도 등만 보여 주셨는데 주님은 모세가 체험하지 않은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음을….

한편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모세도 체험하지 못한 것을 주님은 어떤 배짱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세처럼 자기들보다 마음이 훨씬 청결했던 사람도 겨우 하나님의 등만을 볼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산에서 시작하고 산에서 마치셨습니다. 산상수훈으로 시작하셨고 갈보리산에서 마치셨습니다. 곧 주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이 앞으로의 3년간의 공생애를 거쳐 갈보리 산에서 완성 될 것을 생각하시고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에게도 하시지 않으신 말씀을 지금 하실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느 학자들이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갑이라는 그룹에게는 돈 백불을 주고 을이라는 그룹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규칙이 있었는데 백불 받은 갑에 속한 사람들은 안 받은 을에 속한 사람들에게 원하는대로 돈을 나눌수 있습니다. 반면 받지 않은 을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받은 사람들 곧 갑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할수가 없었습니다.

받은 사람들이 100명이라고 하면 그 중에 몇 명이 안 받은 사람들에게 돈을 주었을까요? 60%가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그만하면 괜찮죠?

그런데 얼마를 나눠주었을까요? 평균 20불 정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100불 중 20불을 주고 자기는 80불을 챙긴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들에게는 그래도 선한 자취가 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100불 중에 20불을 나눠 준 사람들을 청결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갑은 80불 을은 20불로 끝낸 것입니다. 물론 60%의 사람만…. 40%의 갑은 그냥 갑질을 하고 있었고….

 

그런데 학자들은 계속해서 한 가지 실험을 또 했습니다. 이번에는 을이라는 그룹에게도 돈을 주었는데 10불씩 주었습니다. 곧 갑은 100불, 을은 10불.

한편 이번에는 한 규칙을 더했습니다. 갑은 을에게 자기의 것을 줄수도 있고 빼앗을수도 있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놀랍게도 많은 갑의 사람들이 을의 10불을 빼앗았습니다. 을이 아무 것도 손에 없을 때는 60%의 사람들이 자기의 20불을 주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주기는 커녕 을이 갖고 있는 10불을 빼앗았습니다.

처음 실험에서 을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을 알 때는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60% 사람들이 20불을 준 것입니다. 이제 을이 10불씩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이상 줄 필요가 없음은 물론 도리어 그나마 10불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없을 때는 조금 주지만 남이 조금이라도 갖고 있을 때는 그것마저 빼앗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실험 결과도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런 실험 없이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경제 평등화가 생길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의외에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여….”

 

이로서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임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인간이 청결한 마음을 가질수 있는 길은 십자가뿐임을 주님은 너무도 잘 아시고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질 놀라운 역사를 생각하시면서 지금 산상수훈을 펼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곧 주님은 당신의 보혈로 당신을 믿는 자들을 깨끗게 하실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한편 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우리들 책임입니다. 매일 매일 청결케 되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 몫입니다. 그러면 매일 청결케 되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저는 조금 전 말씀드린 모세의 모습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제 시내산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누구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사람을 보내 주시면 그 분의 안내로 가나안 땅으로 올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죄 많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 오셔서 직접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 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끝내 당신이 내려 오신 것을 확인 시켜 주시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당신의 등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등을 보여 주시면서 당신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인간 세상에 내려 오신 하나님 그리고 당신의 등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수 있을까요? 물론 이들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들입니다.

 

셀린이라는 수녀가 성 테레사 수녀에게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가까이 가려고 해도 자신 안에 있는 더러움과 연약함들로 인해 늘 좌절한다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자기 자신은 거룩함을 향하여 가기에는 너무 멀고 높고 높은 산과 같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때 테레사 수녀는 결코 높은 거룩의 산을 올라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기꺼이 셀린을 만나기 위해 내려 오신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수녀가 더 내려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겸손의 골짜기에서 수녀를 만나시려 거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테레사 수녀의 놀라운 지혜가 엿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높은 거룩의 산을 오르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내려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에 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온갖 연약함과 추함이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들의 더러움이 우리를 청결하게 합니다. 더러움 가운데 찾아 오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바로 청결한 자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동안의 두 산의 이미지를 좀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의 산에 오르셨던 주님은 갈보리 산에 오르셨습니다. 왜 갈보리산에 오르셔야 했습니까? 주님께서 갈보리산에 오르심은 실은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시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인간들의 가장 추한 곳으로 내려 가심을 온 우주에 보이시기 위해서 갈보리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감히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등을 보여 주셨는데 이 하나님의 등은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등이 아니셨을까요?

예수님의 등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의 온갖 허물을 짊어지고 가시는 등입니다. 채찍에 맞으시는 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갈보리 산에 십자가를 지고 한 치도 오를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반면 십자가를 지신 등을 바라 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등에 난 채찍 자국을 보면서 우리들의 가장 추하고 모순된 모습 안에서 주님을 만날 것을 원하십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들의 가장 추한 곳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시는 주님의 등을 보며 주님을 따라 내려 갈 때 우리들의 마음은 청결해 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더 내려가는 절기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계신 주님을 만나는 절기입니다. 이 때 우리는 베토벤보다 더 놀라운 고백의 주인공이 되어 갈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갑질을 하는 더럽고 추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들 손에 100불이 있다면 우리들 중 60%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20불을 줍니다. 만일 상대방이 10불이라도 있으면 그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이 모습도 모르고 지냅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절기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갈 때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가장 추하고 낮은 곳에 주님은 이미 내려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추하고 더러운 냄새를 당신의 온 몸으로 감싸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어느덧 환희의 송가를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이루시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을 거둡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알려진 Miserere라는 곡이 있습니다. 1630년경 당시 교황 Urban 8세 때 Gregorio Allegroi라는 신부이자 작곡가가 만든 곡입니다. 고난 주간에 연주하기 위하여 만들었는데 처음 Sistine Chapel에서 연주가 되었습니다.

교황이 이 곡을 듣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 곡은 일년에 한번 고난주간에 Sistine Chapel에서만 연주하고 이 곡을 절대로 외부로 유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주제의 노래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고 시스틴 채플에서만 연주하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로 저희가 매해 재의 수요일에 꼭 봉독을 하는 시편 51편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 장군을 죽인 후 죄를 회개하며 쓴 이 시편 51편을 가사로 해서 쓰여진 곡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도 아니고 참회의 시가 도리어 최고의 노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은 갑질을 하였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갑질 중에 갑질을 한 추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추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을 썼습니다. 이 시편을 가지고 알레고리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한 것입니다.

 

이 노래와 관계된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이 곡이 쓰여진 후 시스틴 채플에서만 불려졌기에 이 곡을 들으려면 시스틴 채플에 갔어야만 했습니다. 장장 130년간…. 130년후 모짜르트가 이 곡을 들으려고 시스틴 채플을 방문합니다. 듣고 나서 집에서 악보에 적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 곡이 시스틴 성당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노래가 세상 가운데서 더럽혀질까 봐 교황은 시스틴 채플에서만 130년간 연주하게 했을까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노래는 다윗의 가장 낮게 내려간 곳에서 고백된 가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낮은 곳에 와 계심을 알려주는 예화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남은 사순절 기간 누리십시다. 베토벤 저리 가는 놀라운 체험을 하십시다.

 

남은 사순절 우리들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십시다. 갈보리산에 오르신 주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을 뵈옵고 최고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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