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Robert Schuller 목사님의 질문을 드립니다.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What would you attempt to do if you knew you could not fail?”
(당신은 실패할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시도해 보시렵니까?)
이번에는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실패할수 없다는 확신, 달리 말해서 승리의 확신을 어떻게 하면 갖게 될까요?”
제가 소그룹 인도자 성경 공부시 요한계시록을 나눌 때마다 말씀드리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대로 요한계시록이 성경 해석에서 제일 어렵습니다. 이를 장로교 창시자 요한 칼빈이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칼빈이 신구약 성경 69권중에 주석하지 않은 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성경 밖에 서적들과 역사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어느 신학자가 한 건물 안에 들어가는데 건물을 지키는 분이 열심히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신학자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계시록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된다고 대답을 하니 또 질문합니다.
“계시록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Victory.”
계시록이 승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계시록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분이 이런 확신을 갖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줄 압니다. 이번에 일곱교회에 주시는 서신을 나누고 있는데 일곱교회 서신만을 읽어도 승리의 확신이 절로 생기게 되었을줄 압니다.
우선 개 교회에 보내는 서신 서두만을 봐도 금방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서두에 주님은 당신의 모습을 일곱 가지로 소개해 주십니다. 지난 주 나눈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모습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당신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입니다. 오른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주님의 권능의 손에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일곱 사자들은 곧 주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고 계십니다. 곧 교회는 분명 승리할수 밖에 없음을 주님의 모습이 밝히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속한 자들은 당연히…?
그러면 일곱 교회중 두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승리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스스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으로 소개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모든 믿는 자들 곧 일곱 교회 교인들이 다 고백하는 공통적 신앙 고백 내용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의 서신에 이 것을 특별히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에베소도 아름다운 도시지만 서머나도 못지 않게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머나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서머나는 부활을 경험한 도시라고 합니다. 약 700년전에 완전히 파괴가 되었는데 그 후 300년간 회복되지 못합니다. 300년후에 부활한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위해서 보내는 서신에는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소개해 주신 것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절실한 이유는 9절 말씀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이처럼 세상적으로 부활한 도시에 살고 있는데 실은 세상적인 부요와는 거리가 멀게 고생하면서 소망 없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세상적으로는 부활을 했지만 그 안에 사는 믿는 자들은 세상적 부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에 소아시아는 이미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돈많은 유대인들이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어서 믿는 자들을 박해했으니 따라서 가난하게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은 참 유대인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탄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이고 부활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저희 나라와 비교하면, 사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10위권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국에 살지만 만일 교인들은 이 부요함을 누리지 못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로 이것이 서머나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요즘 인도가 비슷한 정황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부강해지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지금 인도와 비슷한 서머나 교인들에게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잘 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는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머나 교인들은 크게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정말로 힘겹게 지내 왔습니다. 늘 죽음이 매일 스쳐지나가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가난은 물론이거니와…. 그런데 주님께서 그동안의 모든 사정을 잘 아시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니 곧 이 고통의 시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구나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10절 상반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웬걸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커녕 도리어 더 큰 환난을 예고하십니다. 몇 사람은 감옥에 갇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날짜까지 알려 주시는데 십 일 동안….
십 일 동안의 의미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분간 계속 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언젠가는 끝날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언젠가 끝날 고난의 시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서머나 교인들은 어떻게 이 말씀을 받을까요?
물론 앞이 캄캄해졌을줄 압니다. 아니 그동안도 오래 참았는데 앞으로 십 일간…! 이 때 주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립니다. 10절 하반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 좀 아이러니칼합니다. 늘 죽음이 스쳐가고 있는데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죽음을 피하지 말고 죽음에 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저는 수영을 하지 못합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래서 도리어 올림픽 경기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수영입니다. 수영 선수들의 모습에 저를 투사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해협을 여러 차례 건넌 한 수영 선수에 따르면, 물속에 들어가서 한동안은 몸이 저항을 느끼기 때문에 무척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헤엄치다 보면 어느 순간 물과 내 리듬이 딱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그 순간부터는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물이 되어 흘러간다는 것이다. 물이 된 신체, 신체가 된 물, 그게 바로 ‘수영’이라는 사건이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새삼 제가 수영을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물을 제 힘으로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 몸에 힘을 주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니 갈아 앉을수밖에….
그러나 수영은 물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의 흐름에 맡겨서 물과 함께 리듬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머나 교회에 보내신 서신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해석할수 있다고 봅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지금 어려운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이 언제 끝날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끝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환난을 어떻게 견뎌야 하죠? 환난의 리듬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교회가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죽음의 위험이 있습니다. 죽음의 리듬에 맞추라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에 환난의 리듬을 맞춘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한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캅입니다. 그는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주석가는 이 편지가 쓰여진 후 약 20년 후에 폴리캅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폴리캅은 십 일의 시간 안에 감독으로 섬기셨던 것입니다. 십 일 간의 박해 기간 박해자들이 폴리캅에게 주님을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죠.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 분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한편 언젠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을 비롯 환난이 임할 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다음의 말씀으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마감합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폴리캅은 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폴리캅이 환난의 리듬에 맞추어 수영을 할수 있는 힘은 어디서 얻었을까요? 먼저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은 요한을 통해서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승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섬기면서 이 말씀을 깊게 가슴에 새기면서 교회를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만 가슴에 새겼을까요? 일곱 교회에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일곱 교회에 주는 멧세지에 공통된 것이 하나 있다고…. 일곱 서신마다 이 말씀이 똑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개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말씀은 실은 온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폴리캅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비롯 나머지 여섯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는 승리자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 성령강림주일 예배로 드리니 잠시 성령께서 나머지 여섯 교회에 하신 말씀을,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부터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2:1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6)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곧 ‘승리’가 공통점입니다. 승리의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반복적인 주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승리하신 열매이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고 오순절날 성령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습니다. 곧 성령은 승리 그 자체이십니다. 이 분이 이제는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과 승리는 뗄레야 뗄수 없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아마 특별히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성령은 승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는 승리만 있을뿐입니다.
저의 수영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제가 수영을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빠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가서 금메달을 딸 생각을 하면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환난을 피할 생각을 하면 늘 환난에 질수 밖에 없습니다. 환난의 리듬을 타고 금메달을 따려고 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삶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성령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온 교회에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저희 교회 교우님들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저희 교회와 더불어 우리 주위의 ‘바로 그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미주 크리스챤 신문에서 한 컬럼의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미켈란젤로’’.
무슨 내용의 글인가 하고 읽어 보았습니다. 잘 아는 내용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런 훌륭한 조각가가 된 경위가 있지 않습니까? 대리석 안에 위대한 조각상을 먼저 생각하고 그 나머지 대리석을 까 내는 것이라는 이야기 자주 접하셨을줄 압니다.
이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의 대리석 앞에서 조각가 곧 미켈란젤로로 서신채로 대리석 안에 있는 우리들의 위대한 모습을 보시고 계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자’로 생각하시고 지금도 열심히 조각하시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바로 그 일곱 교회’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승리자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도 몸을 맡기고 리듬을 타는 것입니다. 수영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