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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기도” 시편 4:1-8 (09/04/2022)

한국에서 소통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옥 교수님이 계십니다. 신학교의 문턱도 들어가 보시지 않은 분인데 서울 여대 기독교 학과 교수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소통의 멧세지에서 기독교의 기본이 잘 스며 있다고 판단되어서 특채로 교수가 되신 분입니다.

교수님은 채플 시간에는 지루한 강연 보다는 15분의 짧은 강연 후 질문 시간을 갖곤 하셨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런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오빠가 군대에 갔는데 기다려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하면서 ‘지금이 아주 좋은 챤스’라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뜻이었을까요? 교수님은 질문한 학생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좋아 했는지, 좋아 보였는지’ 구분할수 있는 챤스라고 말씀하십니다. 학생은 다시 질문합니다.

“좋아 하는 것과 좋아 보이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좋아하는 것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좋아 보이는 것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좋아한다면 기다림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은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오늘은 시편 4편을 나눕니다. 본문 말씀을 읽으면 전혀 젊은이들의 연예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왜 연애 이야기로 시작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궁금해 하실테니 미리 말씀드리면 시편 4편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요즘은 밤 늦게 주무시니 밤 기도문이라고 해도 좋을줄 압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나눌 시편 5편은 아침 기도문입니다.

두 주 전에 시편 3편을 나눴는데 3편은 ‘기도의 정석’이 담긴 기도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4편으로는 저녁 기도문을 실은 것입니다. 한편 5편으로는 아침 기도문을 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의아한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어떻게 저녁 기도문을 아침 기도문 보다 앞 세웠는가?’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이 저녁입니다. 이는 창조 이야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6일간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매일 반복되어 기록된 말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런데 오늘 시편 내용을 살피면 저녁 기도문을 아침 기도문 보다 앞세우는 것이 여러모로 합당하다는 생각도 들게됩니다. 이유는 저녁 시간은 좋은 챤스입니다. 하루의 삶을 뒤돌아 보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좋아하는 삶을 살았는지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는 삶을 살았는지…?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오래 전입니다. 벌써 거의 40년이 되었네요. 그 때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진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구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었는데, 어느 TV광고가 저의 가슴에 깊게 와 닿았습니다.

지금은 무슨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이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만, 한 젊잖게 생긴 중년 남성이 양복을 입고 비행기를 타면서 스튜어디스와 말을 나눕니다.

“Tough day.” (“힘든 하루였습니다.”)

그 날도 별로 성과가 없었던 하루였다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주기에 그런 광고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깊은 공감을 주었었습니다.

 

다윗은 하루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Tough day.”

그런데 이 고백으로 인해서 다윗은 새로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수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의 정석인 시편 3편을 나눌 때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기도드리고 있다고,

“아버지 큰 일 났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시편 4편 곧 저녁의 기도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합니다.

“Tough day.”

 

이 고백으로 저녁 기도를 시작하는데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시인은 어느덧 이 저녁 시간을 좋은 챤스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좋아 하는 것을 따라 갔는지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갔는지 구분하는 통찰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날도 자기로 하여금 좋아 보이는 것을 쫓아 가게 하였습니다. 이제 저녁 기도 시간을 통해서 좋아 보이는 것을 쫓아 가게 한 주위 환경들이 눈 앞에 선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당에 만나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김병삼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따님이 어릴 때 약부작용으로 지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평생 따님의 아픔을 안고 사시며 목회를 훌륭하게 감당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사실 이 때 가장 힘들게 한 사람들 중에 동료 목사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목회할래….”

딸이 장애인이 되었는데 무슨 낯으로 목회를 할 것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니다. 따님으로 인한 고난으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위기를 용기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는 바로 ‘아버지 도와 주세요’라는 고백입니다.”

 

동료 목회자들은 좋아 보이는 것의 관점에서 충고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도와 주세요”라는 기도를 통해서 좋아 보이는 것을 쫓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용감한 자가 되어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어느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You get in life what you have the courage to ask for.” – Nancy D. Solomon

“용기를 가지고 구한 것으로 삶은 장식됩니다.”

 

힘든 하루를 지내고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잠을 청하는 것이 용기 있는 자가 아닙니다. 비겁한 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 솔직히 용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도와 주세요.”

어느덧 삶은 아름답게 장식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용감한 자들의 특징은 택함을 받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받은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고 기다리는 자가 됩니다. 구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느덧 구하는 용기는 기다리는 용기에게 바톤을 넘기는 것입니다.

 

한편 이들의 용기는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4절,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구할줄 알고 기다릴줄 아는 용기를 소유한 자들은 이웃에게 외치는 용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시인은 어느덧 동료들에게 아니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인류 공동체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라.”

그들에게 이 귀한 저녁 시간을 좋은 챤스로 삼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지 뒤돌아 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녁 시간에 잠잠히 좋아 보이는 것을 쫓지 않았는지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를 이렇게 맞이할 것을 외칩니다. 5절,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시인은 늘 저녁 기도와 함께 의의 제사를 드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어떤 의의 제사를 드렸을까요?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의 얼굴을 사모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매일 저녁 올리는 의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 곧 김창옥 교수님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김 교수님이 학생에게 좋아하는 것과 좋아 보이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셨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댓가를 치루면서도 기다리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 개론 교수로서 계속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 시로 설명을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행이 나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괴로웠던 사나이가 어떻게 행복할수 있냐는 역설적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괴로우셨지만 행복할수 있었던 것은 좋아하는 자들을 위해 댓가를 치루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행복이었고, 이처럼 자기의 최선의 것 곧 생명으로 댓가를 치루며 사랑하는 삶이 최고의 행복한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시인은 당연히 저녁 시간에 의의 제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에게 의의 제사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을 묵상할 때 놀라운 용기가 덧붙여집니다. 결국 여호와를 의지하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기다림의 용기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막막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자기의 마음에는 기다림의 댓가를 치룰 때 얻는 놀라운 축복이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쁨’입니다. 하루를 힘겹게 지냈지만 뒤 돌아 보니 매 순간 곳곳에서 주님을 만나곤 했던 것입니다. 매 순간 놀라운 기쁨이 하루를 가득 채웠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할 때 어떤 결과가 오죠?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하루의 시작인 것입니다.

 

비록 오늘은 ‘tough day’라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지만 저녁이라는 챤스를 통해서 하루라는 시간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놀라운 새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댓가를 치루어도 좋은 분을 생각하면서…. 어느새 마음 속에는 기쁨이 가득차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기쁨 가운데 꿈나라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어느 분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방금 정말 멋진 영화를 봤어! 쯧쯧,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니. 남부 아시아에서 자살 폭탄 테러? 주가가 폭등했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가슴 아픈 비밀? 새로운 아이디어? 뭘까? 택시를 타고 가는 중이야. 당신의 힘을 보태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보고하는 걸 깜빡했네. 어디다 뒀더라? 당신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중략합니다.

 

누구의 모습일까요? 디지탈 시대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시편은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이 썼습니다. 바로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는 디지탈이라는 문명으로 인해 도리어 정보의 홍수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챤스를 잃어간 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녁’이라는 챤스를 잃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잃고 이웃도 잃고….

 

저녁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이 챤스를 주님 앞에서 보내십시다. 자신을 위한 이웃을 위한 최고의 하루를 맞이합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김현승 시인의 ‘검은 빛’이라는 시입니다.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꽃마다 품 안에 받아들이는

 

사랑하기 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저녁은 검은 빛이 우리를 감싸는 시간입니다. 찬란한 검은 빛의 축복을 맛보며 주님 앞에 용기를 내어 다가 가십시다. 우렁찬 하루가 시작됩니다.

 

검은 빛 가운데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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