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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형체를 가지사…” 빌립보서 2: 6-11 (09/18/2022)

 

먼저 오늘은 저희 교회 라비에 전시되어 있는 두 그림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번째 그림은 저희 교회가 이곳으로 이사 오긴 전 불 탄적이 있는데 바로 불에 타기 전의 모습입니다. 지금 저희는 실은 다시 지어진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눈에 익은 장면입니다. 12년전에 완공한 ECC건물과 함께 그려진 전경입니다. 그 당시 교우님이셨던 현종광 교우님께서 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저희 교회 60 주년 역사책 커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그림을 보니 사진도 좋지만 그림이 주는 색다른 느낌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Frank Harmon이라는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drawing as a way to see’, 의역하면 ‘그리는 작업을 통해 사물을 새롭게 본다’라는 관점에서 예술 활동을 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방문한 곳을 그리고, 그림을 통해 그 지역을 새롭게 만난 후 책을 펴 냈습니다. 한번은 Columbus Indiana를 방문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그렸습니다.

제일 가까운 건물이 First Christian Church, 가운데가 City Hall (시청), 제일 뒤 작게 까맣게 보이는 것이 Lutheran Church. 그는 어느 건축가의 말을 빌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운에 가장 큰 빌딩이 그 타운이 추구하는 가치를 보여준다.’

이 타운은 시청과 교회가 우뚝 서 있으니 시민 곧 민주주의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타운이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덧붙이기를 ‘미국의 대다수의 타운에는 은행과 사무실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말합니다.

 

궁금해서 Brookline은 어떤 건물 높이의 제한이 있나 찾아 보았습니다. 8층까지 제한이며 80feet곧 24미터로 제한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 교회 앞에 있는 타운홀이 가장 높은 건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몇번 타운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보았는데 타운 전체를 한 눈에 볼수 있는듯 했습니다. Brookline 타운이 추구하는 제일 높은 가치는 시민성인 것 같습니다.

 

한편 Harvard St. 선상만을 본다면 단연 저희 교회 ECC 건물이 제일 높은 것 같습니다. 실은 제일 높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50주년 곧 첫 희년을 생각하면서 시작했던 건축이라서 건축 설계사가 Jubilee tower라는 개념으로 높게 천정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계획보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도중에 그렇게 높지 않아도 되니 높이를 반으로 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설계사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결국 Harvard St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습니다. 만일 Frank Harmon이 와서 하바드 St을 그리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며 그리게 될지 자못 궁금한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더 궁금한 것은 주님의 생각입니다. 주님은 높이 솟은 저희 교회 Jubilee tower를 보시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오늘은 시편 대신 빌립보서 말씀을 나눕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임직예배 설교를 위해서 적합한 멧세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의 본문 말씀도 하나의 시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초대교회에서 만들어진 찬양시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를 보면 주님께서 Jubilee tower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조금은 추측 가능하다고 믿어집니다. 먼저 시인은 주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6상반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시인은 주님을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찬양합니다.

 

보통 시에는 이미지가 들어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시를 생각할 때는 쉽게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유명한 삼위일체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가운데가 성부 하나님 왼쪽이 성자 하나님 오른쪽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띄는 색깔이 있죠. 푸른색입니다. 물론 갈색이 바탕으로 되어 있구요. 화가들은 이를 divine blue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번 어느 강의를 들었는데 갈색 배경에 푸른 색이 감도는 것이 성스러운 색깔 하나님의 색깔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푸른색일까요? 높은 하늘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늘색이 성스러운 색깔입니다. 이 그림에도 보면 성부 하나님도 갈색 바탕에 푸른색을 띄고 있고 성자 하나님도 갈색 바탕에 푸른색을 띄고 있습니다.

곧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기에 성자 주님도 푸른색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분은 조금 다릅니다. 이어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6하반절과 7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런데 한글 번역으로는 크게 미쓰하는 것이 있습니다. 원어로는 ‘하나님의 본체’에서의 ‘본체’와 ‘종의 형체’에서의 ‘형체’가 같은 단어입니다. 곧 ‘종의 형체’를 ‘종의 본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실감날 것 같습니다. 종의 본체가 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이기에 신비스러운 푸른 빛을 띄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서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도 종이 되셔서 종의 길을 가실 준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종의 본체는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복종하셨나요. 사람으로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더 이상 사람됨을 버리신 것입니다.

 

곧 주님은 두 번 버리셨습니다. 두 번 낮아지셨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것이고 두번째로는 사람이 된 것마저 포기하신 것입니다. 죽으심으로….

 

지난 주까지 시편 5편까지 나눴습니다. 특히 4, 5편은 저녁의 기도문과 아침의 기도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편의 기도문을 따라 주님도 저녁과 아침에 기도드리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하나님으로서 주님께서 저녁과 아침에 기도드릴수 밖에 없었을까요? 사람으로서 사람됨을 포기하시기 위하여 매일 기도드리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은 사람됨을 버릴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주님은 저녁과 아침의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실수 있으셨습니다. 철저히 버림을 당하실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고백하실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요즘 주님께서는 저희 교회에 우뚝선 Jubilee Tower를 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아직도 Harvard St 선상에서는 제일 높으니 뿌듯해 하실까요?

 

한 시조가 떠오릅니다.

“태산(太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물론 시인은 태산을 오르자는 의미로 이 시조를 지었지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의 제 아무리 높은 건물도 하늘 아래 건물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푸른 하늘을 뚫고 오를수 없습니다. 그러나 푸른 하늘을 뚫고 오르신 분이 계십니다.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즘 저는 주님의 등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합니다. 이유는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너무 스크린을 통해 우리는 앞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다고 봅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마치며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갑자기 앞장 서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등을 보이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귀타신 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당신의 등을 따라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굽혀진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롯 유다에게 팔려 가시면서 뒤쫓아 오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빌라도 법정에 서셔서 당신의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채찍맞으시는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시면서 등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론 마지막으로는 얼굴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의 정적이 흐르는 얼굴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 마치신 얼굴입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색깔은 갈색에 비추인 청색이 된 것입니다.

갈색은 흙의 색깔입니다. 아니 사람의 색깔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색깔에 푸른 하나님의 색깔이 스며든 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시작과 함께 산상수훈의 말씀을 펼치시면서 당신의 젊고 멋진 얼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죽으신 얼굴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종의 본체를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의 등에 이 모든 과정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제직 임직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드린대로 요즘 디지털 시대는 얼굴을 보여주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등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두번 버리신 주님을….  그리고 그 분의 등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등을 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등도 갈색 바탕으로 푸른빛이 스며들 것입니다.

 

제직으로서 어쩔수 없이 얼굴을 많이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럴수록 혼자서 주님의 등을 바라 보십시다. 때로는 섬김의 모범을 보이시는 선배 제직분들의 등을 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교우님들도 여러분의 등을 통해 주님의 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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