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계 성찬 주일이자 정의 평화 환경 주일 예배로 드리는데 설교 준비를 위해 콤퓨터 앞에 앉았는데 먼저 저의 모교인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온 이멜이 눈에 띄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패널 모임있다는 홍보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관하는 분은 교수이시고 참가자는 신문 기자와 공화당 민주당 대표 등 네 명의 연사가 나온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Pew 리서치 센타에 의하면 공화당과 민주당은 상대방을 어느 잇슈에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윤리적이고 부정직하고 막혀 있고 국가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 모든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고 더 이상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하려는 마음은 오래 전 사라졌다”라고 쓰셨습니다.
교수님은 지금 우리는 분열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분열의 시대에 오늘 우리 교회와 신학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색하기 위해 패널 모임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가 분열의 온상이 되고 있음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줄 압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과연 사회를 향하여 평화의 사명을 잘 감당할수 있을까요? 사회를 향하여 “화평하라” 말할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요즘 소그룹과 구역에서 고린도전서를 나누고 있는데 ‘고린도 교회’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있을줄 압니다. ‘분쟁’ 내지 ‘분파’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진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편지를 시작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음행, 우상숭배, 무질서 등 여러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최소한 네 번의 편지를 썼고 그 중 두 편지가 남아서 저희들 손에 성경말씀으로 들려지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분열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고린도전서를 쓴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떤 연고인지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지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1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고린도 교회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 곧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고린도 교회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일까요? 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은 은혜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다른 마게도냐 교회들과 함께 많은 시련 중에 있었는데 이를 놀랍게 반응합니다. 시련 중에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은혜라고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그들이 받은 은혜를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3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은혜를 받은 자들의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자원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사도바울은 분열된 사회를 향하여 화평하라고 말할수 있는 곳은 교회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분열된 교회라도 놀라운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였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분열의 마스터 degree를 갖고 있는 이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될수 있었을까? 고린도 교회의 잠재력은 무엇이었을까요? 6절,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낸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짧은 한 절에 두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먼저 주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곧 고린도 교회의 잠재력은 주님이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주님께 반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물론 한 때는 분열의 온상이었어도…. 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계속 이 은혜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게 하려고 디도를 보낸 것입니다. 그동안도 잘 해온 것 처럼 ‘계속해서 잘 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또 떠오릅니다. 이들은 어떻게 자원하는 마음이 생겼을까?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해답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자원하라고 권하지 않았을줄 압니다.
최근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인격적이어서 무작정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찾아 와 물으십니다.
“내가 도와 줘도 되니…?”
“도와 주세요.” 대답을 들을 때 도와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함을 사도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찾아 오신 주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는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율법 뒤에 숨어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을 만납니다.
이 주님은 보이는 주님이셨습니다. 세상이라는 물질 세계 속으로 찾아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로 찾아 오셨습니다. 모든 부를 버리시고…. 가난하시기에 물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부요하게 하시려고 최고로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 아픔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학문 속에 계신 분도 아니고 멀리 무한대의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 분도 아니고 바로 눈 앞에 가난한 자로 오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 가난한 주님을 뵙고는 사도바울도 자원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면서…, 물질까지….
주님은 가난해 지셨기에 물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물질로 이웃을 섬기는 삶의 소중함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이는 곧 당신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처음 말씀드렸습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단수가 170여개라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모습을 바라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의 모습을 바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바라 보는 자들은 가난한 이웃의 모습을 함께 바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지금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과 함께 이웃을 바라 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지금 누구를 생각하며 고린도 교회에게 가난하게 될 것을 권하고 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로마서 15:26절을 보면,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분열 투성이의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 이유는 이들은 주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아울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미 풍성한 연보를 했던 고린도 교회에게 계속 더 많이 섬기라고 말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14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사실 조금 전에 로마서 말씀을 인용해서 고린도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했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다음 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적인 축복을 받았으니 육적인 축복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서로 서로 자기의 귀한 살과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위해 유익한 것입니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나누는 것은 아픔입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누린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에게 사도바울은 고후 5:18절에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고린도 교회는 어느덧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자가 되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화해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미국 사회가 필요한 교회가 고린도 교회임을 알수 있습니다.
한편 고린도 교회 보다 훨씬 전 어느 교회가 이 놀라운 축복을 먼저 받았습니다. 제가 이민교회의 모델로 삼고 있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 유대에 큰 흉년이 듭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도바울 편으로 풍성한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적인 축복을 받은 것을 물질적 축복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균등하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될수 있었던 아마 역사적 기로점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안디옥 교회도 고린도 교회도 영적인 축복을 물질적 축복으로 갚은 것입니다. 곧 두 교회는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 축복을 나눌 때 평화의 세계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집이 된 것입니다. 복음과 물질적 나눔은 뗄레야 뗄수 없는 동전의 양면인 것입니다.
이는 한국교회사에도 증명이 됩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의 최초 개신교회를 새문안 교회로 알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맞으면서 또 틀립니다. 최초의 조직 교회입니다. 조직 교회라는 것은 당회가 조직된 교회이고 당회가 조직되려면 담임목사와 함께 두 명의 장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조직교회로 황해도 소래 교회가 1885년도에 중국에서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소래 교회에 대해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소래교회는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체 건축을 완성한 것은 물론 12개 교회를 개척합니다. 아울러 다른 교회들을 돕습니다. 다음은 그대로 인용합니다.
“교회 부설 학교도 지원하는데, 관대한 교회 회원들이 수시로 땅을 기부해서 지금은 모든 학교 경비를 거의 자급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 다른 교회와 예배처소 건축을 돕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때때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마을에 전도대를 보낸다. 선교 헌금도 적립하고 있는데, 인도에 기근이 들었을 때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만행 사건 때에는 자발적으로 연보를 모아 보냈다. 인도 기근을 위한 연보만 해도 80엔이 넘었다. 이들의 수입과 하루 10센트도 안 되는 임금을 고려해 볼 때, 이 자발적인 연보를 위해서 그들은 적지 않은 희생과 고생을 감내한 것이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소래교인들이 신문에서 보고 이렇게 이미 세계 평화 헌금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소래 교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바라 보면서 또한 가난한 이웃을 바라 보면서 자기들은 넉넉한 자들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정의 평화 환경 주일인데 21세기의 평화 잇슈 중 빼어 놓을수 없는 것이 환경 잇슈라고 생각 됩니다.
얼마전 교단 소식지에 피지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졌습니다. 한 가정이 해안가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해 조금 내륙에 있는 어느 집에 손님으로 초대 받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 집에 들어 갔을 때 나의 매트가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실은 이들의 풍습은 손님이 오면 함께 같은 바닥에 매트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자 다음과 같이 느낀 것입니다.
“나는 여기 속하지 않구나.”
21세기의 풍요한 연보는 물질적 축복을 나누는 것을 넘어 함께 사는 것일줄 압니다. 함께 좁은 땅을 나누는 균등함일줄 압니다. 넉넉한 자들이 좁은 곳에 사는 자들에게 자리를 나누는 것일줄 압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공해를 막는 일에 동참하는 것일줄 압니다. 공해 방지에 대해서는 잘 아실줄 압니다. 솔직히 현재 알고 있는 것만 행해도 공해는 많이 방지될줄 압니다. 이 때 우리가 함께 사는 지구에는 새로운 평화의 세계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오늘도 마음 놓고 설 땅이 있다면 우리는 넉넉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