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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19(11/06/2022)

“무엇으로 보답할까”

본문: 시편 116:1-19

뉴욕 택시 운전사의 경험담 이야기입니다. 밤중에 전화를 받고 승객을 태우러 갔는데 어두운 슬럼가에다 인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면 그냥 차를 돌리지만 왠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어 경적을 울린 후 차에서 내려 건물로 다가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연약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참 뒤 문이 열리고 여든 살이 넘어 보이는 노부인이 작은 짐 가방을 끌고 나왔습니다. 운전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택시에 올라 탄 그녀는 찾아갈 주소를 건네며 시내를 통과해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주소지까지는 2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시내를 거쳐 가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운전사가 설명하자, 그녀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지금 노인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두 시간 동안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자신이 처녀 시절에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하고는 창문 밖으로 한참 동안 그 건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간 곳은 결혼해서 갓 신혼살림을 차린 주택가였습니다. 지금은 가구 전시장으로 바뀐, 소녀 시절 춤을 추곤 했던 무도회장 앞에서도 멈첬습니다. 건물 앞이나 네거리에 차를 세우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차 안에 앉아 밖을 응시하곤 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말합니다.

이제 가야겠어요.”

작고 허름한 요양원 앞에 직원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가 지갑을 꺼내 요금을 묻자 택시 운전사는 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그녀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를 꼭 껴안으며 말합니다.

이 늙은이가 생의 마지막 기쁜 순간들을 가질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노부인은 요양원 안으로 들어갔고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습니다. 그녀의 인생의 마지막 문이 닫히는 소리였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듣는 이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를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느끼는 교훈이 있을줄 압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의 한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새롭게 느끼게 합니다. 이 노부인은 이 사실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분은 오늘 시인이 갖고 있는 지혜를 갖고 있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15 말씀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사실 잠시 후 살펴 보겠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이 15절 말씀은 갑자기 생뚱맞게 튀어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심층 깊이 있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뚱맞게 표현한 것입니다. 문맥상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시인의 입장에서는 이 시를 쓰고 있는 동기는 바로 경건한 자들의 죽음에 동참하고 싶고 또 함께 동참하자는 멧세지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한편 이 노부인도 인생의 한계를 잘 알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멋지게 살았고 이제 멋지게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시를 지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청지기 헌신 주일 예배로 드리는데 참된 청지기는 바로 주어진 한계를 알고 그 한계 안에서 최고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에게는 두 가지 한계가 주어져 있습니다.

시간의 한계, 공간의 한계…. 공간의 한계는 물질의 한계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오늘의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최고의 청지기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12절 말씀을 가운데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1절까지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에 해당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구구절절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부터는 ‘무엇으로 보답할까’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서원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엇으로 보답할까’ 부분에서 생뚱맞게 ‘경건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한편 청지기의 삶의 시작은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시인은 시간의 한계 안에서 시간을 내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무한대의 시간을 갖고 있다면 기도의 시간이 훨씬 의미가 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4시간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한계 안에서 시간을 내서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귀한 시간을 내서 기도를 드렸는데 늘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입니다. 안 들어 주실수가 없습니다. 시간의 한계 안에 사는 자녀들의 기도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청지기의 삶의 시작입니다.

지난 주 종교개혁주일로 지켰는데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정말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주위 사람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왜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냐고….’ 그의 대답은,

바쁘기 때문에 더 많이 한다고….’

이처럼 시간의 한계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주님께서 흘려 버리실리가 없습니다. 시인은 기도의 응답을 1-8절까지 길게 고백합니다. 그중 한 절만 봉독해 드리면, 6절,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그러면 이 시인은 어떤 기도를 드렸기에 기도하는 쪽쪽 응답을 받았을까요? 아무 기도나 다 응답하실리가 없습니다.

몇 주전 말씀드렸습니다. 시편이 다섯권으로 되어 있는 이유를…. 구약에서 무엇이 다섯 권이라고 말씀드렸죠? 모세 오경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입니다. 자주 말씀드렸는데 시편은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문의 근본은 바로 모세오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서 손가락들을 서로 낀채 드리는 것처럼 기도는 바로 모세오경을 근거로 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래서 모세 오경은 다섯 권으로 구성된 시편을 통해서 꽃을 피우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근본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토대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말씀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기도응답의 비결은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고 말씀의 의거해서 시간을 내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의 한계 안에서….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팬데믹 기간 혼자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시간의 한계 안에서 아주 잘 시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훌륭한 시간의 청지기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Duke신학대학의Hauerwas 박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현대 크리스챤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성경은 혼자 읽고 배우는 것으로는 참된 깨달음을 얻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읽기와 배움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편은 모두 공동체 안에서 드리는 기도문이었습니다. 곧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배우고 읽는 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혼자 말씀을 보고 기도할 때 참 기도응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가뭄으로 인해서인지 저희 집 나팔꽃이 많이 자라지도 못하고 피지도 못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나팔꽃으로 비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를 하면 나팔꽃처럼 우리의 삶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마치 비가 오면 나팔꽃이 잘 자라듯이…. 저는 종종 나팔꽃이 제대로 담장을 타고 잘 올라가도록 나뭇가지를 대어 줍니다. 나뭇가지를 타고 담장을 만나면 그 다음에는 담장을 따라 쑥쑥 자랍니다.

어떤 경우는 나팔꽃씨가 멀리 뿌려졌는지 나뭇가지를 댈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땅바닥을 기어서 자라는 것을 봅니다. 물론 때로는 꽃도 피곤 합니다. 그러나 토끼나 사슴에 밟히기 싶상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읽고 배우지 않고 기도만 하는 신앙 생활은 땅바닥을 기면서 커가는 나팔꽃과 같습니다. 기도도 말씀도 시간의 한계 안에서 시간을 바쳐야 하는 청지기의 몫입니다. 이와 같은 청지기들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청지기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말씀과 기도의 생활은 은혜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것이 청지기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보답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어떻게 보답할까요? 13, 14절,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사실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서원도 하게 됩니다. 서원은 기도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섬기겠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입니다.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행동으로….

그런데 갑자기 말씀드린대로 생뚱맞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15절,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사실 그는 은연중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서원한 것을 행하는 삶의 소중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답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귀중히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보답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삶이 청지기의 삶이요 이들을 시인은 경건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간의 한계 가운데 사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청지기로서 어떤 결단으로 남은 평생을 살까요? 17-19절,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당연히 평생 서원한 것을 지키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두 증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두번째로는 ‘예루살렘아.” ‘그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을 두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왜 두 증인을 내세우고 있을까요? 이 두 증인들은 모세오경의 완성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로 부터 시작한 인류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단 이스라엘 민족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곧 그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증인 내지 증거라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서원한 것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예가 야곱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서원합니다. 창세기 28: 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러한 서원을 한 청지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후에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뤄 이김). 이 이름을 토대로 위대한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서원을 행하다가 세상을 떠나지만….

시인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서원한 자들의 삶을 그냥 죽음으로 마치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 후에 위대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입니다.

“경건한 자의 죽음은….”

경건한 자의 죽음은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이고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죽음을 존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제가 천국환송예배시 종종 인용하는 빅터 유고의 글이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나는 시와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역사, 철학, 드라//며, 소설, 노래등 모든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안에 있는 것의 천분의 일도 꺼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무덤으로 내려 갈 때 다른 사람들 처럼 말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일을 마쳤노라’.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마쳤노라’라고는 말하지 못 할 것입니다. 나의 일은 그 다음 날 아침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무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닙니다. 또다른 통로입니다. 저녁에 닫히지만 새벽에 열립니다.”

(“For half a century I have been writing my thoughts in prose and in verse; history, philosophy, drama, romance, tradition, satire, ode, and songs; I have tried all. But I feel I have not said the thousandth part of what is in me. When I go down to the grave I can say like many others- ‘I have finished my day’s work.” But I cannot say, ‘I have finished my life’. My day’s work will begin again the next morning. The tomb is not a blind alley: it is a thoroughfare. It closes on the twilight, it opens on the dawn.”- Victor Hugo (1802-1885))

경건한 자 아니 청지기의 삶의 한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청지기의 죽음은 막다른 골목이 아닙니다. 단지 통로입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것들이 놀랍게 피어나게 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에게는 모세 오경뿐이 아니고 신구약 69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서원은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루살렘성을 통해 완성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러므로 청지기의 삶은 땅의 삶을 하늘의 삶으로 연결시키는 삶입니다. 청지기들은 주어진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바꾸는 magician들입니다. 주어진 물질에게 영원성을 입히는 기적의 사람들입니다. 곧 청지기들은 시간의 한계 물질의 한계가 없어질 곳을 바라보며 시간의 한계 물질의 한계 안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청지기들이 서원을 갚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허봉기 목사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따님이 9학년부터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힘들게 일해 몇 푼 받은 것에서 세금과 십일조를 떼는 게 안쓰러웠는지 엄마가 물었다고 합니다.

아깝지 않아?” 딸이 시큰둥하게 말합니다.

내꺼 아니잖아.”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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