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저희 교회에 은퇴장로님들이 모여서 줌으로 매달 교제를 나누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리시고 계십니다. 이 시간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매번 모임 소식을 보내오시는데 어느 장로님의 간증이 마음 깊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록된 것을 읽고 소개해드리니 처음 말씀하실 때와 조금은 차이가 날지 모르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먼저 ‘호사유피 인사유명 (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금언(격언)으로 시작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남기려 애쓰기에 도리어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금언을 신앙인의 입장으로 조금 바꾸어 보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신앙인들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남긴다”라고 바꾸는게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특유한 위트로, 노인(남성)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부인한테 “눈을 떠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로님은 요즘 밤에 침대에 누울때, 가끔 “내일 아침에 눈을 뜰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하시지만…, 아침에 눈을 뜬다는건, 부인한테 사과하기전, “아!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사명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살게 하소서” 라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길 원하신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장로님의 간증 요약 글을 읽고 ‘호사유피 인사유명’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마지막 ‘명’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남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 남기는 축복을 누릴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오늘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아 계속 주님의 비유를 나눕니다. 오늘은 너무도 잘 알려진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바닷가에서 주님께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님은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앉거나 서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3절,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이제 사람들은 상상합니다. 농부들은 자신의 씨뿌리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는 농경사회이니 대부분이 농부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 아니면 가족이 씨뿌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4절,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이 말씀을 듣고 청중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뭐, 길 가에 떨어져…? 농부가 아마 남의 집 농사를 하는 사람인가 보네. 씨를 잘 뿌려야지….” 그래도 진짜 농부는 이해합니다. 이 당시는 길 가에도 씨앗을 뿌린 후 나중에 경작을 합니다. 그래서 옥토로 후에 바꾸는 것입니다. 진짜 농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넘어 갑니다.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5절,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한편으로는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됩니다. 사실 이 당시는 말씀드린대로 봄에 밭을 갈 때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밭을 갈면 옥토가 됩니다. 그런데 옥토가 된 후에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후 경작을 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씨를 뿌린 후 경작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니면 씨를 뿌릴 때 너무 멀리 떨어진 씨일 경우입니다. 하여튼 씨를 뿌린 곳은 경작을 했어야죠. 귀한 씨를 낭비한 것입니다.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이 것도 가시떨기에 씨를 뿌린 후 경작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여튼 꾹 참고 듣습니다.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이제야 한숨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좋은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진짜 농부이지….”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지난 후 봄에 씨를 뿌릴 때는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씨를 뿌린 후 경작을 합니다. 곧 농부가 가는 곳이 옥토가 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 보기에는 한편으로는 게으른 농부라고 평할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잘 해도 이렇게 다른 곳에 떨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 한 이야기인데 과연 주님은 무슨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청중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다 아셨던 것 같습니다. 9절,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결국 오늘 본문 말씀 다음 절인 10절 말씀을 보면 오늘의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도저히 농경사회에 익숙한 청중들도 주님의 말씀에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를 왜 하시나?’ 그래서 tutoring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차분하게 설명하십니다. 길 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탄이 와서 즉시 말씀을 빼앗은 것이고….
금방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게으른 농부처럼 보이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은 실제로 말씀을 듣는데 게으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함임을…. 주님께서 꾸며낸 fiction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궁금해서 한번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설교나 강의를 듣고 나면 얼마나 오래 기억을 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자료 하나를 보았습니다. 10분 강의를 들은 후 금방은 약 50%, 오늘 예배 마치고 교제를 나누시면서는 그래도 50%는 기억이 난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곧 내일은 25%. 일주일 후는 10%.
얼마전 이 지역 교역자 모임에서 어느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제 마음에 와 닿아서 필기를 하였습니다. 몇 주 지나서 제가 좋아 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데 생각이 안 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 난 것은 그 날 말씀이 좋아서 받은 주보에다가 적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주보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말씀이 좋았다 생각했지만 1 주일을 넘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90%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10%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16절에 나온 주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기쁨으로 받은 것은 1주일은 넘기지만 이 말씀도 다음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환난과 박해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이 돌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한편 환난과 박해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박해가 끝난 후 더 무서운 것이 닥칩니다. 결국 교황청은 돈을 벌어드리기에 혈안이 됩니다. 평안한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유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20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밭을 넘겼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해석을 들으면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한 그룹은 주님께서 설명하신 그대로만 이해하는 그룹입니다. 말씀이 떨어지는 곳은 네 곳인데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라진다는 내용으로 듣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여기까지 깨닫고 만족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자신을 책망도 합니다. 우리들의 게으름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사로 잡히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책감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체험하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도리어 더 천국과 멀어지게 하면 했지….
그런데 주님과 신경동조화(neural coupling)이 일어나는 사람들은 이 이해를 초월해서 주님의 해석의 말씀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늘 자신이 봄마다 경작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밭을 갈아서 옥토로 만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런데 어느덧 이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으로 닥아옵니다. 우리들의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밭과 같은 인생의 밭을 늘 옥토로 바꾸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깨닫습니다. ‘내 삶이 돌밭이라도 이는 옥토로 변할수가 있구나. 그리고 열매는 30배 60배 100배가 될수 있구나!’
사실 비유의 주인공은 게으른 농부의 모습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게으른 자들은 바로 청중 자신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참 농부 되시는 주님을 바라 볼 때 그 어디도 옥토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옥토입니다. 하나님이 농부이시니…. 여기서 사도바울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린도전서 3: 9절,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밭이기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 많은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께서 고린도라는 길가와 고린도라는 돌밭과 고린도라는 가시덤불을 옥토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밭에 싸인이 붙어 있다면 ‘30, 60, 100’입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남아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30, 60, 100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계산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계산합니다. 30, 60, 90…. 그러나 천국 이야기는 다릅니다. 30, 60, 100…. 그 다음 숫자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아니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이것이 옥토에 뿌려진 씨앗이 누리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주석책에 의하면 재미있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복음서에는 육십, 120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도마는 60, 120, 240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인데 이것 때문에 도마 복음서는 복음서에 들어가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옥토에 뿌려졌을 때 그 씨앗은 우리들의 계산을 초월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한편 이러한 천국의 이야기를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누군가는 값을 치루셔야 했습니다.
요즘 한류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줄 압니다. K-pop, K-drama, K-Food, 요즘은 K- Classic까지….
약 20년 전부터 한류가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실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세종대왕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종은 몸이 무척 약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 기록만 해도 100 여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다음은 소설에 나온 이야기이지만 이런 고통 가운데서 세종은 말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염려하지 않는다. 지금의 백성이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음 또한 서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일은 지금 나에게 맡겨진 백성을 염려하는 것일뿐….”
오늘 한류가 전세계를 덮는 이유는 세종이 고통 가운데서도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였기 때문임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일들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외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9: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영어로는,
“It is finished.”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게 되는 천국이 완성되었음을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세계가 이제 온 인류에게 환히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산다면 우리들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천국의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는 삶은 바로 오늘 하루의 나의 삶을 통해서 30, 60, 100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항상 30, 60, 100이라는 싸인이 새겨집니다.
사람의 이름이 있는 곳은 ‘30, 60, 90’,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은 ‘30, 60, 100’….
한류를 뛰어 넘어 펼쳐지는 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LA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쓴 글에 정신여고 학생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한 것 같습니다. 오래 전 15명의 단원이 인솔자와 함께 LA를 방문왔습니다. 학생들은 연주를 마친 후 이동을 위해 차를 탈 시간만 되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그 모습을 보고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으로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는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개이고 세 명은 좌석에 앉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차에 먼저 타려는 것은 좌석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닥에 엎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밴을 선물로 사주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30배 60배 100배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땅을 옥토로 바꾸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축복의 삶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분들에게…. 한류는 언젠가 사라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꽃 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의 싸인은 30, 60, 100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얼마전 재미있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올해말에 Vulcan이라는 로켓트가 우주로 날아가는데 그 로켓트는 우주 공간에서 유명인사들의 DNA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곧 이들의 이름을 온 우주에 남긴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미 대통령, George Washington, Eisenhower, John F Kennedy, Ronald Reagan, 그리고 star trek을 만든 제작진과 배우들의 DNA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공헌으로 오늘 우주 시대가 온 것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들이 남긴 세상은 30, 60, 90.
그런데 그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남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의 삶은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들의 삶은 온 우주를 넘어 영원한 세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려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다 지신 후 마지막으로 외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로서 우리들이 서 있는 바로 그 땅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천국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까지….
남은 사순절 기간 우리들의 삶을 좋은 땅이 되도록 경작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참회의 기도와 절제와 구제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십시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