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문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질문합니다.
“토라(율법)는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말하나요? 왜 이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나요?” 랍비가 답합니다.
“우리가 현재 그러한 것처럼,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 꼭대기에 둔다. 그리고 말씀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
처음 들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후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처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이유는 제자의 질문에 있습니다. ‘율법은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했다’는 전제를 갖고 질문하고 있는데, 사실 율법은 말씀을 머리 위에 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신명기 6: 6절 말씀에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처럼 율법은 처음부터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하셨지 마음 위에 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해석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둘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마음 위에 놓으면 언젠가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유대 경건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잘 못 해석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율법을 마음 위에 둘 때 언젠가 마음 속으로 내려와 머무르게 됨을 경건의 삶 가운데서 체험하고 율법을 풀이한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율법교사라는 것은 법률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법률가로서 율법에 대해서는 평신도와 다름 없는 예수라는 청년에게 시험하려고 묻는 것입니다. 25절 하반절,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에 주님은 법률가에게 되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위엄에 압도되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엽니다. 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법률가는 법률가답게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28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라는 청년이 평신도이지만 그래도 대화가 통하고 자신의 율법관이 통하니 좀 신이 난 것 같습니다. 조금 오바하기 시작합니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신이 율법대로 잘 살고 있음을 자랑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주님은 당신의 특유한 화법인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율법교사만 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와 함께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비유를 베푸십니다. 30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당연히 이를 듣는 청중은 주먹을 불끈 쥡니다. “어떻게 이런 나쁜 놈이 있을수 있을까”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오고 갑니다. ‘분명 멀리서 스며 들어 온 이방인들일꺼야…’ 절대로 같은 동족 유대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31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청중들은 예수의 말을 들으면서 특히 그동안 늘 제도화된 종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귀가 솔깃합니다. 실은 예수님 당시는 제사장들이 아주 타락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역시 제사장들은 위선자였어….”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32절,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이 청년이 마음에 듭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율법교사는 생각합니다.
“맞어 요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율법도 모르는 자들이지 그러니 그냥 지나칠수밖에….” 일반인들도 기대를 합니다. ‘과연 누가 강도 만난 자를 구할까…?’ 33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실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옵니다. ‘어떤’이라는 단어는 실은 뒤 따라 나옵니다. 먼저 “사마리아인” 하고 외칩니다.
청중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청중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평신도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게 될 것을…. 물론 율법교사는 은근히 ‘율법교사’가 언급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정신을 잃고 있는데…,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 사마리아인이 정성껏 치료한 후 주막까지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방인 보다도 못한 사마리아인이…. 더 이상 듣기 싫어서 자리를 뜰까 말까 하는데…, 35절,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두 데나리온은 이틀치 급료입니다. 두 데나리온을 줄뿐 아니라 다시 돌아오는 길에 들려서 비용이 더 들면 그것도 내 주겠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와 청중은 모두 정신을 잃고 듣습니다. 이 때 허를 찌릅니다.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주님은 잠시 기분이 언짢으셨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셋 중에 누구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웬지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살짝 바꿉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셨겠지만 그냥 넘어 갑니다. 청중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이야기는 그 후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갑니다. 듣는 이들마다 또 이를 듣고 전하는 이마다 자기 나름대로 이 비유를 해석합니다. 이제는 누가의 손에 의해 누가복음에 실려져서 우리들에게까지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닥아 옵니까?
이 이야기를 오래 되씹어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첫번째로는 율법교사는 주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에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를 마친 후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내 이웃이 누구이냐’는 질문에 주님은 질문을 바꾸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은 자신을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해서 결국 내가 옳게 보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질문입니다.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질문은 이래야 합니다.
“저 사람의 이웃은 누구일까?”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그의 마음 속의 질문은 율법교사의 질문과 달랐습니다.
“저 사람의 이웃은 누구일까?”
어느덧 그는 그의 손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마리아인은 상상할수 없는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이유는 당연히 그의 마음의 질문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마리아인이 자기가 갖고 있는 전부를 내어주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도저히 법률가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자비를 베푸는 모습입니다. 청중들도 혀를 내 두릅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있을까?”
결국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 비유를 들으면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사마리아인을 높여도 너무나 분에 넘치게 높이는 예수에 대해 분노가 생깁니다. 결과적으로 애꿎은 사마리아인들이 더 미워집니다. 그러나 한 그룹은 자기들을 사마리아인 보다도 못한 자들이라고 멧세지를 주는 예수의 말씀을 귀담아 듣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마음이 상하면 상할수록 새로운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처음 유대문학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왜 유대 랍비들이 그렇게 율법을 해석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랍비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말씀을 마음 위에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깨졌을 때 말씀이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 옵니다. 결국 사마리아인들이 더 귀하게 보입니다. 특히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여관에 맡기고는 다시 돌아 와서 나머지 치료비도 다 대겠다는 말에 큰 감동이 옵니다. 마음이 깨지지 않은 사람들은 도리어 분노하는데…. 그러면서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엄청난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었을까?’
저는 얼마전 접한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파스칼의 글에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역설적인가를 깨달으라! 무력한 이성이여, 머리 숙이라. 어리석은 자연이여, 침묵하라. 인간이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배우라. 그리하여 그대들이 모르는 자신의 참된 신분을 그대들의 주에게서 배우라. 신의 말씀을 들으라.”
파스칼은 주장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인간을 보고 있다는 것을…. 마음이 깨지기 전에는 선입견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늘 분노합니다. 반면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인간이 무한히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배우라.”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 보다 이웃은 훨씬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기가막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형상임을 믿을 뿐입니다. 곧 겸손히 모든 이웃 안에 있는 우리가 헤아릴수 없는 위대함이 있음을 믿고 이웃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은 스스로 깨어짐을 경험한 자들이 선입견에서 해방되었을 때 찾아 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모습의 소유자로 사마리아인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서 이웃을 섬겼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너무 귀하니 말입니다. 강도 만난 이웃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천국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영락교회를 다녔습니다. 회장도 했고, 회장을 마친 후 계속 선배로서 성경공부 리더 등 여러모로 섬겼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수양회가 있습니다. 저녁 집회도 다 마쳤지만 은혜를 사모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기도도 하고 간증도 그룹 별로 하게 되었습니다. 후배가 열심히 자기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또래 선배들은 슬슬 자리를 피해서 혼자 기도 하러 가던가 아니면 말씀에 대해서 나누는 그룹으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연고인지 후배의 간증을 끝까지 듣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성경지식도 부족해서 좀 엉뚱한 이야기도 하였지만 저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하기로 했고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저 혼자 기도를 드리는데 엄청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후배의 어떤 간증 내용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후배의 어수룩한 간증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큰 은혜를 주셨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깨뜨렸을 때 말씀의 은혜가 저에게 임한 것이라고 저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후배 앞에 저는 겸손히 무릎을 꿇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부활후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계속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착각은 금물입니다. 부활절 예배만 드리면 우리가 마치 주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자가 되었다고 착각하시기 쉽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리가 사마리아인처럼 깨어진 자가 되어 이웃의 위대함을 경외할 때 비로소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 안으로 들어 오실줄 압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처럼 온전하게 된 후에 우리 안에 들어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평생 주님은 우리들 안에 들어 오시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부활의 빛을 찌그러진 우리들 안에서 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지난 사순절의 시간을 모두 은혜롭게 보내셨을줄 압니다. 사순절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은 위대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깨어진 사마리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찌그러진 그릇 안에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우리 모두는 무한히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신학교 때 사귄 백인 친구가 있습니다. 실은 작년에 보스톤을 방문 와서 좋은 시간을 나눴고 저희 청년 1, 2부 금요집회에 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현재 중동지방에서 졸업 후 거의 30년 이상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중동지방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부인도 암이 걸렸고 자녀 중에서 선천성 당뇨환자도 있고 정말 맨 정신으로는 선교를 계속 할수가 없는데 계속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또 이멜을 받아 보았습니다. 부인은 양쪽 손을 다 다쳐서 brace를 끼고 있다고 하고 본인은 뒤로 넘어져서 침대에 한 동안 누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은 작년 여름에 왔을 때 반가우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한 이유는 그래도 친구는 건강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또 깜짝 놀라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미국에 와서 건강 진단을 했는데 못 고치는 피붓병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죽을 병은 아니지만 먼 타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에는 또 다른 악재였습니다.
그런데 입에 붙어 있는 말이 있었습니다.
“God is good. God is good.”
한편 친구의 모습에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론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삶은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진심으로 중동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것 이외에는…. 친구는 중동인들 앞에 무릎을 꿇었기에 중동 선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무한히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친구는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게 해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8: 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선교는 사마리아인이 되어 부활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이성을 무한히 넘어선 위대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존경할 때 어느덧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은 사마리아인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 때 부활의 주님의 영광을 온 인류에 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질문하곤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주님은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