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의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잠언시가 있습니다.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신발 뒷굽이 닳아 있는 걸 보면
그는 자주 참회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들에 대해 아파하는 걸 보면
그는 나귀를 닮은 사람이다 자신의 고독 정도는 자신이 이겨내는 걸 보면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많은 흉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원래 13행으로 된 시입니다. 그중 네 행만 소개해드렸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리는데 저희 어린이들이 이런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아홉 가지의 모습도 모두 읽어 보시면 정말로 최고의 좋은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시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모습입니다.
저희 교회와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뿐 아니라 모든 이웃 아니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어린이들이 이런 멋진 모습의 소유자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저희 어린이들이 이런 훌륭한 사람 아니 ‘좋은 사람’으로 자라날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떻게 보면 나쁜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비유로 읽혀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은혜롭게 우리가 읽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도덕 교과서에도 들어갈수 없는듯한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런 비유의 말씀을 오늘 어린이 주일 설교 본문으로 정하였을까요? 천천히 상고해 보겠습니다.
삼주만에 비유를 본문으로 말씀을 드리니…, 비유의 특징 두 가지를 다시 말씀드리면, 비유는 늘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제일 적합한 문학 쟝르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읽을 때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청중이 소개되어집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청중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나눈 말씀인데 바로 전장인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15장에 나오는 청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물론 죄인과 세리들도 함께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청중의 일부였구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님은 잃은 양과 잃은 동전 그리고 잃은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죄인들을 찾으러 오셨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마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들려 주시고 싶은 말씀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이 엿들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님은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듣던 말던 제자들에게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제 말씀하시려는 것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그리 하시지 않으셨나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건성으로 들으면 당연히 오해할수 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함께 살펴 볼까요?
일단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청지기가 있는데 좋지 않은 소문이 주인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청중은 기대합니다. 과연 주인이 어떻게 처리할까? 2절,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중은 생각합니다. “올 것이 왔구나.”
지난 주 심포지움에 총회 연금국 직원도 오셨었습니다.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연금국 일이 어떠냐고 했더니, 일반 직장 보다 더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쉽지 않다고 하면서, 특히 부정직한 일이 발견되면 당장 fire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녁에 전화를 걸어서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하고 책상에 있는 짐은 싸서 우편으로 부쳐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늘 말씀을 보니 주인의 모습이 한편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는데 주인은 마지막 정산까지 하라고 시간을 며칠 더 주고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있을수 없는 혜택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비로운 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무슨 일을 또 할지 모르는데 다시 시간을 주니 말입니다. 그러면 이에 남은 시간으로 어떻게 하죠? 3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에 청중은 생각할 것입니다. ‘아, 그러면 길은 하나뿐이겠군, 주인에게 엎드려 빌겠군.” 4절,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청중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이 친구가 옛 습관을 못 버리나 보군….” 초조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5절,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더욱 초조해 집니다. “아니 어쩔려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데, 이 친구를 두고 한 말이네….” 6절,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완전히 공문서 위조에다가 사기 행각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 사람에게는 밀 백 석인데 팔십이라 쓰라고 합니다. 이 친구는 그냥 fire가 아닙니다. 감옥에 갈 짓을 하고 있습니다. 청중은 당연히 경찰을 부르겠지 생각합니다. 8절 상반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가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청중은 정신을 잃습니다. 주인에게 도리어 칭찬을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았으니 계속 일을 할수 있는 길도 열린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 청지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청중의 상상에 맡깁니다.
확실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입에서 스스로 모순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를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말씀하시고는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했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옳지 않음과 지혜는 공존할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중은 헷갈립니다. 그런데 말씀드린대로 청중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엿듣고 비웃었지만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가슴 속 깊게 간직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 갑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이 비유의 참 뜻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류시화 시인의 시의 제목은 ‘그는 좋은 사람이다’였습니다. 반면 오늘의 비유의 제목은 당연히 ‘옳지 않은 청지기’입니다. 만일 류시화 시인이 오늘의 비유를 접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도 궁금합니다.
류시화 시인이 그리는 좋은 사람들은 모두 행함도 생각도 지혜로와 보이는 자들입니다. 반면 주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저는 칸트의 말을 통해서 이 딜레마를 넘어 놀라운 천국의 세계를 그려 볼수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의 철학이 담겨져 있기에 그의 묘비에 다음의 글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가슴을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빛나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칸트는 두 가지의 세계를 누리면서 언제나 놀라움과 경외감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빛나는 자연 세계 특별히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었습니다. 옛날 과학이 덜 발달된 시대에 살아도 이처럼 자연 세계로 인해 놀라움과 경외감 가운데 살았더라면 요즘 살았더면 어떠했을까요?
두 번째는 마음 속의 도덕법칙입니다. ‘성경에 나온 도덕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마음 속의 도덕법칙’이라고 했을까요? 그는 독실한 기독교 철학가였습니다.
저는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칸트의 ‘마음 속의 도덕 법칙’의 뿌리를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특히 구약에 많은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율법들은 칸트에게 놀라움과 경외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한 때로는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하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게 된 ‘마음 속의 도덕 법칙’으로 인해서 놀라움과 경외감을 느끼곤 한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칸트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마음 속의 도덕 법칙’은 칸트는 율법에서 찾고 경험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만난 세계였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 비유가 뛰어난 도덕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실은 옳지 않은 청지기로 인해 주인은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은 자들 안에 지혜를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주인은 당신에게 직접 피해를 준 자 안에 지혜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세상이 가르치는 도덕의 세계와는 비교도 안되는 도덕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만날 때 놀라움과 경외감을 느낄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고의 청지기의 삶의 시작이 아닐까요?
그러면 이 놀라운 도덕 법칙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체험할수 있을까요? 물론 우선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찾아 봐야 할줄 압니다. 그들은 이 질문을 마음 속 깊게 간직하고 여러 가지 궁금증을 안고 주님을 따랐을줄 압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궁금증을 안고 당신을 따라 오는 제자들에게 어떤 교육을 하죠? 누가복음 10: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과 지혜가 섞여 있는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것이 아닐까요? 이럴 때 칸트가 체험한 놀라운 도덕의 세계를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 관념은 의로운 청지기가 지혜로운 청지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불의한 청지기 안에 놀라운 삶의 지혜가 담겨져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들은 칸트의 놀라운 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일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시를 쓰신다면 바로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라고 쓰시지 않으실까요?
어린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모습 곧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과 지혜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들의 신비입니다. 아이들의 신비한 모습을 경탄할 때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 인하여 경탄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실 모든 어른들 안에는 어린이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기적인 모습과 지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경탄의 대상입니다.
한편 어린 아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Steve Maraboli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The best way to love someone is not to change them, but instead, help them reveal the greatest version of themselves.” – Steve Maraboli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최고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어린이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저희 어린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주시려는 귀한 세계가 있습니다. 한 어린이 어린이마다 세상을 위한 선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가 꽃 피울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십시다.
저희 교회의 표어 중에 YPK가 있습니다. 세 사람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Y는 연변의 명동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입니다.
P는 성경의 인물인 사도바울입니다.
K는 미국 아틀란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모두 이민 교회에서 자란 분들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세계를 꽃 피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위해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인물인 마틴 루터 킹의 어릴 때 일입니다. 6살이 되자 그동안 잘 놀던 백인 친구가 더 이상 같이 놀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마틴이 울면서 집으로 들어 옵니다. 할머니에게 백인 친구가 더 이상 같이 놀수 없다는 말을 전하자, 할머니는 모든 역사를 설명한 후 마틴에게 말합니다.
“You are somebody.” (너는 귀한 사람이야.)
할머니의 말씀으로 인해 마틴 루터 킹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되어 갑니다.
한편 마틴 루터 킹의 어릴 때 모습을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도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항상 저녁 식사 시간에는 성경암송을 한 구절씩 돌아 가면서 하였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제일 자주 암송했던 성경귀절은 바로 요한복음 11: 35절,
한글로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이지만 영어로는 “Jesus wept.” 딱 두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지혜로운 마음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의 한 마디가 그에게 담겨져 있는 지혜가 꽃피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몰래 형이 아기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져온 멧세지가 뭐야…?”
형은 갓 태어난 동생이 하늘 나라에서 세상사람들을 위해 귀한 멧세지를 안고 태어났다고 믿은 것입니다.
형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칸트 처럼 놀라운 ‘마음 속의 도덕 법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 어린이는 주님의 비유를 온전히 이해한 지혜로운 아이인 것입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로 말씀을 거두겠습니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이라는 시에 한 연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또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누가복음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