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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남으리라” 열왕기하 4:42-44 (10/01/2023)

1532년 11월 16일 역사에 길이 남는 전쟁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집니다. 스페인 군대 168명과 페루 원주민 군대 8만명이 격돌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스페인 군인 168명과 페루 원주민 군인 8만 명이 맞붙었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그 당시는 대형무기도 없던 때인데도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대승을 거둡니다. 페루 원주민 왕은 체포되고 왕에게 저희 교회 팔러와 같은 크기의 방 22개를 금으로 채우면 살려 준다고 약속합니다. 물론 다 채웁니다. 살려 주었을까요? 죽입니다.

 

상세히 다 말씀드릴수는 없고, 전투가 시작되는 장면만 말씀드립니다. 먼저 스페인 부대장은 카톨릭 신부를 원주민 왕에게 보냅니다. 왕은 수만 명의 자기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신부의 한 손에는 십자가 다른 한 손에는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신부는 원주민 왕에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이처럼 너에게도 가르치러 왔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책에 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들의 친구가 되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당신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내줍니다. 물론 왕은 성경을 던져 버립니다. 이 때 신부는 돌아 와서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나오라 나오라! 기독교인들이여! 개와 같은 적들을 쳐 부수라. 나의 거룩한 책을 땅에 던졌다. 그들을 향해 돌진하라. 내가 너희들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스페인 부대는 성경에 나오는 기드온에게 배운 전술을 사용합니다. 물론 기드온은 3백 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찔렀지만 스페인 군대는 168명으로 8만 명을 무찌릅니다. 기드온 처럼 트럼펫과 함께 기마병을 사용하며 8만 명 중 7천 명의 원주민 군인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미대륙의 찬탈을 시작합니다. 한편 이 모든 배후에는 기독교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1452년 교황 Nicholas V가 Doctrine of Discovery(발견의 교리)를 공포합니다. 이 교리는 원주민들을 죽이고 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리를 등에 없고 콜롬버스는 1492년 미대륙을 발견하게 됩니다. 곧 Doctrine of Discovery가 선포된지 40년 후입니다. 그리고 또 40년이 지나서 조금 전 말씀드린 페루 원주민 대량 학살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후 전 세계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됩니다.

 

저희 교단 웹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세기에 공포된 발견의 교리는 19세기 미국 법에 들어 오게 되었다. 1823년 대법원이 Johnson vs. McIntosh케이스에서 유럽국가들은 미대륙을 발견함으로 이 땅의 주권을 갖게 된다고 판결하였고, 원주민들은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잃은 것이고 단지 땅을 소유할 수만 있다고 하였다. 한편 2005년에는 이 판결을 근거로 City of Sherrill vs. Oneida Indian Nation of New York케이스를 결론지었다. 미 대법원 판결 결과 전 세계의 원주민들의 학살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시작되었지만 19세기에는 미 대법원, 그리고 최근 21세기의 결정으로 인해 온 세계는 계속 피비린내가 나게 하는 길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저희 교단 웹사이트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단이 이런 글을 올려 놓을수 있었던 계기도 있습니다. 제가  2016년도 총회에 노회 총대로 참가했었는데 바로 제가 참가했던 이 총회에서 저희 교단은 비로소 ‘발견의 교리’는 잘못된 교리라고 선언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불과 7년 전 일입니다.

 

그러면 궁금하시죠? 다른 교단은 언제 어떻게 했을까? 메인 라인 교단 중에서 제일 먼저는 2009년 성공회가 앞장 섭니다. 그리고 2013년에 회중교회인 UCC(United Church of Christ) 그리고 2016년도에 저희 교단과 함께 루터란 교회, 그리고 2018년에 UMC(연합감리교)가 동참합니다. 한편 아쉬운 것은 보수 교단에서는 아직 한 교단도 동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교회보다 이런 것에는 세상이 더 앞서 갑니다. 대표적으로 UN은 2007년 이 교리를 반박하는 성명을 냅니다. 물론 또 아쉬운 것은 이 때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원주민이 많이 사는 나라는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후에는 다시 동참했다고는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줄 압니다. 이 교리를 시작한 천주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행히 올해 3월 30일 곧 571년만에 로마 교황청은 이 교리를 철회합니다. 그러나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갔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게 만든 이 교리는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흘린 피와 또 지금도 계속되는 인종차별로 인한 상처와 아픔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 인종차별의 부조리가 뿌리 깊게 내려진 것도 바로 이 교리로 인한 것입니다.

 

거의 600년간 이 교리가 세상을 지배하였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요?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편 그래도 감사한 것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철회가 되었고 오늘 전 세계는 철회된 후 첫 세계 성찬 주일을 지키게 되었고 저희 교회는 정의·평화·환경 주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남은 시간 왜 교회가 이런 교리를 만들어서 약자들을 찬탈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할지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엘리사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실 기적을 미리 보여준 선지자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예수님처럼 엘리사에게도 많은 제자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42절,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제자 수가 얼마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라고 합니다. 하여튼 주님의 오병이어의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43절 상반절,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제자가 백 명씩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보리떡 이십 개면 기껏해야 서너 명이면 다 없어질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43절 하반절,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말씀대로 먹고 남았습니다.

 

이 기적을 주님께서는 최소한 두 번 공생애 기간에 행하십니다. 한번은 그야말로 오병이어, 장정만 5천 명 이상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습니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7병2어로 4천 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주님께서 왜 두 번씩이나 이런 기적을 펼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 오병이어는 엘리사의 기적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적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기적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번째 기적은 이 하나님의 기적은 엘리사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는 기적임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는 계산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리떡 이십 개로 백 명이 먹을수 있고, 그 뿐 아니라 남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먹고 남으리라.”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이 당시 백 명이면 아주 큰 무리입니다. 그것도 제자가 백 명입니다. 이 백 명으로 약한 자들의 것을 충분히 갈취해 올수 있습니다. 처음 스페인 군대 숫자가 168명이었습니다. 그만한 숫자가 8만 명을 무찔렀는데 엘리사의 제자 백 명도 충분히 남의 것을 빼앗아 올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서너 명이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손에 들고 축복하면서 고백합니다.

“먹고 남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왜 우리가 오늘 온 세계가 피비린내나는 세상이 되었는지, 그것은 기독교인들 입에서 이 고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70주년 기념 첫 행사로 심포지움을 열었습니다. 주제가 ‘Two tales of A City upon a Hill’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도시의 두 이야기’인데, ‘언덕 위에 도시’는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 세운 기독교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 도시에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밝은 면, 곧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두운 면 곧 ‘발견의 교리’를 따라 세상을 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특히 미국 선교사 사진전을 통해서 밝은 이야기를 소개하였고 늘 로비를 지날 때마다 희생적으로 저희 민족을 섬긴 선교사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조선 땅에 와서 “먹고 남으리라”를 외친 분들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글은 두번째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1920년 일본인 이민 교회를 섬겼던 후쿠시마 목사님의 글입니다.

 

“우리가 선교사들을 통해 배운 종교가 미국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민 배제법 안에서 명백해졌다. 이제 우리는 미국의 심장에 있는 정신이라는 자유, 정의, 평등이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내가 미국에 오기 전 나는 이곳이 에덴동산이고 낙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목도한 기독교 미국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이상을 깨뜨렸다. 미국적 삶과 이상, 생활방식에 적응하고 동화하려고 노력하는 일본인들의 면전에 미국인들은 일본인 차별법들을 통과시켰다. 이제 우리는 미국에 정의란 게 남아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일본인 목사님은 일본에 온 선교사들을 통해 “먹고 남으리라”의 노래를 듣고 왔는데 와 보니 그 노래는 온데간데 없고 이 넓은 땅에서 도리어 “없다. 좁다. 나가라”의 함성만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시작은 사실 ‘언덕 위의 도시’가 아니라 1452년 로마 교황청에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교황청은 자기들 수하에 있는 제자들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발견의 교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를 가서 땅을 차지하면 그것은 모두 너희 것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예견하신 주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오병이어의 사건을 펼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엘리사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수백 배로 만들어 주는 자가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고백입니다.

“먹고 남으리라.” 이 때 평화는 찾아 옵니다.

 

이 고백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그동안 디모데후서 강해를 해왔는데,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전서 6: 7-8,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간간히 들어 오는 음식과 친지들이 보내주는 선물들을 보면서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먹고 남으리라.”

 

한편 다시 일본 목사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분이 후에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던지 아니면 이곳에 그대로 남았던지….

만일 그가 미국 땅에 남아서 사도바울의 삶을 본받았으면 어떠했을까요?

 

발견의 교리로 인해 깊은 상처 가운데 있는 일본인들과 또한 일본인들을 상처 주는 백인들에게 아름다운 치료의 향기를 발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일본 목사님을 미국 땅에 보내신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또한 우리를 미국 땅에 보내신 이유가 아닐까요?

“먹고 남으리라.”

 

저는 감히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일본 목사님과 교인들이 숨어서 이런 고백을 했더라면 20년 후 세계 2차대전도 일어나지 않을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골방에서 하는 고백이 세상 역사의 곡선을 정의 쪽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먹고 남으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Jeanne Lohmann의 ‘기원(Invocation)’이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숨결을 타고 날아가는 깃털

그것이 거룩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소서.”

 

믿는 우리들 손에 두 가지가 들려져 있습니다.

십자가와 성경.

 

주님은 우리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룩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을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십자가와 성경이 이 고백을 만날 때, 온 세상에는 평화가 다시 찾아 올 것입니다.

“먹고 남으리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먹고 남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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