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신부가 유대교인을 개종시켰습니다. 신부는 개종한 유대교인에게 하루에 세 번씩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유대교인이었으나 지금은 가톨릭교인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세번씩 외쳤습니다. 신부는 그의 신앙을 체크해 보기 위해서 일부러 금요일을 택하여 심방했습니다. 가톨릭 교인들은 금요일에는 고기를 안 먹으니 아마도 겸사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아니나 다를까 닭고기를 프라이팬에 튀기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말합니다.
“당신은 분명히 금요일에는 닭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텐데요.”
“알구 말구요. 신부님. 저는 프라이 팬에 닭고기를 넣고 물을 붓고는 이렇게 말했는데요.”
“나는 닭고기였으나 지금은 생선이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톨릭교인이 되어서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손해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주님께서 돌아 가신 금요일에는 좋아하는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그 좋은 머리로 기가 막힌 생각을 해 낸 것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영생도 얻고 이 땅에서 재미도 보고….
늘 부활절 설교 서두에 나누어 왔습니다. 루터교에서는 부활절 설교를 조크로 시작한다고…. 당연히 부활의 사건은 온 세상을 뒤집는 사건이기에 아마도 루터교에서는 조크로 시작하는 멋진 전통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활절 조크의 주요 내용은 정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일까요? 영생도 얻고 이 땅에서도 재미를 보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렇다면 처음 신부가 유대교인을 전도한 후 사실 이렇게 가르쳐야 했을 줄 압니다.
“나는 육의 사람이지만 신령한 사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면 육의 사람이지만 신령한 사람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두 단어가 눈에 띕니다. ‘심고’와 ‘다시 살아나며’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웃기는 일이 없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었는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은 창조 역사상 최고로 웃기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저의 집 뒷마당에 나팔꽃 씨앗을 뿌려놓았는데 어느 날 나가 보니 예쁜 장미꽃이 피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은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웃기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의 몸과 영의 몸을 자세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은 썩을 것과 욕된 것과 약한 것으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반면 영의 몸은 썩지 않을 것과 영광스러운 것과 강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썩을 것과 욕된 것과 약한 것을 심었는데 썩지 않을 것과 영광스러운 것과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팔꽃을 심었는데 장미꽃이 나오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질수 있을까요? 45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 곧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불가능한 일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살려 주는 영이 되셨으니 못 하실 것이 없게 되신 것입니다. 나팔꽃을 장미꽃으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기가 막힌 일을 하실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육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살려 주는 영이 되신 것을 감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을까요?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 중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전에 요나서 강해 시 저는 목사님이 지은 prodigal prophet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탕자 선지자’라고 할까요? 그 제목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서 다시스로 갔으니 말입니다.
비슷한 책 제목이 있는데 ‘Prodigal God’입니다. ‘탕부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내용은 두 아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너무 절제 없이 막 퍼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오늘 설교 내용에 관계된 둘째 아들을 중심으로 나누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의 유산을 다 삼키고 온 탕자에게 무지무지한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까지 끼워줍니다. 곧 아들됨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절제를 못합니다. 아들은 자기의 유산만 다 써버리고 왔는데, 아버지는 아들보다 몇 배로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산을 받아 다 쓰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전에 내주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낭비를 하고 계시니 켈리 목사님은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정말로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 맞습니다.
이 하나님은 단지 재산을 낭비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줌으로서 엄청난 것을 낭비하실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탕자를 아들로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낭비하실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낭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대박이 터집니다. 아들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살려 주는 영이 되셨기에 수많은 탕자들조차 당신의 아들이 될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외아들만 가지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셀수 없는 아들들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낭비하시길 잘 하신 것입니다. 탕부 하나님은 이제는 폭소를 터뜨리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탕부 하나님과 함께 폭소를 터뜨리는 날입니다. 물론 오늘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의 안식일에서 이제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축하하기 위함입니다. 곧 매 주일은 함께 폭소를 터뜨리는 날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일마다 더 큰 폭소를 터뜨리는 축복을 얻을까요? 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육의 삶에 충실한 자들만이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의 삶에 충실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육의 몸의 특징을 세 가지로 나열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몸은 썩을 것과 욕된 것과 약한 것으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곧 썩음과 욕됨과 약함의 삶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았을 때 신령함의 축복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늘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담대히 마주칠 때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 탕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탕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길을 열리게 한 것은 바로 탕자였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썩을 것과 욕된 것과 약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를 과감하게 아버지께 내려 놓았습니다.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 때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탕부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낭비하십니다. 끝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낭비하십니다.
곧 우리들의 육신의 몸에는 이 세 가지 보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 아니, 이 세 가지를 주님께 드릴 때 보물로 변합니다. 엄청난 보물로…. 드디어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몸에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탕부 하나님은 오늘도 계속 낭비하시는 하나님이 되셔서 육의 몸에 충실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육의 몸에 충실한 자들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 장로교에서는 3년에 한번씩 전국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큰 집회를 갖습니다. Yaconnelli라는 분이 어느 해 열리는 집회를 도왔습니다. 그 때 주제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준비를 하였고 배우, 음악가, 미디어 전문가, 물론 설교자 및 교사들까지 훌륭한 분들을 섭외를 하였습니다. 모든 순서가 예술적이었고, 설교 내지 강연도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학생들과 스태프 모두 좋아했습니다.
모든 집회 시간 한 시간 전에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웃고 즐겁게 놀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삼일째 되는 날 저녁에는 멀리서 온 유명한 연사의 설교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멧세지는, “God loves you! Be hopeful!”
그 해는 2007년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 설교자는 외친 것입니다.
“God loves you! Be hopeful!”
저녁 예배마다 전국에서 온 중고등부 학생들이 차례로 나와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어떤 그룹은 찬양을 하고, 어떤 그룹은 연극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 그룹은 올라 와서 각자를 소개한 후 자기들이 만든 이라크 전쟁 비디오를 상영하였습니다. 비디오에는 전쟁 고아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손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 물론 죽은 아이들의 모습까지…. 이 때 조용히 흘러 나오는 배경음악은,
“Jesus Loves Me. This I Know.”
Yaconnelli는 아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아들이 이 날 밤 묻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 학생들은 예배 시간에 이런 동영상을 보여 줬어?”
그 아들은 그 동영상을 보고 잠을 못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Yaconnelli는 리더들을 설득시켜서 저녁 집회를 야외에서 밤 하늘을 보면서 드리자고 제안을 합니다. 강당 안에서 사람들이 만든 환경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연세계에서 실제로 돌아가는 세상을 느끼며 참 하나님을 만나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집회의 주제가 ‘희망’이지만 우리는 첫 스텝을 잊었다고…. 절망과 좌절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부활은 십자가 후에 온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그 후 20명이 차례로 나와서 자기 그룹의 아픔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몇 그룹만 소개해 드리면,
“저는 북부 캐나다에서 왔습니다. 우리 커뮤니티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독에서 자유로워지길 기다립니다.”
“저는 디트로이트에서 왔습니다. 우리 도시에서는 젊은이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이를 멈추게 하게 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인디애나 작은 타운에서 삽니다. 여기는 일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울 줄 모릅니다.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길 기다립니다.”
모든 고백이 마친 후 학생들은 하늘에서 비추는 작은 별빛과 함께 고요하게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어느덧 한 노래가 humming으로 시작되었습니다.
“Amazing Grace….”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Yaconnelli는 말합니다.
“잃을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그럴 때 도리어 늘 숨어다녀야 하고 늘 실수를 반복한다. 더욱 고통 가운데 있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거나 기뻐할 능력도 상실한다. 어느덧 하나님의 임재마저 거부하게 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고난을 겪으시고 우시고 또 웃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썩어질 것과 욕된 것과 약한 것을 피하려 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과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이 세 가지를 품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살려 주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Yaconnelli의 말은 사도 바울의 고전15: 31절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매일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을 통해 죽음에 동참하고 이어서 살려 주는 영, 곧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날마다 죽는 자들 안에서 부활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