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총회에서 일하시는 Antonia Coleman 목사님이 계십니다. 사회정의에 관한 부서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저희 교회는 정의·평화·환경위원회가 있는데 비슷한 분야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 목사님이 이런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된 첫번째 이유는 친가 외가 두 할머니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분은 몸으로 뛰는 것을 강조하신 분이셨고 다른 분은 자금을 모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이 멋진 두 할머니 아래 Antonia Coleman 목사님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 외에 두 가지가 더 있는데, 할아버지가 자기가 16세일 때 소천받으셨다고 합니다. 원래 할아버지가 경제력이 있으셨던 분인데 갑자기 소천을 하시니 이 때 ‘아 하’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은 한정이 되어 있으니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자기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first name이 Antonia인데 이는 로마 황제 Anton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바로 Antonio fortress(병영) 에서 설교를 한 장면을 사도행전에서 읽게 됩니다. 그후 Antonio는 그에게는 난공불락의 의미로 닥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자기의 이름을 생각하며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총회 사회정의 분과에서 열심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서 일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정확히는 사도바울이 설교한 Antonio fortress의 Antonio가 로마 황제 이름이였는지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Antonia목사님은 그렇게 믿고 자기도 난공불락의 인물이 되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주는 위대한 힘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에 나오는 “I am” 씨리즈로 주님의 이름을 나누고 있는데 주님은 자그마치 7가지 이름으로 당신 자신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반복이 중요하니 반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I am the bread of life,” “I am the light of the world.” “I am the door.” “I am the good shepherd.”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오늘 나누고자 하는 주님의 이름은,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다음주에 나눌 이름은, “I am the true vine.”
주님은 3년간의 공생애 기간 이 7가지 이름을 늘 되새기면서 하루 하루 사역을 이어가셨을줄 압니다.
그리고 이 7가지 이름은 주님의 사역의 일면을 각각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여섯번째 이름은 어떤 일면을 보여줄까요? 오늘 본문 말씀 전 배경을 보면,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었을 때입니다. 곧 자기들의 목표지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더불어 빌라도 총독 관저를 점령만 하면 되는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모습을 보면 목적지에 다 도착해서 흥분하고 있는 표정은 커녕 어둡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를 듣고 베드로를 비롯 제자들은 정말로 어리둥절 해졌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 제자들은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의 허리를 찌릅니다. 4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물론 그동안은 알았습니다. 당연히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부와 함께…. 그런데 눈치를 보니 자기들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동안은 제일 용감했던 베드로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이 생각한 곳과는 다른 곳을 생각하시고 계시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상치 않은 용감한 자가 나섭니다.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5절,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여기에 주님의 놀라운 대화법 내지 교육법을 알수 있습니다. 의심에 대한 책을 쓴 McLaren은 다음과 같이 스승에게 배운 말을 합니다.
“배움이란 가르침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의 결과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게 하시려고…. 주님은 비유는 아니지만 제자들의 허리를 찌른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모두 가만히 있는데 생각이 늘 많은 곧 의심이 늘 많은 도마 그래서 한편으로는 깊은 깨달음에는 앞장 섰던 도마마저 아무래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많은 도마가 깨닫지 못하면 그 누구도 감을 잡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용감하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이까?”
이 때 주님께서 기다리셨다는듯이 당신의 여섯번째 이름을 터뜨리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동상이몽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점령이 오르고픈 고지였는데 주님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루살렘은 아주 좁은 곳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넓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기를 쓰고 들어 왔는데 주님은 한편으로는 초를 칩니다. 힘겹게 들어온 이 곳은 좁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좁은 곳에 힘겹게 들어온 제자들에게 넓은 곳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넓고 거할 곳이 많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힘겹게 예루살렘으로 들어 온 것은 헛수고였다는 뜻인가요?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예루살렘에는 들어오지 말고 직접 하나님의 넓은 곳으로 데려다 주시지…? 당신이 그곳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시면…?
제자들은 더 어리둥절해집니다. 아버지의 집이 넓은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프린스톤에 수학자 허준이 교수에 대해 들어보셨을줄 압니다. 수학분야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은 자랑스런 한국인입니다.
종종 그의 인터뷰하는 유튜브를 보았는데 때로는 칠판에 알수 없는 기호로 가득 채워진 칠판 앞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접합니다.
저도 고등학교까지 수학을 좋아 했었지만 허 교수가 풀고 있는 수학은 알수도 없고 감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수학자들이 인정한 최고의 수학자로만 믿고 인터뷰를 듣는 것뿐입니다.
도저히 허 교수님이 푸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인터뷰를 듣지 않으면 손해는 안 듣는 자들의 몫입니다.
제자들도 아마 비슷한 느낌이었을줄 압니다. 주님의 말씀이 듣기에는 쉬워 보여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들의 짧은 머리로는 깨우칠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를 다 아시는 주님은 내친 김에 더 내칩니다. 7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결국 허준이 교수의 수학보다 더 어렵게 들립니다. 사실 인생 문제가 허 교수가 푸는 수학문제보다 더 어렵습니다. 삶의 문제는 모두 쉬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풀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수학은 평민들에게는 어려워 보이지만 특히 허 교수와 같은 수학자들에게는 인생문제와 수학문제 중 어느 것이 쉽냐고 하면 당연히 수학문제가 쉽다고 할 것입니다. 수학문제는 수학적 두뇌가 필요하지만 인생문제는 시간 속에서 삶을 만나야만 풀려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바로 제가 처음 소개해 드린 안토니아 목사님입니다. 어릴 때 할머니들의 삶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할머니들의 삶을 이해했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왜 이 할머니는 이처럼 별나게 믿으시나….? 저 할머니는 왜 돈을 또 밝히시나…? 오랜 시간이 흐른후 이해가 되었습니다. 끝내 철이 든 후에 그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안토니아 목사님은 할머니들의 삶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알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셔서 당신의 길을 가셨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 길을 완성하실텐데 이를 제자들은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하고 많은 의심이 들겠지만….
이 말씀을 하시고는 당신의 이름을 삶으로 사신 것입니다. 곧 십자가로 향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주님은 당신의 길은 십자가의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주님은 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이 아니라 내려 오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예루살렘까지 내려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고지를 점령하려고…. 이제 주님과 더불어 끝까지 오를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 모두 예루살렘성에 들어 오셨지만 과정은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은 낮은 세상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늘에서 예루살렘이라는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까지 내려 가시는 길 위에 서 계신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온 세상을 껴 안으시려고….
그러니 제자들의 관점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올라온 자들이 내려오신 분을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껴안기 위해서는 낮아지셨어야 하셨습니다. 가루가 되셨어야 하셨습니다. 아니 가루보다 작은 분자가 되셨습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셨어야 하셨습니다.
곧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셨고 가루가 되신 것을 보게 될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의역하면 “이제 부터 되어지는 일을 보게 되면 너희도 내가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를 알게 되리라.”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 중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안타깝게도 김민기 선생은 무종교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삶에 충실한 나머지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닫지 못한 것도 많이 깨달으면서 삶을 영위하는 분임에는 틀림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면 마지막 연으로 이렇게 넣지 않을까요?
여기가 봉우리야,
우리의 길은 주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야
그것이 진리의 삶이고 생명의 삶이야….
시간 관계상 진리와 생명에 관해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8:31, 3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빌라도가 주님을 심문하다가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18: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에 주님께서 답변하셨나요? 말씀으로는 답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삶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십자가로 향하심으로…. 당신의 길을 가심으로…. 십자가의 길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이름이십니다.
생명에 관해서는 12: 24, 25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주님의 이름은 생명이기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되어서 죽으셨고 도리어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에 충실히 사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미 의회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은 장병들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했는데 한국전 중 받은 사람은 136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464명보다는 작지만 제1차 세계대전 124명보다는 많은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훈장을 마지막 받은 자는 이미 고인이 된 에밀 카폰 대위로 전사한지 62년이 되는 해에 추서되었습니다. (2013.4)
카폰 대위는 1950년 11월 미군 어느 대대 소속의 군종 신부로서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남아 병들고 부상 당하여 고통 중에 있는 포로들을 일일이 위로하며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도 세균에 감염되어 많은 고생을 했고, 나중에는 폐렴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병사들을 돌보며, 신부로서 사명을 끝까지 완수한 공로로 명예훈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1950년 7월 1일)
요한복음 1:12절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카폰 신부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이름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늘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최고의 생명의 삶을 영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수많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 땅에서는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명예훈장도 받을수 없는 길을 가셨습니다. 오직 하늘의 상만을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봉우리에 올라와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내려가십시다.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사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