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낳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쉼보르스카 시인이 있습니다. 그 분의 시 ‘두 번은 없다’가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면 마치 전도서를 읽는 느낌마저 듭니다. 첫 3연만 소개해 드립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실습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지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겠는가 생각이 드는 시입니다. 인생은 두 번은 없기 때문에…. 두 번 있다면 첫번째는 그냥 알아서 살아본 후에 스스로 첫 생애에서 터득한 지혜를 가지고 두 번째는 훨씬 멋지게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솔로몬은 알았습니다. ‘두 번은 없음’을…. 두 번이 없기 때문에, 곧 학교에서는 낙제가 있어도 인생에는 낙제가 없음을….
사실 저도 지금까지 자주 꾸는 꿈이 있는데 낙제하는 꿈입니다. 꿈에서 깨어나면서 생각합니다. “아, 꿈이었구나.”
교우 여러분, 인생에는 낙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낙제 없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려고 다섯번째 전도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0-17, 18-20 절입니다. 첫 문단에서는 둘도 없는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문단에서는 반대로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0절에서 솔로몬은 인간은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솔로몬은 많은 부를 소유하였었는데 도리어 이것은 헛된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반대로 솔로몬은 두 번 다시 산다면 도리어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듯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2절,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잠을 잘 자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왜 부자가 잠을 자지 못할까요? 금방 생각나는 것은 자신의 부를 관리하느라 늘 바쁘고 정신 없이 지내니 잠을 자지 못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부를 삶의 보호자로 삼기 때문일줄 압니다. 아니 좀 더 부풀리면 부를 무기로 삼기 때문일줄 압니다. 자신의 부로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 하니 부를 잃을까봐 노심초사하고 결국 잠을 자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
김범준 저자는 ‘지옥에 다녀 온 단테’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끝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원을 돌고 또 부딪히는, 부딪힐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곳, 그 지옥은 돈을 낭비하는 사람 그리고 돈을 극단적으로 모으기만 한 사람이 가게 될 곳이다. 오로지 돈이 모든 판단의 기준인 사람들이 결국 다다르게 되는 지옥이다. 단테는 그 지옥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기에서는 돈이라면 ‘아니요’가 ‘예’로 변한다네!””
돈이라면 ‘아니요’가 갑자기 ‘예’로 변합니다. 왜? 돈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한편 이들이 갈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단테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옥은 바로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맥락에서 전도자는 계속 자신의 글을 이어갑니다. 13절,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돈을 자신의 무기로 삼은 자들은 그 무기를 자녀들에게 넘겨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가지 않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3대가 아니라 그 이상도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후손들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한편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갈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아는 지혜자는 부를 무기로 삼는 자들에게 종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무기로 인해서 갇혀서 도리어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근심과 질병과 분노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부가 참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이 땅 위에서 지옥을 맛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를 무기로 삼아 지옥을 맛본 가정이 바로 Brookline에 거주했던 케네디 가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암살과 자살은 물론이거니와, 제가 읽은 어느 며느리의 자서전을 보면, 케네디 가문에 시집가는 것은 정말로 시집가는 것인데, 케네디 가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음을 고백하는 글을 접해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속은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산다면 한 번은 이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런데 두 번 살지 못함을 알면서 인생을 이렇게 살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러면 한 번 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8절,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주어진 일상생활을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전도자는 설파합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모든 수고 중에’라는 표현을 합니다. 참된 인생은 수고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고를 즐겁게 감당하는 자들이 바로 선하고 아름답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느 수양회에 참석하였는데 당시 숭실대학교 교수님이신 안병욱 교수님이 특강을 하셨습니다. 아직까지 늘 제 마음에 남아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노동할 때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노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추하다고 생각이 든 적이 없었음을 금방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도 이런 지혜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 40시간 이상의 수고도 실은 아름답고 선한 것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자는 아름다운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9절,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첫 귀절이 눈에 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전도자는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재물과 부요를 주시고 능히 누리게 하신다고, 그리고 제 몫을 받아 수고하게 하신다고…, 한편 이를 즐겁게 받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아니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선물은 재물과 부요와 수고와 즐거움이라고 솔로몬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다 하나뿐인 선물이기에 두 번 살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시후면 겨울이 오는데 겨울에 보스톤에 사는 우리들의 축복은 눈을 볼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데 눈 한 송이 한 송이는 모두 다른 무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눈 한 송이 한 송이도 다르게 최고의 아름다움이 녹아 있게 만드시는데 하물며 인생은 어떻겠습니까? 하찮은 눈 한 송이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혼을 다하여 만드시는데, 하물로 만물의 영장인 인생은 어떻겠습니다. 한 인생 한 인생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를 깨달은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하나요? 20절,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자들에게 더 큰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곧 고민이 없이 삶을 즐길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하나님의 축복의 개념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는 자들에게 또 다른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찾아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빈익빈 부익부입니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죄인들의 모습은 빈익빈입니다. 의인들의 모습은 부익부입니다.
‘빈익빈 부익부’ 하니 성경 어디에서 많이 접한 내용 같지 않습니까? 주님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세 종들에게 각각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주고 주인이 떠났습니다. 후에 주인이 와 보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한 달란트 그대로 갖고 있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배로 이를 남겨서 네 달란트를 갖고 있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도 이를 배로 남겨서 열 달란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 달란트를 갖고 있는 종의 것을 빼앗아서 이미 열 달란트 갖고 있는 종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이 말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5:29)
여러분은 이러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의인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사실 솔로몬의 전도서를 읽고 이런 삶을 누린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제 보기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후에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다섯 달란트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생각한 이 놀라운 축복의 삶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야 시원하게 뚫린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셨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로마서 5:15하반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우리의 한 번 뿐인 인생을 그동안 잘 못 살았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동안은 빈익빈의 주인공으로 살았어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순간 부익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밝은 미래가 보장될뿐 아니라 우리들의 잘못 살았던 과거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 포장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이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나니 과거마저도 하나님의 선물로 변했음을….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이런 말씀도 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20:20 하반절)
그렇다면 케네디가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처럼 과거도 선물로 변한다면 미래는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빈익빈의 주인공이 아니라 부익부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십시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과거를 아름답게 가꾸고 미래까지도 아름답게 기획하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을 이루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을 매일 매일 기억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Fuller 신학교에 Daniel Lee라는 한인 2세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민 신학을 위한 아주 뛰어난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은 “Doing Asian American theology’.
서론에 자신이 왜 Asian American 신학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간단히만 소개해 드리면 처음에는 한인교회가 마음에 안들었고 도리어 서구 신학에 깊게 빠져 들었다고 합니다. 한인 교회는 강압적인 신학에 젖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곧 유교 사상에 깊게 젖어 있어서 가급적 한인교회도 멀리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한인교회의 분열하는 모습에도 많이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가정도 꾸리고 여러 Asian 신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2세들에게는 좀 불편한 면도 많이 있지만 한국 문화를 비롯 아시아 문화권 안에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Asian American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자신의 책 서두에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번 뿐인 인생의 길 특히 신학자의 길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것을 도리어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 것입니다.
과거의 어두운 한인 이민 교회의 모습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인 이민 교회 아니 아시아 이민 교회들의 최고의 미래의 모습을 꿈꾸며 이제는 어쩌면 최고의 이민신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삼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즐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단 한 번 뿐인 남은 인생, 하나님을 우리들의 보호자 우리들의 유일한 무기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펼쳐지는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십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과거를 아름답게 바꾸어 가고 희망찬 미래를 기획하십시다. 매일 매일 창조주를 기억하며 천국의 삶을 누리다가 부익부의 주인공이 되어 천국문에 들어가십시다.
전도자는 말씀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