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어느 결혼식 설교에서 사용한 저의 가정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방을 약속한 어느 저녁 시간입니다. 이것 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집사람에게 늦었다고 하면서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급히 차에 뛰어 들어가 발동을 키고는 Rt.1 Tobin bridge를 지나서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좀 늦게 도착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즐겁게 식사도 하고 기도 드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심방을 마쳤습니다. 귀가하게 되었는데 급히 집을 나선 탓에 주머니에 지갑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차 키를 집사람에게 주고는 집사람이 운전케 했습니다.
얼마 후 토빈 다리를 지나야 했습니다. 요즘은 자동으로 모든 것이 처리되지만 그 때는 일단 정지하고 toll비를 내었어야 했습니다. 저는 지갑을 안 갖고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집사람 지갑에서 toll비를 꺼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사람 가방이 차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집사람도 서둘러 그 집을 나오느라 가방을 챙기지 못한 것입니다. 급기야 차를 돌려서 다시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 가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사람 가방을 건네 주었습니다.
제가 집을 나올 때 열쇠를 갖고 나왔더라면 집사람 가방을 그대로 교우댁에 두고 집까지 달려 왔을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결혼식 주례에 소개해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성급한 성격과 집사람의 부주의한 성격이 조화를 이루어서 심방을 잘 마치고 귀가했다는 결론으로 이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실은 다음 주일이 청지기 헌신 주일이자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다음주는 청지기 헌신에 대한 말씀도 나누어야 하기에 오늘 부청회원들을 위한 말씀을 미리 좀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저희 가정의 경험을 부청 식구들도 자주 경험하면서 지내오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가정을 꾸린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일줄 압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며 사는 교우들에게 오늘 전도서 저자는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9:1절과 7-10절 말씀으로 잡았습니다. 물론 가정 생활에 대한 것은 7-10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기 전 전체 문락의 시작은 1절 말씀입니다. 물론 석주 전에 ‘산 자의 소명’이란 제목으로 2-6절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곧 2-6절에서는 ‘산 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전도자는 강조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산 자’는 항상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문단이고 두 번째가 오늘의 본문 말씀인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결혼한 커플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이 나오죠. 9절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자 그러면 9장 말씀을 정리하면 1절에 서론을 말씀하고는, 처음에는 산 자들의 소중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산 자들 중에 부부들의 삶의 소중함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 두 문단의 시작은 1절입니다. 그러므로 1절을 우선 살펴 봐야 할 줄 압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 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 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이 말씀을 하고는 먼저 산 자들에게 그리고는 가정을 꾸린 자들에게 전도자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후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전도자는 8장까지 써 내려온 후에 이제 9장을 시작하면서 우리 앞에는 미래의 모호한 세계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1절 말씀만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마지막 부분만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사실 성경에는 표지 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전도자는 여기에 한참의 pause의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을 줄 압니다.
전도자는 ‘산 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커플들에게 모호한 미래를 맛보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10초간 시간을 드릴 테니 모호한 미래의 세계 앞에 잠시 서 계시기 바랍니다.
왜 전도자는 젊은이들에게 모호한 미래를 맛보게 하고 있을까요?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전도자의 놀라운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모호한 미래 앞에서 참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맞이하는 사람, 긍정적으로 맞이하는 사람.
정확한 통계는 알기가 어려울 텐데, 자주 등장하는 자료는, ‘한 번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9번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과학적인 데이터라고 보기에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면,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9라면 긍정적인 사람이 1 정도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듣는 것이 정신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전도자는 모호한 미래를 만나도록 10초의 시간을 줍니다. 그리고는 입을 엽니다. 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이런 말이 있죠? 병 주고 약 준다고…. 모호한 미래 앞에 세워 놓은 적은 언제고 이제는 도리어….
이는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어느 교수님이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무지 어렵다고 누가 잘 볼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고…. 겁을 주고는 잠시 후 “괜찮아 공부하지 않아도 되…. 너희는 모두 합격이야 가서 먹고 놀아….”
이 교수님의 말을 듣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아해 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계속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흰 의복과 향 기름은 축제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미래는 축제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나가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아마 샴페인까지 다 준비해 놓은 듯 합니다.
또 다른 속담이 생각이 나네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
그런데 전도자는 거꾸로를 말씀하고 있는듯 합니다.
‘떡 받을 생각도 없는데 떡 줄 사람이 김치국부터 마신다’라고 할까요?
잔치를 즐길 마음에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주인은 잔치를 베풀테니 축제의 복장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병 주고 약주는 것 같더니 이제는 전도자는 도리어 잔치를 베풀 꿈에 혼자서 신나하는 것입니다. 받을 사람은 멍하니 있는데….
전도서 첫 강해 설교시 말씀드렸습니다. 전도서는 처음에는 정경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논란 끝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정경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신학적으로 다른 성경과 연결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늦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경이 되었으니 분명히 신구약 모든 성경과 연결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 흰 옷이 나오는데 주님의 비유를 보면 결혼 예식에는 예복을 입어야 함을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대목은 요한 계시록에는 구원받은 십 사만 사천 명이 흰 옷을 입고 어린 양 앞에 서서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시록 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곧 성경 전체를 배경으로 생각하면 떡 받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줄 사람이 김치국부터 마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의 축복을 전도자는 슬며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곧 언젠가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될텐데 미래의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오늘을 기뻐하며 즐기라고 전도자는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받을 축복의 삶을 오늘 흉내 내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둔한 학생들이 쉽게 받겠습니까? 멍하니 있는 학생들에게 전도자는 또 말씀합니다.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는 네 몫이니라.”
드디어 전도자는 한 과제를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멋진 미래를 힘껏 껴 안기 어려우면, 아내를 껴 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좀 구체적으로 감이 들어 오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미래를 가꾸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남성 중심이었으니 말을 좀 바꾸면 부부가 함께 미지의 미래 모호한 미래를 가꾸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시작은 저의 조급한 성격과 집사람의 부주의한 성격이 하나가 되어 심방을 잘 마쳤다고 말씀드렸는데…, 물론 우리 부부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미래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제로 받아드릴 때 우리들의 미래는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시작은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부부가 하나가 되어 열심히 사는 자들에게 일거리가 주어지는데 이 일거리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일을 통하여 얻은 분깃으로 삶의 필요한 것을 채워 갑니다.
그런데 부부가 하나가 되어 미래의 소망 가운데 사는 가정은 가정을 넘어 온 세상의 멋진 미래를 가꾸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중동 지역이 시끄럽지만 얼마전 알게 된 이스라엘의 첫 총리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Ben-Gurion 총리인데 이스라엘 건국에 크게 기여하여 ‘나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으신 분입니다.
총리 임기를 마친 후 놀랍게도 트럭에 농기구를 잔뜩 싣고는 Negev사막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왜 농기구를 싣고 사막으로 가시느냐고 물으니, ‘이스라엘의 장래는 사막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1948년도도 늘 불안한 정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모호한 이스라엘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농장을 통해서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후손들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요?
그가 이런 결정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세 자녀를 둔 가정을 이끌었는데 가정 생활을 통해서 더 큰 꿈을 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서로 다른 성격의 부부가 함께 즐겁게 살 때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펼쳐집니다.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넘어 모호한 미래를 위해서 온 이웃을 위한 놀라운 길을 만들어 가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부부는 아니지만 20년 동안 수도원에서 함께 친구로서 생활했던 한 신부와 수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유명한 스페인의 카미노 순례를 함께 가기로 결정합니다. 500마일의 순례의 길을 걸어서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녀는 시작하기 전 부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발에 물집이 생길까 걱정, 파트너는 잃을까 걱정, 아플까 걱정, 심지어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친지가 세상을 떠날 것까지 등….
반면 남자 파트너는 긍정적 사람입니다. 결국 둘이서는 매일 6가지 긍정적인 말귀를 만들어서 읽고 하루를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 까미노는 우리에게 너무도 멋진 모험이다.
- 우리는 건강하다.
- 물집도 없다.
- 우리는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롯 모든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 우리는 Spanish를 더 잘 하게 될 것이다.
결국 두 분은 최고의 순례 파트너가 되어서 멋진 순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체험기를 책으로 펼쳐 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고도 깊은 세계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실은 이 두 분도 그 중에 한 분은 hurried worried 증세의 소유자였고 한 분은 그렇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부부는 아니지만 서로의 다름을 아름답게 받아드리면서 멋진 우정의 여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인간의 삶에 주어지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해 준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아침 이런 긍정적인 글귀를 만들어서 하루를 시작하면 어떨까요? 부부가 아니신 분들은 신앙의 파트너와 함께…
전도자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 공감대를 이루는 삶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들, 특별히 창조주를 기억하는 가정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모든 교우 가정에게 임하게 될 것을 기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