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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 다니엘 3:13-27 (2025/2/2)

Max Lucado라는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가 있는데, 자신의 책에 친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친구는 두 동행인과 함께 베트남에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불법적으로 성경책과 돈을 전달해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여행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두 동행인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베트남 말도 못 하는데…. 물론 구글 번역기도 없었을 때입니다. 손에는 성경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있고, 몸에는 돈이 든 벨트 주머니를 차고 있었습니다. 아는 것은 가려고 한 호텔 이름뿐이었습니다. 택시 운전수가 여러 명 앞에 와 섰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막연히 기다리며 기도만 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려서 택시를 타고 호텔 이름을 말해 주었습니다.  한 시간 쯤 지나서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돈을 지불하고는 택시에서 내렸고 그들은 떠났다고 합니다. ‘그들’? 왜 ‘그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요?

 

호텔에 도착해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앞 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은 운전수, 또 한 사람은 알지 못 하는 사람.

후에 베트남 택시들을 수 없이 많이 보았는데 어느 택시도 운전수가 둘인 것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친구는 왜 두 사람을 보았겠습니까? 한 분은 주님이 아니었을까요? 친구의 고백입니다.

 

오늘 제직임직식을 맞이하여 계속해서 다니엘서 강해 말씀을 나눕니다. 그동안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드리면,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잡혀옵니다. 다행히 왕족인지라 특별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 왕의 특별 교육을 받기 전 이스라엘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요시야 왕을 통해서 말씀의 특별 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포로 생활 중에서도 기적의 소년들이 됩니다. 신비한 것을 깨닫는 능력까지 부여받았습니다.

마침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줍니다. 큰 신상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손대지 않은 돌이 나타나 이 큰 신상을 부숩니다. 이것이 앞으로 되어질 일이라고 다니엘이 해석해줍니다. 이것이 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 왕은 이 꿈의 해석을 듣고 어떻게 하죠?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자가 될까요? 3:1절,

“느부갓네 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이처럼 금 신상을 세운 후 총독과 수령들을 포함해서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이 신상에 절하게 합니다.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 수령에게 절하는 것처럼….

그런데 다니엘은 왕궁에 있어서 면한 것 같고 다른 세 친구들은 절해야 하는데 친구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바벨론 사람들은 왕에게 고발하죠. 이에 끌려온 세 친구들에게 왕은 묻습니다. 14절,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 친구들도 다니엘처럼 바벨론 이름을 받았다고…. 다니엘의 바벨론 이름은 벨드사살인데, 뜻은 ‘바알이여 통치자를 보호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세 친구들도 바벨론 이름을 받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바벨론에는 크게 신이 셋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신이 바알이라고도 하고 마르둑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은 이 바알의 이름을 사용해서 바벨론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두번째 신은 지혜와 문학의 신으로 Nabu입니다. 세번째 신은 달의 신으로 Aku입니다. 세 친구들은 Nabu와 Aku의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냐가 사드락이 되었는데 이는 ‘Command of Aku (아쿠신의 명령)’입니다. 미사엘은 메삭이 되었는데 뜻은 ‘아쿠신을 닮은 자,’ 마지막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가 되었는데 뜻은 ‘나부신의 종’.

 

이처럼 지금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바벨론 신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만든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아쿠신의 명령아…,” “아쿠신을 닮은 자야…,” “나부신의 종아….”

이 이름들을 부르면서 왜 자기가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냐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절하면 용서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긴다면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겠다고 경고합니다. 이에 세 친구는 하나 같이 답합니다. 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세 친구는 왕을 도리어 조롱하듯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이름을 바벨론 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분이 건지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과 바벨론의 신이 대결을 하면 분명 여호와 하나님이 이길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18절,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기들은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임을 당돌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에게서 말씀의 특별 교육을 받았고, 또 당신 덕에 바벨론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으며 결국 놀라운 기적의 사람들이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쓸모없이 될지라도 곧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낭비가 될지라도 왕의 신상에는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지금까지의 삶은 거룩한 낭비가 되어서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에 안기겠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지식인들이 결국 자기의 삶을 낭비하기 싫어서 친일파가 된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이들의 말을 기특하게 여겼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동안에 쌓았던 모든 귀한 것들을 그냥 버리고 풀무불의 불쏘시개가 될래? 그래 봐!” 하고는 그들을 풀무불에 내던집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죠? 25절,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세 친구는 결박이 풀린 채 걸어다니고 있고 네번째 사람이 보이는데 신들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것을 쓰레기처럼 버렸더니 도리어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풀무불을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풀무불은 바벨론 신들의 파워입니다. 이것을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신들의 아들로 보이는 그 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인한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가 있는 곳에는 바로 신들의 아들과 같은 분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 소개해 드린 베트남 선교사님이 택시 운전수 옆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뵈온 것처럼….

 

풀무불 이야기가 밝히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세 친구가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풀무불에 던져지기 전에 낭비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낭비하셨습니다. 풀무불에 던져넣으셨습니다. 타서 없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세 친구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낭비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낭비하실 것을 이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낭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거룩한 낭비의 주인공들과 함께 당신의 나라를 가꾸어 가십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는 잘 아시겠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입니다. 이는 어쩌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거룩한 낭비를 하자’라고 생각해도 좋을 줄 압니다. 거룩한 낭비에는 시간의 낭비, 물질의 낭비, 정신적 낭비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줄 압니다. 우리들의 거룩한 낭비가 있는 곳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낭비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왜 이 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서 낭비의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을까요?

요즘 다니엘서 강해를 하고 있는데 역사적인 배경은 70년 바벨론 포로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서 70년을 보낸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낭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36: 21 말씀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예레미야가 70년 포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죠. 정확히 70년간 포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70년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안식년을 안 지켰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을 490년간 안 지켰습니다. 그래서 70년의 안식년을 포로 생활을 통해서 채우게 된 것입니다.

 

왜 안식년을 안 지켰을까요?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웃 나라는 1년이 멀다하고 발전하는데 1년을 쉬면 그만큼 뒤쳐질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안식년은 거룩한 낭비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를 안 하였기에 바벨론 포로가 된 것입니다.

곧 바벨론 포로 70년은 바로 거룩한 낭비의 시간을 채우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게 하기 위해서 이들은 70년 바벨론 포로 시기를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밀린 거룩한 낭비의 시간을 채웠어야 한 것입니다.

 실은 얼마전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으로 선교 편지를 받았습니다. 2년 전부터 저희 교회 정의·평화·환경위원회에서 후원하는 밀알선교회가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기관인데, 현재 세계밀알 부총재로 섬기는 강원호 목사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부총재까지 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43년 전 1981년에 대학 2학년이었는데, 매주 토요일 상계동에 있는 시각장애인들 사는 곳에 봉사를 나갔다고 합니다. 10명 정도 한 팀이 되어서 약 2시간 정도 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서 어떤 때는 혼자 가는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점점 재미가 없어졌지만 팀장의 책임 때문에 계속하고 있었는데 실은 학생들이 주는 것보다 오고가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많아서 더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왕복 시간이 5시간 걸렸고 그 곳에서 두 시간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런 생각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매주 토요일 시각장애인 봉사 2시간만 주님이 받는 시간이 아니라 거기 가기 위해서 길거리에 낭비하는 5시간도 주님께서 받으신다.”

이 생각을 하며 계속 봉사하게 되었고 이제 43년이 지난 지금에는 부총재로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보고, 그 어느 때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낭비를 죄악시 하는 시대에 사는 이 때, 거룩한 낭비야 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최고의 삶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직임직예배로 드립니다. 함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다.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십시다. 이를 위해 거룩한 낭비를 용감하게 시행하십시다.

시간의 낭비, 물질의 낭비 등…. 주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달 주중에 어느 구역 모임이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옛 교우님이 방문하신다고 해서 저도 반갑게 와서 좋은 시간을 나눴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이 계셔서 교회까지 오시는데 얼마나 걸리셨냐고 여쭤 봤습니다.

한 시간 좀 넘게 걸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삼십 분쯤 걸렸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은 바로 ‘거룩한 낭비’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들의 거룩한 낭비가 십자가를 만날 때 새로운 기적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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