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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어머니의 웃음

창세기 18:1-15

일본에 호류사라는 절이 있다고 합니다. 이 절에는 고구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도 볼 수 있고 아울러 백제의 유적을 느낄 수 있는 절이라고 합니다.

이 절 앞에는 긴 소나무 숲길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 오랜 시간의 나이테를 지닌 건강하고 잘 생긴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기에 숲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멋지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호류사 안마당에도 윗부분이 뚝 짤린 수령 몇백 년은 된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그 기품이 여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호류사는 천 년 된 소나무로 지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하는데, 이 절을 1400여 년 동안 대대로 지켜온 ‘궁목수’ 가문이 있다고 합니다.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그런 가문이라고 합니다. 이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

한편 니시오카 궁목수 가문에서는 천 년 노송으로 집을 짓고 나면 언젠가는 후대에서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천 년을 내다보며 집을 짓고 천 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지금도 호류사를 지은 목재의 일부를 대패질하면 천 년 된 노송의 향긋한 솔내가 난다고 합니다.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천 년 이상 갈 건물을 위해서 천 년의 견딤의 역사를 지닌 소나무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구한 우리 인류 역사를 위해서는 어떤 인물들이 필요로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물을 사용하셨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곧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때마침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이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가서 몸을 굽혀 절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세 사람이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를 아브라함이 알아 본 것입니다.

세 사람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하고 손수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를 하게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푸짐한 대접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푸짐한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본론으로 들어 가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아무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지만 하나님이신데 사라가 어디 있는지 모를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질문을 했을줄 압니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하여튼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장막에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를 사라가 듣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사라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에 사라의 반응은 12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의 속 마음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1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를 사라가 또 듣고 대답합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 사람이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함 보다는 사라를 만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신데 사라가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역사에 사라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에덴 동산에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는 곧 아담이 비록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시 당신의 새로운 역사에 초대하는 초댓장이지 않았습니까? 매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라에게 초댓장을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곧 하나님은 사라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사라에게 하신 말씀은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18장인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먼저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 두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셈입니다. 첫번째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아내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라 하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사실 이미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웃었기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웃음’ 곧 이삭이라고 부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별명을 주신 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브라함에 대한 초대를 확증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은 첫 번째 나타나심으로 아브라함을 당신의 위대한 역사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내 이름을 사라라고 하고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말씀을 하신지 얼마 시간이 안 지나서 입니다. 확실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몇 달 쯤 지났을 때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 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라였습니다. 그래서 푸짐하게 드신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구원 역사를 위해서 두 거목이 필요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또 한 사람은 사라입니다. 이 두 사람은 기다림을 통해서 거목이 된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번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애를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가 되었을 때 부르시고 큰 나라를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로 25년간을 기다립니다. 도중에 아브라함에게만 한 번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24년째에 하나님은 두 번 나타나신 것입니다. 첫번째는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 나타나셔서 1년후에 이삭을 낳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얼마 후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 때는 사라를 만나기 위해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림으로 거목이 되었다면 사라도 말할 나위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사라는 기다림 위에 견딤을 더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사라 보다 훨씬 견디기 쉬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늘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아브라함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그냥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 했으면서…. 후에 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처럼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릴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확히 24년 되었을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라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라를 찾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24년간 말없이 기다린 아니 견딘 사라를 찾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들을수 있게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되물으신 것입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사라가 답변합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꾸짖는 음성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줄 압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 위에 견딤의 덕으로 초지 일관한 사라와 사랑과 애교가 오고 가는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곧 아브라함은 기다린 사람이었다면 사라는 막연히 견딘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끝까지 견딘 사람을 하나님은 제일 마지막에 즐거움과 대단한 마음을 가지고 초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라가 아브라함보다 더 큰 거목 더 소중한 거목이 아니었을까요?

 

소설가 박완서씨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넉 달 뒤에는 스물여섯 살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또 잃었습니다. 그 후 어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합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그것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간의 고통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하나의 거목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25년간의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도리어 더 큰 거목이 되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원래 사래였던 이름을 사라라고 바꾸게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견딤의 여인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가 되어 간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기다림의 어머니를 넘어 견딤의 어머니임을 다시금 인식하고 감사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설교 준비 전 편지를 씁니다. 이번에는 골돌히 생각하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우표가 필요 없는 편지를 썼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님이 먼저 공산당에 쫓겨 남하하신 후 잠시 후 이북에서 혼자 자녀들을 데리고 남하하시고, 전쟁시에도 학교와 교회 일로 먼저 훌쩍 사라진 아버님을 찾아 가진 역경 가운데서도 꿋꿋이 참고 끝내 온 가정이 재회하기에 이르게 하시고, 아버님께서 공부하러 미국으로 가시는 길도 선뜻 허락하셔서 한국의 기독교 교육에 큰 자취를 남기게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금 존경과 감사가 우러러 나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저희 가정뿐 아니라 대광과 영락이라는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데 큰 힘이 된 것을 생각하니 어머니가 더욱 자랑스러워집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정말로 위대하고 대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바로 그 하나님을 삶에서 보여주시는 분들이 위대한 어머니들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러기에 합당한 희생을 보여주셨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일하셨군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기다리시고 견디신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웃음 소리가 이제야 들려 옵니다.”

 

사라가 말합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니 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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