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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본문: 히브리서 11:1-6

얼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즘 저는 일반 뉴스를 보기 전에 좋은 소식만 싣고 있는 Goodnewsnetwork신문을 보곤 합니다. 며칠전에는 은행 강도에 관한 소식이 실렸습니다. 은행 강도의 이야기가 좋은소식신문에 어떻게 날수 있었겠습니까?

David Potchen씨인데 감옥에 있다가 출감을 했지만 마땅히 일할 곳도 없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또 다시 은행강도질을 했습니다. 은행에서 훔쳤지만 돈이 필요해서 훔친 것은 아닙니다. 잠 잘 곳이 필요해서 훔친 것입니다. 훔친 후 길거리에 앉아 있으니 경찰이 와서 체포했습니다. 자기가 바라던 것입니다. 다시 감옥에서 지낼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재판이 열렸습니다. 판사가 지혜로운 결정을 합니다. 선고 대신에 청중을 향하여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job을 줄수 있는 분 안 계십니까?”

이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고 신문을 읽은 트럭 회사주인이 Potchen씨를 고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용접을 배우게 됩니다. 현재 아주 능숙한 용접공이 되어서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판사의 지혜와 트럭 공장 주인의 관용이 포첸씨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포첸씨는 그 누구에게도 요구한 것도 없습니다. 그냥 삶을 포기한채로 감옥에서 먹고 자고 살겠다고 생각하고 또 다시 은행을 털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덧 일등 용접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지혜와 관용이 한 사람 그것도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삶을 포기한 자를 살렸다면 우리 하나님 손 안에 사는 자들의 삶은 어떨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은 소위 믿음의 장으로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특히 1절 말씀은 믿음의 본질을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아주 멋진 표현입니다.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신나 보입니다. 믿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누가 이런 축복을 받았나요? 2절 말씀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당신의 믿음의 선배들은 공동체적으로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믿음은 공동체적입니다. 당대에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믿음은 전수되어야 합니다. 3세대 아니 그 이상으로 전수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갖고 있었던 공통된 믿음이 무엇이었을까요? 3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공동체적인 믿음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인데 첫 번째 믿음은 바로 보이는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 믿음을 히브리서11장에 나온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전부일까요? 6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받는 조건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조금 전에 소개해드린 포첸씨는 아무 잘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길거리에 서성거리다가 다시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의 바람은 감옥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사와 어느 회사 사장님의 관용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자비로 인한 선물이지 상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참 믿음은 상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선물이 좋습니까? 상이 좋습니까? 졸업식때 선물을 받는 것과 상을 받는 것 무엇이 더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상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말씀을 에녹의 믿음을 말한 다음에 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가지 믿음의 특성이 나옵니다. 하나는 온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번째 특성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번째 특성을 말씀하신 후 잠시 4, 5절에서 아벨과 에녹에 대해 말씀하시고  6절에서 두번째 특성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처음에 믿음에 대한 정의를 말씀하실 때부터 두 가지 특성을 다 말씀하시지 하필 에녹의 이야기를 하시고 두번째 특성을 말씀을 하시나 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기록하다가 앗차 빠트렸구나 하고 요즘처럼 콤퓨터가 아니니 지울수도 없고 삽입할수도 없어서 생각이 났길래 그냥 에녹의 이야기 후에 썼을까요?

 

아주 유명한 신학자 두 분의 주석책을 참고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자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장을 제공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녹이 믿음으로 받은 상은 죽지 않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닙니까? 에녹을 소개한 후 두번째 믿음의 특성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세상을 넘는 아니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상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뛰어 넘는 상 말입니다. 곧 에녹이 받은 축복 말입니다.  

두 믿음의 특성을 종합하면 곧 믿음의 시작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완성은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넘는 아니 이 세상 밖에 놀라운 상을 준비해 두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상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이처럼 엄청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또한 저 세상에서 복을 받게 되 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가슴에는 늘 하나님을 찾는 아픔의 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찾는 자들을 위해서는 이 세상을 넘는 이 세상 밖에 있는 놀라운 상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을 믿는 것입니다.

 

매사츄세추에서 사는 특권 중에 하나가 종종 뒷마당이나 길에서 칠면조를 보는 것입니다. 저희 집 주변에도 종종 칠면조가 나타납니다. 얼마 전 칠면조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어미 칠면조는 성실하고 주의 깊게 새끼를 보호하는 훌륭한 습성을 지녔다고 합니다. 새끼의 체온을 유지해주고 깨끗하게 닦아주며 품에 안고 보호하는등 새끼를 보살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미 칠면조의 양육 방법에 뭔가 묘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어미의 모든 양육 행동이 새끼 칠면조가 내는 ‘칩칩’ 소리로 촉발된다고 합니다.

냄새나 촉감, 외모 같은 새끼의 특징들은 어미의 양육 행동을 유발하는 원인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새끼가 ‘칩칩’ 소리를 내면 어미는 새끼를 보살핍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새끼가 ‘칩칩’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미는 새끼를 무시하거나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 눈에 보이는 칠면조들은 모두 어릴 때 ‘칩칩’ 소리를 냈던 칠면조들입니다.

칠면조 하면 우리 모두 추수감사절이 생각이 날텐데 이제 한 가지를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칩칩’ 소리를 내는 칠면조…. 칠면조는 우리에게 감사를 생각하게 할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께 소리를 내게 하는 교훈을 주는 너무도 좋은 친구인듯합니다. 다음에 칠면조를 보거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요즘 ‘칩칩’ 소리를 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께 ‘칩칩’소리를 내는 자들에게 상상할수 없는 상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느 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칠면조와 천적이 족제비인데 족제비 박제 안에 작은 녹음기를 넣어서 ‘칩칩’ 소리를 내게 했습니다. 모양은 족제비인데 칠면조 소리가 나니 어미 칠면조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족제비 박제를 안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녹음기를 끄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칠면조가 박제 족제비를 쪼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교훈을 우리들에게 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박제 족제비에 속으실까요? 속지 않으실까요? 제 생각에는 속으시는 척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신앙생활하다 보면 하나님께 대한 수수께끼가 종종 생기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밖으로는 족제비 교인으로 보이는데 축복을 받아도 이만 저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가 두 가지가 있을줄 압니다. 하나는 축복이 축복이 아니던가, 또 다른 하나는 족제비로 보이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있던가….

그런데 온전한 신앙인이 어디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온전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족제비의 모습을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남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하나님을 찾는 신음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뒤이어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찾는 신음 소리를 가슴에 안고 산 사람들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경에 나왔던 인물 중 흠이 많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는 족제비 중에 족제비였습니다. 수많은 여인을 거느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열왕기상8:27-53절까지 27절 안에 무려 13번 ‘들으시옵소서’ 간구합니다. 30절 말씀만 봉독해 드리면,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가 안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각 중에 어느 감각을 가장 많이 사용할 것 같습니까?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다섯 가지 감각 중 무엇을 제일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저를 보고 있습니다. 또 듣고도 계십니다. 물론 정말 귀담아 듣는 분은 또 얼마가 될지 알수는 없구요…. 그렇다면 쉽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보는 감각을 제일 많이 사용합니다. 아마 요즘 콤퓨터 시대 스크린 시대에는 더 많아 졌을줄 압니다. 최소한 70%의 감각이 보는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사진이 중요한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빨리 후다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 봤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나름대로 평가를 마칩니다.

지난주 토요일 쉐마의 밤에는 특별히 상록기도회 어르신들을 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로 오신 권사님께서 제가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으니 저를 보고 말씀하시길,

“주일에 강단에서 보이던 모습보다 젊으시네요.”

우리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귀를 기울여 듣지를 못합니다. 안합니다. 결과 수많은 사람들을 족제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십니다. 족제비로 보여도 모른척 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 안에서 들려 오는 ‘칩칩’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듣는 감각이 70%인 것 같습니다. 아니 99%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듣는 감각이 70% 아니 99%이겠습니까?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가 보이지만 우리들의 가슴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듣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축복하십니다.

 

한편 하나님을 찾는 분들의 특징은 또한 듣는 사람들이 되어 가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들으시는 분임을 믿기에 본인 스스로도 듣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겠습니까?

지난주 설교시 한국학교 관계자들과 여선교회 분들을 언급해 드리며 감사의 뜻을 표했는데 몇 그룹만 더 말씀드리면…, 지난 주 중고등부 졸업파티가 있었습니다. 특히 교사분들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보이는 것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향한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봅니다.

이달말에는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가 열립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학생들을 향한 마음의 소리를 들을수 있다면 어떨까요?

매 주일 소그룹 성경공부가 진행됩니다. 인도자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더 놀라운 축복이 임하지 않을까요?

아울러 교인위원회에 속한 구역장님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대한다면 훨씬 더 큰 상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게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물론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은 주로 선생님들과 인도자분들을 언급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상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작년도 장신대에 방문했을 때 서점에 들렸었는데 서점에서 김기석 목사님 책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장신대 집회 강사로 초청 받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한국에 이런 좋은 목사님이 계시구나 아주 기뻤습니다.

그분의 글 중에 ‘인류 대표로 서다’라는 글이 또 눈에 띄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대사를 가지고 글을 쓴 것입니다. 이런 대사를 소개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거다.”

이 시간 베케트의 사상을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도로 이런 대사를 썼는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귀한 멧세지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김기석 목사님인 이런 질문을 찾은 것입니다. 누가 인류의 대표가 될 것인가? 김 목사님은 다른 대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대답을 찾아 봅니다.

“칩칩.”

하나님을 찾는 자들.

하나님께 ‘칩칩’ 소리를 내는 자들이 바로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이 아닐까요? 이들의 이름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

‘칩칩’ 소리를 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교우 여러분

인류의 대표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발합니다. 아울러 이웃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살아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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