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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한 알 그대로 있고”

 

본문: 요한복음 12:20-25

1801년 이조시대 순조1년에 천주교에 대한 심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유박해입니다. 그 당시 감옥에 갇힌 20세가 된 어느 여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습니다. 끝부분만 소개해 드립니다.

“영결을 아뢰는 붓을 드니 천 갈래 만 갈래 이야기가 그칠 길이 없고 허다한 생각은 한 자루 붓으로는 다 쓸 수 없어요. 다 적지 못하고 그치니, 이후 내내 착한 일을 행하여 공을 세우세요. 몸을 편안히 하고 영혼을 개끗이 하여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 내 부모와 형 부모를 즐거이 모시고, 우리 형제가 천국의 삶을 누리며 영원 동락하기를 우러러 바라니, 죽은 다음에도 시시로 간구할 거예요. 행여 내 이 바람을 못 이루고 살아나게 되면 어찌 될까 이리 두려우니 죽어도 슬퍼들 마세요.

제 처음 감옥에 잡혀 올 때, 바라던 일이 쉬 이루어질까(죽을까) 하여, 두어 자 이별의 말을 어머님께 아뢴 게 있지요. 이 편지를 보신 후 니동 형님 주어 날 본 듯이 보게 하세요.

종이에 가득한 허다한 이야기가 자기는 착하지도 못하면서 남은 착하라 권하니, 진실로 길가의 장승이 자기는 길을 알려 주면서도 스스로 돌아갈 길은 모르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 하지 않던가요. 죽을 사람의 말은 그르지 않으니 잘 받아 주세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20세가 된 여인이 순조가 왕이 된 후 감옥에 갇혔고 죽음을 기다리며 이런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이순이입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 때부터 많은 처녀들이 동정녀 마리아를 본받아 독신으로 평생 지내기로 결심하였었는데 이순이도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문모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에 대해서는 몇 달 전에 한번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청나라 신부로서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박해를 피해 청나라로 돌아가다가 “내가 피를 흘려야 이 박해가 끝이 난다” 고백하면서 조선 땅에서 순교한 첫 외국인 신부입니다.

그런데 이 주 신부를 만나 의논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동정을 지키면 되지 왜 신부님과 상의를 할까 지금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이 당시는 처녀가 혼자 산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던 시대입니다.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시대이죠.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웃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님과 상의를 한 것입니다.

그때 주 신부의 머리에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에 살고 있는 유중철 청년이 떠올랐습니다. 이에 곧장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합니다. 소위 말해서 동정 결혼을 한 것입니다.

16세에 결혼을 해서 20세에 순교를 했으니 정식으로 4년간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4년동안 동정을 지킵니다. 사실 이순이는 고백하기를 4년간 10여 차례 육체적인 유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의 고통과 피를 흘리신 사랑에 의지하여 무사히 그 유혹을 이겨냈다고 고백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인해 동정 결혼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이 떠 오릅니다. 동정 결혼이 박해를 받을만한 죄인가?

 

잠시 조선 역사를 뒤 돌아 보면, 원래 조선 정치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이어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색당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인 중에 천주교인들이 많았기에 결국 북인들로 인해 천주교박해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20세 여인이 무슨 정치적 야심이 있어서 감옥에 갇혔겠습니까? 순전히 천주교인이기에 감옥에 갇힙니다. 곧 이순이는 동정 서원을 지킬뿐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지 않기에 끝내 순교를 당합니다. 그녀는 부패한 정치로 인한 희생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의 야심으로 인해서 꽃다운 20세의 여인이 처형을 당할수 밖에 없었던 이순이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생각이 오갈줄 압니다. 이순이의 순결한 신앙이 더 없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한편 또 다시 정치인들 특히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올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더 나은 때 살고 있다고 생각할수 있을까요? 1800년대나 지금 2010년대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함께 계실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주님은 강자들에 의해서 약자들이 늘 희생을 당하는 시대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조시대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지만 사실 주님께서 사신 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추악했습니다.

주님은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의 깊은 문제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뿐 아니라 이 당시 평민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 특히 평민들이 많이 따랐는데 이 수많은 평민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런 아픔을 갖고 있는 평민들이 등장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주석가들도 헬라인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방인이고 아마 유대교를 믿던지 아니면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게 되었던지 둘 중에 하나일줄 압니다.

헬라인이 유대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 온 것을 보면 그들은 헬라인의 벽을 넘어 참 종교를 찾고자 했고 또 찾은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참 종교는 찾았지만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을 볼 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악인들이 잘 되고 착한 자들이 박해를 받는 세상을 보면서 많이 고민했던 사람일줄 압니다. 요즘도 뜻 있는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악인들이 잘 되고 의인들이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고민 아닙니까? 이것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지구상에서 변함 없이 존재해 온 세기적인 고민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마 헬라인들도 세기적인 고민을 안고 찾아 왔을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세기적인 고민을 갖고 찾아 온 헬라인들이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아마 로마 정치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 안에 있는 무지 무지한 파워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계십니다. 밀알 안에 있는 무지 무지한 파워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밀알이 되실 것을 예고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밀알만이 이 세상의 소망임을 나타내 주고 계십니다.

 

이조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왜 정치인들의 기득권 싸움에서 천주교인들이 희생을 당해야 합니까?

이 때 주님은 같은 답변을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의 밀알 안에 있는 무지무지한 파워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만이 오고 가는 시대의 소망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차동엽 신부이자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곧 이순이 등 이조시대 천주교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에 다음과 같은 서평을 썼습니다. 당신은 서평을 쓰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하면서 두번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조선 후기 쇄국과 개방의 거대담론적 갈등 국면이 놀랍도록 일치하는 오늘의 데자뷰적 현실에 한 줄기 성찰의 빛을 던져 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스라치도록 내 몸을 전율시킨 것은 지식층이 머리싸움을 하며 기득권 놀음을 하는 동안 서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진리에 올인하여 몸싸움을 치러야 했던 모습이 이 시대의 아픔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곧 이순이와 같은 서민들은 이조시대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워싱톤 DC에서 NCKPC총회가 열렸었습니다. 아시는대로 제가 총회장으로 섬겼던 총회였습니다. 오래 전 저희 교회를 출석하셨던 옥성득 교수님께서 특강을 맡으셨습니다. 첫 날은 광복후 70년간의 한국 교회사를 뒤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귀에 강하게 들어 온 말씀 하나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지금이나 70년 전이나 항상 같은 것의 반복입니다.”

교회들의 문제는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70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무엇이겠습니까?

밀알 안에 있는 무지 무지한 파워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잘 아실줄 압니다. 지난주 연방대법원에서는 예상한대로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판결이 났습니다. 물론 저희가 사는 매사추세츠주는 오래 전에 통과가 되었지만….

오늘의 이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헬라인과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주님께 찾아 와 주님과 면담을 요청한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잠시 세상 권세 잡은 자들로 인해 이런 저런 판결이 내리지만 끝내 영원한 수 많은 결실을 맺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이순이와 같은 한 알의 밀알들이 아닐까요?

몇주전부터 강단 스카프가 초록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초록색은 성장을 상징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장의 계절이 돌아 왔습니다. 밀알 안에 있는 무지무지한 파워가 나타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파워가 언제 나타나나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한 알 그대로 있고.”

무지무지한 파워를 체험하는 성장의 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75년전에 Wilma Rudolph라는 여자 아이가 4.5 파운드로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립니다. 몇 년간 다리를 brace를 하고 생활합니다. 그러나 Wilma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 운동선수가 됩니다. 로마 올림픽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났지만 온 가족은 Wilma안에 있는 무지무지한 파워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윌마보다 더 무지무지한 파워를 발휘한 여자 아이는 바로 이순이 여인이 아니었을까요? 윌마나 이순이나 모두 한 알 그대로의 인생을 살기 쉬운 환경 가운데 태어났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잘 알았습니다. 도리어 죽어짐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자신 안에 주어진 무지무지한 파워를 매일 체험하였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한 알 그대로 있기 쉬운 환경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유혹에서 뿌리치고 일어나십시다. 살려고 할 때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죽으려고 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순이의 이야기가 오늘까지 살아서 성적으로 타락해 가는 이 시대에 놀라운 사표가 되듯이 우리들의 작은 삶도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한 알 그대로 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바로 십자가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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