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수없이 설계했다고 합니다. 라이트가 은퇴할 무렵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동안 설계하신 근사한 건축물 중에서 어떤 건축물이 가장 마음에 드세요?”
그러자 라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다음에 건축할 건축물이죠.”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내포된 말입니다.
저는 건축가는 아니고 목회자인데 목회자의 가장 큰 사역 중 하나는 설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묻습니다.
“그동안 하신 설교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설교는 무엇입니까?”
저는 마땅히 이렇게 대답해야 하겠죠?
“그야 다음에 할 설교이지요?”
교우님들은 설교자가 아니니 다른 질문을 각자 생각해 보셔야 할줄 압니다. 제가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하신 섬김 중에 어떤 섬김사역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합니까?”
마땅히 대답은 이래야겠죠?
“그야 다음에 할 섬김사역이지요….”
그러면 어떤 분들이 늘 다음에 할 섬김에 관심을 가지고 한 섬김 한 섬김을 정성스럽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사도바울은 두 가지를 믿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 이 땅 위의 장막 집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장막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평생 최고의 섬김을 하나님께 드린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장막 집은 언젠가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막 집이 무너졌을 때 하늘에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이 땅의 장막 집에서 최고의 섬김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축복된 삶을 살까요? 영원한 집이 보장되었으니 이 땅에서는 마음껏 자기 멋대로 살게 되지는 않을까요?
사실 사탄은 이런 것을 이용해서 종종 기독교의 탈을 쓰고 이단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이고 십자가를 앞세우지만 끝이 다른 이단이 언제나 나타나곤 했습니다. 곧 영원한 집이 보장되어 있으니 이 세상 장막에서는 마음껏 살자고 유혹을 합니다. 이단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요소가 어느덧 전통 기독교인들의 삶에도 많이 들어 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기에 천국은 보장되었다고 믿습니다. 어짜피 천국에 갈 것 이 땅에서도 삶을 즐기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척 자연스런 발상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번에 한국 방문 중 새삼 느낀 것은 요즘 한국 기독교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늘의 삶이 보장된 것을 믿는 것은 좋은데 한편 이 땅에서의 삶도 세상사람들 처럼 즐기려 하기에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자연스런 발상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아니 사도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가질수 있는 자연스런 발상에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2절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의 신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신비스러운 처소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가 보장된 것을 믿는 자들은 그 나라의 신비를 사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교육을 통해서 유대교에 머무르기만 했어도 훨씬 편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 나라의 신비 특히 자기의 영원한 장막집의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장막집에서는 탄식과 함께 하늘의 장막집을 사모하면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장막집을 사모할 때는 어떤 또 다른 이단의 요소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 조금 전에 언급해드린 이단과 다른 이단이 살짝 스며들어 올 공간이 생깁니다. 이 땅의 것은 아주 무시하고 하늘의 신비만을 사모하는 자들이 생길수 있습니다. 종종 기독교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중세기 수도원에서는 종종 수도사들이 채찍으로 자신을 학대하곤 했습니다. 이는 대표적으로 하늘의 신비만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땅의 장막을 떠나 장막을 벗는 것이 아니라 이 장막에 하늘의 장막이 덥혀 씌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이 땅의 장막과 하늘의 장막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보충하고 조화가 되는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단은 이 땅의 장막과 하늘의 장막을 어떻게 해서라도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반면 참 기독교는 그것은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조화의 관계를 잊고 살 때 극단으로 향합니다. 하늘 나라 보다는 이 땅에서 즐기려고 하던지 아니면 하늘 나라에 갈 생각을 하면서 이 땅에서는 스스로 쓸데없는 자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 장막의 삶과 이 땅의 장막의 삶은 신비하게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 우리들 상상으로는 감히 추측할수도 없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늘의 장막과 이 땅의 장막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들에게 확실히 알려주는 분이 계신데 바로 성령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래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이 지금은 어디에 와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들 곧 이 세상의 장막에 살고 있는 우리들 안에 거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곧 성령은 하늘의 장막과 이 땅의 장막을 신비스럽게 연결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장막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늘 장막에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이 땅의 장막에 사는 동시에 하늘의 장막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령이 함께 한 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성령은 우리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십니다. 일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우리들의 장막으로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꿈틀 거리십니다. 그런데 어디를 향하여 꿈틀거리실까요? 하늘의 장막으로 향하여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십니다.
지난번 한국 방문시 어느 책방에 들렸었습니다. 한 책 제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토마스 칼라일의 말을 인용합니다.
“목표(방향)가 확실한 사람은 아무리 거친 길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목표(방향)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께서 이 땅의 장막에 사는 우리들에게 와 계십니다. 이 성령께서 어디로 우리를 향하여 꿈틀 거리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장막으로 향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곧 이 땅의 장막에 살면서 마음으로는 하늘의 장막으로 향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바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음으로는 하늘의 장막과는 거리가 멀다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섬김과 함께 신비한 하늘의 장막을 사모함이 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는 섬김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땅의 장막에서 살다보면 하늘의 장막으로 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갈팡질팡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신 성령께서 언제든지 우리를 하늘의 장막의 삶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늦는 것 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방향이 아주 확실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사도바울의 삶의 방향은 주님과 하늘의 장막에서 영원히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방향을 갖고 있었기에 지금 그 누구 보다도 하늘의 장막에서 놀라운 만남을 주님과 누리고 있을줄 압니다.
오늘 청지기 헌신주일로 지킵니다. 이 땅에 살지만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잘 되어 있는지 잘 못 되어 있으면 새롭게 방향을 잡고, 잘 되어 있으면 계속 그 방향대로 살기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주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이 땅의 장막에 사는 시간을 잘 관리하시고 계십니까? 어떤 방향으로 시간을 사용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장막에 주어진 물질을 잘 관리하시고 계십니까? 어떤 방향으로 물질이 사용되고 계십니까? 계속 이 땅의 장막을 가꾸는데만 사용되지는 않으십니까? 하늘의 장막을 가꾸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를 마지막 9, 10절 말씀이 확증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심판대 위에 선 다음에는 우리가 지은 하늘의 집에 들어가게 될줄 압니다. 그 집은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가꾼 집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줄 압니다. 저희 집에는 pet을 기르지 않습니다. 대신 자연 pet을 기르는데 다름 아닌 다람쥐입니다. 머리를 식히려고 뒷뜰 deck에 나가면 저의 눈은 항상 다람쥐를 찾습니다. 다람쥐가 보이면 “Kissy”하면서 부릅니다.
그런데 이사 간 후 얼마 안 되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람쥐들이 종종 이웃집에 사는 고양이들로 인해 장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 다람쥐들이 와서 저의 집 뒷뜰에 집을 짓곤 합니다.
제가 관찰한 것은 이 다람쥐들은 절대로 이미 지어진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람쥐들은 언제나 자기가 손수 판 집에 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다람쥐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새 집을 짓는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람쥐는 우리 인간들에게 귀한 멧세지를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다람쥐가 늘 자기의 새 집을 짓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자기의 새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모든 다람쥐는 자기나름대로의 특유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가정만 하더라도 이미 지어진 집으로 이사 들어갔습니다. 다람쥐가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남이 살던 집에서 사냐고 비웃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비웃는 다람쥐를 향하여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집보다 더 소중한 집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늘의 장막집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고 그 집은 내가 이 땅에서 아니 남들이 지어 놓은 이 집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새롭게 지어져 가는 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언젠간 아무도 살지 않은 집에 살게 될줄 압니다. 그 집은 바로 우리가 이 장막집에서 지어가는 집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보게 될 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막집과 하늘의 장막집은 너무나 신비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곧 멋진 하늘의 장막집을 만들어 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땅 위에서의 장막집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신 분들은 멋진 하늘의 장막집을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 장막집을 짓고 계신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여쭙니다.
“그동안 하신 섬김 중에 어떤 섬김사역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일은 한국에서 지냈는데 제가 묵고 있던 곳에 가까운 연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도보로 30분 걸린다고 해서 약 40분 전에 집을 나왔습니다. 연동교회를 향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길이 막혔습니다. 공사로 인해서 인도를 폐쇄했습니다. 어쩔수 없이 돌아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공항에서 간단한 전화기를 빌렸기에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으로 무작정 걸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발은 무작정 걸어 갔지만 마음으로는 한 군데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연동교회.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도 않았는데 10분 전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연동교회로 향하니 끝내 연동교회로 가게 되더라구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이 땅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를 향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장막집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 장막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 마음을 따라 우리의 행함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 장막에서 하늘 장막을 향하십시다. 우리들의 섬김은 갈수록 하늘나라를 부요케 하는 최고의 섬김이 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