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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신 왕 (누가복음 19:28-40) 03/21/2016

 

어느 목사님이 당신의 30분 설교를 늘 지루해 하는 성도들을 보다가 어느 날 극장에 갔더니 관객들은 두 시간 이상 배우가 연기를 해도 지루해 하지 않고 열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배우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많은 청중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내가 믿는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배우나 배우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뼈를 깎는 훈련을 받곤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마도 그럴수 밖에 없을줄 압니다. 믿지 않는 것도 믿는 것처럼 표현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할줄 압니다. 그런 배우들의 연기에 관중들은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설교는 어떤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줄 압니다. 한편 설교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물론 후에 능력의 종 바울이 다시 살리기는 했지만…. 아마 사도바울도 믿는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설교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에서 주님의 설교가 지루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배우들은 무대에서만 확신에 찬 연기를 하지만 주님은 모든 생애에서 확신에 찬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특별한 배우가 아니었나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바로 이 특별한 배우가 등장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평범한 말씀 같지만 사실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자가 이것을 기록한 숨은 의미는 그동안은 주님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서 걸어 다니곤 하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갑자기 어느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주님이 앞장 서셨습니다. 배우처럼…. 제자들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혼자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깊게 생각하시면서 발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스가랴 9:9절 말씀이 떠 올랐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스가랴 9:9절이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전 500년전에 쓰여진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야 함을 아셨을 것입니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 제자 둘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물론 제자 둘은 무조건 주님께 순종합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동안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해서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 그대로 순종하였을줄 압니다. 또 하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표현으로 위엄찬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위엄에 눌려서 그냥 순종케 되었을줄 압니다.

하여튼 주님은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시면서 나귀 새끼에 올라타십니다.

드디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배우가 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배우는 믿지 않는 것을 믿는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믿는 것을 믿는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인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좀 의아했지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5천명 이상 먹이시고도 남게 하신 분인줄 잘 아는 제자들은 주님은 나귀 새끼로도 세계를 뒤 엎으시고도 남으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귀 새끼 등에 자기들의 옷을 펼쳐 놓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귀새끼가 밟는 땅에 자기들의 겉옷을 펼쳐 놓습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따라 합니다. 그들이 따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제자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주님이 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보았기에 기뻐하며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알고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동기이던 이에 찬양 소리가 주님의 귓전을 울립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주님은 제자들과 따르는 자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요? 속된 말로 기분이 좋으셨을까요? 세상적인 욕심으로 부르는 찬송인데…. 이는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무리들의 찬송소리를 듣다 못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나무랍니다.

39 절 말씀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정말 바리새인들 대단합니다. 무리들의 불순한 의도를 자 파악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에 주님이 답변하십니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주님은 도리어 무리편을 들고 계십니다.  

 

 바리새인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그렇다고 무리에 편을 드시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주님과 무리들의 모습을 한자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주님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았기에 호산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무리들에게 “너희는 내가 왜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찬송부를 자격이 없다” 외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한 발 더 나가서 무리들이 찬송을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반박하십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표현 아주 시적인 표현입니다.  

한번도 공생애 기간 찬송받기를 꺼려하시던 주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을 찬송받기에 합당한 자라고 당당히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특히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당신의 모습은 영원한 찬송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주님은 아무도 모르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가 신학교 재학중에 예루살렘에 가서 한 달 간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기억에 남는 것 중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문이 있는데 한 쪽은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안내자가 하시는 말씀이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이 로마의 황제 타이투스에게 멸망하는데 타이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파괴 시킨 후 자기의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려하는데 예루살렘 문이 좁아서 한 쪽 성문을 파괴시킨 후 자기의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왔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약 40년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다음 귀절에 보면 주님이 내다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미래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43절 말씀만 보면,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주님은 언젠가 타이투스로 인해서 돌로 만들어진 이 성문이 무너질 것을 보신 것 같습니다. 언젠가 타이투스로 인해 파괴될 돌들을 생각하면서 이 고백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돌까지 아파할수 밖에 없는 미래의 민족적 대비극을 생각하며 주님은 시인이 되어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찮은 돌마저도 잘 알고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타이투스는 예루살렘 성문은 부술수 있어도 세상은 구원할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 세상 구원은 어떻게 올까요?

 

Ronald Rolheiser라는 영성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레슬링 선수와 갓난 아기가 한 방에 있으면 누가 이길 것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아기가 레슬링 선수가 하자는대로 할까요? 아니면 레슬링 선수가 아기가 하자는대로 할까요?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The power of weakness라고 표현합니다.

레슬링 선수를 이길 자는 축구 선수도 아니요. 농구 선수도 아니요 권투 선수도 아닙니다. 갓난 아기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자도 누구겠습니까? 레슬링 선수? 축구 선수, 농구 선수…? 갓난 아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주님도 하나님을 이기기 위하여 레슬링선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갓난 아기가 되셨습니다. 갓난 아기가 되어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떼를 쓰기 위하여 주님은 갓난 아기처럼 되셨습니다. 말을 타신 것도 아니고 나귀를 타신 것도 아니고 갓난 아기인 새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주님은 Power of weakness를 믿었습니다. 믿은대로 연기를 하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 길만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길임을 확신하셨습니다. 최고의 배우가 되신 것입니다. 믿은대로 연기를 하는….

한편 주님은 무리들의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언젠가 이 무리들도 지금은 아니지만 power of weakness의 증인이 될 것을 믿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은 동상이몽일지라도….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말이 맞습니다. 무리들은 당신과 동상이몽 중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무리의 편을 드십니다. 이유는 무리는 약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강자입니다. 이 무리가 후에 주님을 배반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게 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무리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당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대제사장들이 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끝까지 약한 자 편에 서셨습니다. 무리는 단지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이용 당하는 약한자들이었습니다.

 

몇년 전 실험용 제트기 한 대가 캘리포니아의 에드워드 공군 기지를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제트기의 조종사가 착륙을 위해 앞 기어를 낮추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부조종사가 제트기의 문제 확인에 나섰고, 계전기 판에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계전기 판을 받쳐 앞 기어를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할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종이 클립 하나가 보였고 그는 클립을 구부려 계전기 판을 받칠 수 있게 했습니다. 앞 기어는 다시 움직였고 제트기는 끔찍한 사고를 면할수 있었습니다. 그 위험한 순간에 다른 그 정밀한 장비보다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그만 종이 클립 하나였습니다.

 

약함의 파워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클립 보다도 더 작은 자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작아지셨습니다. 주님은 약함의 능력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약하신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의 아픔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주님은 약함의 능력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확신을 안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확신을 안고 오늘 종려 주일을 맞아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 오십니다.

교우 여러분,

나귀새끼를 타시고 오시는 왕이신 주님을 찬송하십시다. 종려 나무를 흔들면서 맞이 하십시다. 주님은 약한 자들의 찬송을 받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탈북민들의 교회를 섬기는 강철호 목사님이 계십니다. 사실 이 분도 탈북민이십니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주님을 영접하고 그후 큰 꿈을 안고 한국으로 옵니다. 정착하느라 무척 어려운 시간을 보냅니다.

하루는 사는 집 앞에 할아버지들이 모여 언성을 높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호기심에 그분들의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는데 심장이 멎을만한 경험을 합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모여 있는 할아버지들이 대통령을 욕하는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놈의 반동들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충격을 안고 공중전화에 가서 어느새 112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잠시 후 어처구니 없는 전화를 받고 달려 온 경찰관들은 신고를 한 강 목사님을, 물론 그 때는 목사님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취급을 하면서 웃으며 평생 가슴에 남는 말을 합니다.

“강 선생님 여기는 북한이 아닙니다.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만약 오늘이라도 강 선생님께서 대통령에 대해 불만이 있으시면 청와대 앞에라도 가서 시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대통령이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니?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혹시 이 사람도 반동 아닌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경험을 했던 강철호씨는 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놀라운 격려의 말씀을 듣습니다.

“탈북자 한 사람이 철저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면 북한 땅에 교회가 하나 세워지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이 말씀에 힘입어 그는 탈북자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고 7년만에 120성도를 전도하고 교회 건축까지 하는 놀라운 일을 감행합니다.

그는 주님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한국에 입성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함이 강함이라는 확신 가운데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귀한 축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나귀 새끼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찾지 않으실까요? 그들과 더불어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약함이 바로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들의 약함은 무한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능력도 무한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약함을 사랑하십시다. 이 놀라운 믿음을 안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주님을 맞이하십니다.

“호산나!”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통해 세상은 뒤바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돌들이 부를 것입니다. 돌들이 부르기 전 우리가 부르십시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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