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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사람 디모데 (사도행전 16:1-10) 05/29/2016

 

다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느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때는 1938년 히틀러의 독일에 병합되기 직전의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롬베르크 수녀원의 견습 수녀 마리아는 노래를 좋아하는 쾌할한 성격의 아가씨입니다. 매일같이 수녀원 뒤에 있는 들판에 올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종종 기도 시간을 놓치고 미사 시간에 늦는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 수녀원에서는 천성이 순수하지만 늘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는 마리아의 수녀 자질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고 평소 마리아를 아끼던 원장 수녀는 교외의 한 가정에 마리아를 가정 교사로 추천합니다.

마리아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아내와 사별한 귀족 출신의 퇴역 해군 느라프 대령의 일곱 아이들과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결국 함께 노래를 부르며 마리아에게 마음을 열게 된 일곱 아이들은 그녀의 진심 어린 사랑을 깨달아 어머니처럼 따르게 되고 음악으로 한 마음이 됩니다. 결국 가족은 나치의 소집 명령을 거부하고 도피하던 도중 가족 합창경연대회에 참가해 1등 수상자가 되지만, 수상 무대에는 오르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으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1959년 11월부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1443회 연속 공연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작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말괄량이 견습 수녀 마리아와 퇴역 해군 대령 트라프 남작, 그리고 그의 일곱 아이들이 모두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트라프 가족의 이야기가 실재했던 ‘진짜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이 망명한 나라가 스위스가 아닌 미국이라는 것, 그리고 망명 이후 1940년부터 1955년까지 ‘트라프 가족 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아름다운 공연을 펼쳤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얼마전에도 보스톤 지역에 ‘사운드 오브 뮤직’ 뮤지칼이 공연되었다는 말을 뒤 늦게 들었습니다만 이 처럼 ‘사운드 오브 뮤직’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한 여자 소녀 아니 한 여자 청년의 결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의 결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자기가 받은 소명은 수녀원 밖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 따른 바른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한 청년의 결단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청년의 결단은 어떤 결과를 가져 올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사도바울의 두번째 선교 여행입니다. 사도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세 번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첫번째 선교 여행은 소아시아 지방에 국한된 선교 여행이었고 두번째 선교 여행도 사실은 소 아시아지방만을 순회할 마음으로 떠나게 됩니다. 15:36절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이 말을 하고 두번째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곧 두번째 선교여행도 소아시아지방을 순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번째 선교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바울은 디모데를 만납니다. 아마 첫번째 선교여행을 통해서 스승 제자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하여튼 디모데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자였으니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사실 사도바울은 더 이상 할례가 필요 없는 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총회에 가서 더 이상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증언했고 또 총회장 야고보를 통해서 확인을 직접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는게 더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유연성을 볼수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해서는 할례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 바울입니다. 그렇지만 할례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떠했을까요?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수제자이었으니 당연히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사도바울이 할례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할례의 고통을 받을 자는 사도바울이 아니라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할례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청년이었습니다. 보통 청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사도바울에게 도전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그동안 저에게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서 더 이상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디모데는 결단을 내립니다. 할례를 받기로…. 그렇다면 디모데는 사실상 두 가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는 사도바울과 함께 험한 선교 여행을 떠나는 결단을 내립니다. 두번째로는 아무 소용없는 할례를 받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존경하는 스승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자, 그러면 디모데의 결단 후 어떠한 결과가 나오나요? 5절 말씀입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우연일까요? 청년 디모데의 결단 후 사도바울의 선교는 꽃이 활짝 피게 됩니다. 정말 디모데는 훌륭한 결단을 내린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결단의 결과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디모데의 결단 이후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벽에 부닥쳤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디모데의 합류가 나쁜 징조였을까요? 8, 9절 말씀입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드디어 환상 중에 바울은 선교가 벽에 부닥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의 계획은 소 아시아 지방이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지를 둘러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도리어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헬라 문화의 원조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아버지가 어느 민족 사람이었다구요? 헬라인이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바울은 실라와 함께 디모데와 선교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만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대신 환상 중에 마게도냐인 헬라인 중에 헬라인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이도 우연일까요? 10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디모데의 결단 후 소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그 후 사도바울은 선교 여행의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 곧 헬라문화권의 중심지로 향하게 됩니다. 헬라인 아버지를 둔 디모데와 함께….

 

그렇다면 디모데가 만일 사도바울의 할례를 받으라는 권유를 거부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마게도냐 선교의 문을 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가정하기 위한 학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의 사건 안에서 교훈을 받기 위한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결단의 사람이 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단도 때로는 이해할수 없는 것도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로 그런 결단을 내렸고 그래서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결단과 함께 소아시아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끝내 마게도냐로 펼쳐지는 넓고도 넓은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맛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은 사도바울도 예상하지 못했던 축복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이집트에 팜부스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팜부스는 3년 동안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님, 세상에서 저를 영화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오히려 팜부스를 더 영화롭게 해 주시어 그의 얼굴의 빛나는 광채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다른 지방에서 네 명의 수도자가 팜부스를 방문하여 저마다 자기 형제들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수도승은 금식을 잘했고, 두 번째 수도승은 가난했으며, 세 번째 수도승은 큰 사랑을 간직하며 살았고, 네 번째 수도승은 22년 동안 한 원로에게만 순종하며 살아 왔다고 말들을 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팜부스는 그 중 한 사람의 덕이 가장 위대하다고 칭찬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 수도승은 금식을 잘했고, 두 번째 수도승은 가난했으며, 세 번째 수도승은 큰 사랑을 간직하며 살았고, 네 번째 수도승은 22년 동안 한 원로에게만 순종하며 살아 왔습니다.

첫번째도 두 번째도 세번째도 아닌 네번째 수도승이 가장 위대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수도승이 자기 뜻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위대함도 바로 자기의 스승의 뜻을 따름에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디모데도 사도바울의 논리에 쉽게 동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할례를 본인 스스로가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머리로는 동감을 했어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결단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곧 디모데의 결단은 자기의 뜻을 버리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뜻을 버리고 사도바울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는 누구보다 신학적인 지식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신학적 지식도 버릴 때는 버리는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결단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과 더불어 새로운 선교 역사를 펼쳐 간 것이 아닐까요?

디모데는 사도바울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도바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사람에게 순종할 때 그 사람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결단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의 사람과 함께 오늘도 일하십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도구일뿐입니다.

 

여기에 결단의 신비가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갖고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한 마음으로 결단하면 끝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선한 마음으로 결단하느냐 안 하느냐 입니다. 선한 뜻을 안고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다음의 동화 이야기가 결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밝혀줍니다. ‘생명의 물’이라는 동화입니다. 막내 아들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생명의 물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막내아들은 그 여행에서 자신의 두 형들도 찾고자 했습니다. 한 난쟁이가 그에게 형들은 나쁜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들을 찾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막내는 그들을 계속해서 찾아다닙니다. 그가 마침내 형들을 찾았지만, 생명의 물을 찾은 동생을 시기한 형들은 그 물을 빼앗고 대신 그의 잔에 바닷물을 담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바닷물을 마시고 거의 죽을 뻔하게 됩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사냥꾼에게 막내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그는 숲 속으로 도망쳐 몸을 숨깁니다. 훗날 그는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마침내 공주와 결혼합니다. 반면 못된 형들은 슬그머니 도망칩니다. 막내 아들은 그릇된 결정을 내린 듯 보였지만, 그의 결정은 결국 축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쁜 일인줄 뻔히 보이는 것을 결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위하여 결단을 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지만 결국은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단하는 자들은 언젠가는 큰 축복을 누리고야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경우 그 축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축복으로 찾아 옵니다.

 

이처럼 디모데는 처음에 바울이 할례를 받으라 할 때 많은 혼동이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뜻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상상할수 없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로 인하여 복음은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아니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우리들에게도 환히 열려 있습니다. 결단의 사람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저희 교회에서 보스톤 노회가 열렸습니다. 여선교회분들의 정성스런 음식과 함께 저희 교회는 예년처럼 좋은 hospitality를 보여드렸습니다. 사실 작년 5월에도 노회를 열었기 때문에 저희는 내년에 해도 충분한데 요즘 많은 노회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이라서 저희 교회가 또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노회 미팅에서 저희 교회가 Roxbury교회를 위해서 모금한 것을 노회 석상에서 드리는 순서도 갖게 되어서 여러 모로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총회 총대로 파송되는 저를 포함한 세 사람을 축복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저희 교회에서 또 다시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노회가 전체적으로 활기를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너무나 잘 아는 노회 총무가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하든 활기를 불어 넣으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계속 하시는 말씀이 “We are amazing”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서도 있어서 앞에 앉아 있었는데, 노회 총무는 열을 내어 “We are amazing”하는데 반응은 냉냉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We are amazing”하길래 제가 제일 앞에 앉아 있다가 “Yes”그랬습니다. 얼굴이 환해 지면서 저를 보더라구요.

사실 저희 교회도 이번에 노회 초청을 안 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저는 작은 결단을 내렸지만 실상 여선교회에서 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귀한 결단을 하였기에 amazing한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예측할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교우 여러분,

결단의 사람들은 amazing한 사람들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amazing한 청년이었습니다. 결단의 사람이었기에…. 하물며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디모데와 같은 결단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Amazing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결단의 사람이 되십시다. 나의 결단이 바른가 그른가 너무 고민 마십시다. 단순하게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결단을 내리십시다.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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