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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는 마음(디모데전서 6:3-10) 07/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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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디트로이트 경찰서인데 한 흑인 여자 아이와 경찰이 hug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장면입니다. 지난 7월9일 한 어린이가 경찰서에 찾아 와서 경찰들에게 선물을 드렸습니다. 옆에 서 있는 경찰의 손에 들려져 있는 lunch bag이 선물입니다. Samya라는 어린이가 손수 만들어서 모든 경찰들에게 선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Samya어린이가 선물을 했겠습니까? 바로 이틀 전인 7월7일 달라스에서는 경찰 5명이 사살을 당했습니다. 이 뉴스를 Samya는 부모님과 함께 보았는데 어머니가 물었다고 합니다.

“느낌이 어떠니?”

곧 바로 Samya는 경찰분들을 돕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생일이라서 생일 선물로 받은 돈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lunch bag을 만들어서 가까운 경찰서로 찾아 간 것입니다.

 

사실 저도 7/7일 달라스에서 경찰들이 사살을 당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상당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계속 뉴스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보도되는 소식은 저를 더 좌절케 하였습니다. 앞으로 계속 어려워질 것이 눈에 선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 속에는 ‘어느새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나? 누구 때문인가?’ 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한 두 번 언급해 드린대로 매일 콤퓨터를 키면 보는 싸이트가 있는데 좋은 이야기만을 골라서 보도하는 싸이트입니다. 그날의 cover story로 Samya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사실 이 싸이트는 자기들이 뉴스를 만드는 곳은 아니고 전국 내지 전 세계에 실리는 뉴스 중에서 좋은 뉴스를 퍼 실어오는 싸이트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보도한 곳은 디트로이트의 CBS였습니다. 저는 디트로이트판 CBS 뉴스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수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뉴스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꽃을 피운 자는 지식인도 아니요 종교지도자도 월스트릿에서 돈을 긁어 모으는 자도 아닌 한 어린이였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인용해 말씀드리면 하찮은 흑인 어린이였습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어른들은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교제를 하는데 이 어린이와 같은 지혜는 떠오르지 않을까? 이 어린이가 우리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까 아니면 기도를 더 많이 했을까?”

이 어린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박대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도리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성 교인들에게 없는 것이 이 어린이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3절 말씀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이 당시는 경건의 생활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크리스챤의 삶에서 경건은 너무도 중요하지만 특히 이 때는 경건하지 않은 교우들이 좀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16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곧 주님의 말씀과 경건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그 다음 두 절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말씀과 경건의 교훈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이런 아주 복잡하고 지저분한 어떻게 보면 지긋지긋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Samya의 이야기를 읽고 전처럼 뉴우스 채널을 자주 안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늘 두 진영의 사람들이 나와서 변론하고 언쟁을 합니다. 한 번도 두 진영이 마지막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리면서 끝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주장만 하다가 다음 순서로 넘어 갑니다. 물론 뉴우스를 알기 위해서는 보아야 하지만 Samya의 이야기를 읽은 후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보다는 더 큰 관심은 ‘어떻게 Samya의 통찰력을 가질수 있느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도 변론과 언쟁이 난무하고 있음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나의 성경해석이 옳고 나의 경건이 참된 경건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변론과 언쟁의 이유가 말씀 해석과 경건의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사도바울 눈에 비친 것은 다른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이던 다투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이런 저런 방법으로 늘 다툼 한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철학적 윤리적 신학적으로 멋지게 포장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여러 다툼을 느낄 때 우리는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나?’

 

어느 미국 젊은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감리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달리 감독이 목회지를 정해 줍니다. 감독의 명령에 의해서 시골 작은 교회에서 적은 사례비를 받으면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작은 회중을 사랑하였고 교우들도 목회자 부부를 사랑하였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목회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는 대개 3년을 주기로 목회자가 새롭게 임지를 옮기곤 하는데 여러 교회를 가는 곳마다 목회를 잘 감당하였습니다.

이제 20년이 지나 45세가 되었습니다. 우연히 감리교 연회의 보고서 제일 뒷장에 있는 목회자 명단과 사례금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안 보았는데 처음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본인의 사례는 중간보다 약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보다 더 많은 사례를 받는 목회자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어떤 목회자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오래 목회를 했는데 내가 더 적게 받네.” 또 어떤 사람을 보면서는, “설교나 모든 면에서 내가 더 난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목회하길 5년이 지났습니다. 매해 연회 보고서가 나오면 항상 제일 뒷 페이지를 봅니다. 그러면서 씁쓸한 마음을 더해 갑니다. 이제 50세가 되었습니다. 처음 가졌던 기쁨과 감사의 목회는 사라졌습니다. 시기와 원망이 가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납니다. 우연히 거울을 보는데 전에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날 밤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연회 보고서의 제일 뒷 페이지를 찢어 버립니다. 더 이상 그 페이지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은퇴까지 어떤 목회지가 주어질지라도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임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결심합니다. 나머지 15년 동안 그 결심대로 목회를 합니다. 그는 은퇴 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많은 어려운 시간이 있었지만 마지막 15년이 최고의 목회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계속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고 죽을 때까지 감사하겠습니다. 감사가 저를 살렸습니다.”

 

이 목사님이 성경을 몰랐을까요? 경건의 연습이 부족했겠습니까? 어느 순간 자족하는 마음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년간을 힘든 목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은혜 가운데 다시 자족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15년을 멋지게 목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15년간은 사도바울의 말씀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하는 마음과 더불어 평생 쌓아 놓은 경건의 시간들이 큰 이익이 되곤 한 것입니다. 사실 25살부터 목회를 시작하였고 그 전 신학교 생활 평신도 생활까지 합하면 거의 40년이상을 경건의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 보화가 자족하는 마음을 만날 때 놀라운 축복이 되어 간 것입니다. 반면 시험에 빠졌던 5년간은 그 귀한 보화가 불만의 마음으로 인해서 도리어 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족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들이 쌓아 놓은 경건의 시간이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소중한 자족하는 마음은 누구가 소유할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자족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7, 8절 말씀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자족하는 마음은 바로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대박이 터졌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데 생활의 기본권만 해결되고 그래서 그것으로 감사할 때 자족하는 마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생활의 기본권 이외의 것을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된다구요? 9, 10절에 잘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한 마디로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고치기는 커녕 스스로 많은 문제 가운데 휩싸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온갖 불행이 찾아 옵니다. 반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 날의 모든 불행도 능히 이겨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고 이들의 삶에서는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학계에서도 ‘행복’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Martin Thielen이라는 저자가 ‘Searching for Happiness’라는 책에서 현재까지 연구된 ‘행복’에 대한 자료를 발표하면서 몇 자기 결론을 내립니다.

많은 서구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우리들의 행복도에 10%밖에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곧 교육과 지식,부, 명예, 외모 더 나아가서 날씨, 인종 등은 행복과 크게 관계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리어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사회가 부요해질수록 행복도는 낮아졌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곧 자족하는 마음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인해 감사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삶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이 주는 행복은 잠시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자족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결국 부요해질수록 기본권으로 인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도리어 부와 여러가지 필수적인 것이 아닌 것을 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행복도는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되고 더욱 불행해집니다.

 

반면 자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은 행복해집니다. 그들이 닦아 온 경건의 훈련이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세상이 필요한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더 큰 기쁨에 동참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Don’t find a fault. Find a remedy.”

“잘 못만을 찾으려 하지 마세요. 고치는 법을 찾으세요.”

만일 자동차가 발명이 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자동차를 헨리 포드가 발명할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잘 못만 찾는 눈을 소유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잘 못이 보이는 순간 고치는 법을 찾아내는 눈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이런 눈이 주어질까요?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인해서 자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주에는 또 프랑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은 또다시 깊게 찢겨졌습니다. 세상을 찢은 자들의 잘못도 찾긴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치면 궁극적인 해결은 오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더욱 필요한 사람은 잘 못만 찾으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치는 법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온 세상이 필요한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만이 고치는 법을 찾는 지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많아질수록 찢겨진 깊은 골짜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전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최소한 이번 일주일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자족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시작하십시다.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십시다. 우리를 통해서 찢겨진 세상은 골짜기 골짜기마다 아름답게 꽃이 필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조금 전에 소개해드린 ‘Searching for Happiness’의 저자 Martin Thielen씨는 사실 목사님이십니다. 그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Nashiville Tennessee에 사실 때 자주 ‘Mr. Gatti’s Pizza’집에 자주 갔었다고 합니다. 특히 화요일 저녁은 ‘all you can eat’이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좋아해서 자주 다녔었는데, 어느 날 파킹랏에 도착하니 차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문을 닫은 것입니다. 모든 가구는 치워졌고, ‘for sale’싸인만 달랑 문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차 안에 들어와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말도 없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데 6살 난 딸이 뭔가 의미 심장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문 닫은 걸로 화를 낼게 아니라, 그동안 이 곳에서 와서 즐긴 시간들로 인해 감사해야 하지 않아요?”

기본권에 대해 감사하는 어린이와 그렇지 못한 아버지 목사님의 모습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딸은 아버지 목사님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지식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지식은 교만하게 할수가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의 소유자만이 세상을 바로 볼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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