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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주인

날짜 : 2014.02.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천국의 주인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장 12-19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4029.wmv

세상에서 살 때 당뇨로 고생하던 한 성도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베드로가 대대적으로 천국환영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환영회장에 가보니 맛있는 초콜릿을 비롯해서 세상에서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달고 맛있는 음식이 거창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 음식들을 본 후 성도가 말합니다.

“베드로님, 너무 감사하지만 저는 이 음식들을 먹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왜요?”

“저는 당뇨병 환자라서 이런 음식은 먹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당뇨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성도는 옆에 있는 부인에게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땅에 잡아 놓고 단 것도 먹지 못하게 하였소?”

우리들의 인생이 무엇인지 뒤 돌아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때보다 건강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살기에 이런 재미있는 예화가 등장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특히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하면서 온통 관심이 건강에 치우치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들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이 숫자가 유행이지 않았습니까?

‘9988234.’

‘99’ 99세까지 ‘88’ 팔팔하게 살다가 ‘23’ 2, 3일 아픈 뒤 ‘4’ 사망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들 속마음으로는 모두 9988234를 외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숫자를 외치고 있던 우리들에게 당뇨병 교우님의 이야기는 큰 혼란을 가져 옵니다.

그러면 가장 지혜로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일까요?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들어가게 되니까 말입니다. 아니면 계속 9988234를 외치면서 오늘 이 땅 위의 삶을 팔팔하게 살려고 온갖 닥치는 대로 건강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드려가며 할 짓 못할 짓을 다하며 사는 삶일까요? 이와 같은 갈등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명쾌한 해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한 마디로 이미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은 보장이 되어 있음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천국의 삶은 하늘나라에 가야지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들이 천국을 빼앗습니다. 천국을 차지합니다.

참말로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차지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에게 천국은 언제나 쥐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엇을 쟁취하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온 이후 세상은 경쟁 사회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 처음으로 경쟁이 붙었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경쟁이 붙었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 경쟁에서 아벨이 이긴 것 같습니다. 경쟁에 졌다고 생각하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시작된 첫 희생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쟁으로 시작된 인간 사회의 경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끝없이 격해졌습니다. 지금까지…. 경쟁이우리들의 DNA가 된 것 같습니다. 엊그제부터 Sochi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을 보노라면 인간의 최고의 가능성을 함께 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올림픽은 경쟁 없이 불가능합니다.

인간 사회는 경쟁의 원칙 때문에 살아 있는듯합니다. 이러한 경쟁사회 한 복판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경쟁을 해서 이겨야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경쟁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동안 경쟁 사회에서 찌들어 살았던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복음입니다. 더 이상 경쟁의 굴레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한편 왜 침노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천국을 찾아 들어가는 자’라고 젊잖게 표현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언뜻 읽어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왜 ‘침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지 깊은 뜻을 찾기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단 전체의 분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적은 것 같습니다. 16, 17절 말씀을 보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함께 놀자고 해도 놀지도 않고 그러니 이제는 함께 울자고 했는데 울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극히 적은 수가 함께 놀고 함께 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신 후 이런 비유를 왜 말씀하시겠습니까? 극히 적은 자들이 천국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적은 숫자만 천국을 침노하는지 궁금해집니다. 18, 19절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좀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 요한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꼬고 있던 주위 사람들을 나무라고 계십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이 금식할 때 금식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데 함께 조인하지 않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들은 올인(all in)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할 때 함께 all in해서 금식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데 거기에 all in하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All in 한 게 있다면 비난하는 데만 all in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천국이라고 생각되면 거기에 올인 해야 합니다. 그 때 천국의 주인이 됩니다. 금식하자니 그것도 싫고 먹고 마시자니 그것도 죄인과 세리처럼 보여서 싫고 이래 싫고 저래 싫으니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침노’라는 단어를 쓰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국을 소유하길 원하는 자는 올인 하여야 합니다. 올인은 바로 침노가 아니겠습니까? 한 때 카드놀이에 올인이라는 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후회한 것은 올인 놀이를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도박하는 사람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면 올인 하지 않습니까?

참 올인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격한 일입니다. 올인 하려고 하면 많은 의심이 우리를 막습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에 올인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올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과감하게 모든 의심을 뿌리치고 올인 할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면 우리가 천국을 침노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천국이 우리를 침노합니다.

사실 세상일도 올인 해야 될까 말까 한데 천국 일은 당연히 올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세상일에 올인 해서 성공한 사람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곤충학자 Karl Ritter von Frisch가 있습니다. 그는 벌이 추는 춤을 해독해서 벌의 의사소통 방법을 밝혀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놀라운 발견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곤충들을 연구할 때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씩 누워 끈질기게 관찰하는 것이지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는 무려 40년간 벌의 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벌의 춤에 올인 한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죄송하지만 제가 체험하는 천국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6월이 되면 정확히 본 교회 20년째 목회가 시작됩니다. 20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저도 종종 놀랍니다. 20년 목회생활중 제일 큰 도전은 역시 매주일 설교 준비입니다.

제가 Westminster신학교를 다닐 때 설교학 시간에 배운 설교법이 있었습니다. 그 학교 설교학 교수님들은 3 point 설교를 강조하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첫째 둘째 셋째’ 하면서 설교를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하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훈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둘째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하고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자신을 사랑하십시다.” 하고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Westminster를 졸업하고 Princeton신학교를 다니는데 시간이 있을 적마다 서점에 가서 새로 나오는 설교학 책들을 접하곤 했습니다. 이야기식 설교가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식 설교를 강조하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공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비유도 바로 이야기식 설교와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도 많은 경우 기승전결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설교에도 그러해야 함을 동감하게 되었습니다. 기승전결이 있게 하려면 이야기식 설교가 가장 적합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도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승전결의 흐름을 잘 잡아야 하고 아울러 적절한 이야기를 넣어야 합니다. 가끔 한두 번이면 모르지면 매주 찾아오는 설교 시간마다 이야기식 설교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양심을 속일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이야기식 설교가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라는 양심의 소리가 저의 가슴 속 깊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야기식 설교가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최소한 현대 사회에서는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올인 하기로 결심합니다. 다음 주 그 다음 주 설교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매주 이야기식 설교에 한 주 한 주 올인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든 귀를 기울입니다. 좋은 이야기가 담긴 책이면 아무리 비싸도 구입을 합니다.

이렇게 20년 전 첫 번째 주 설교부터 시작하여 한 주 한 주 힘들게 이야기식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서 입니다. 이런 소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석 달이 지났으니 더 이상 소개할 이야기 거리가 다 떨어졌을 걸….”

물론 저도 그런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소개할 이야기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아예 처음부터 3 포인트 설교를 할 걸 잘 못했나…?”

그러나 저는 계속 올인 했습니다. 이제 20년을 뒤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올인 했더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올인 해주셨음을 느낍니다. 매번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저에게 꼭 필요한 지혜를 주시고 이야기를 주심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이 지역 어느 목사님이 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정색을 하면서 저에게 물어 왔습니다.

“목사님 항간에 듣기로는 목사님만이 갖고 계신 비밀 자료가 있다고 하는데 함께 나눠 볼 수 없을까요?”

교우 여러분,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주님의 이 말씀으로 많은 해석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냥 간단히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000년 전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나타나셨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노하는 자들이 천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4년도라는 지금이라는 시간에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2014년도라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은 천국을 빼앗게 됩니다. 아니 천국이 그들을 침노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한 해 천국을 침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천국의 침노를 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올인 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침노를 당할 것입니다.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 생기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올인 하면 천국의 침노를 당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무언가를 알려 주실 줄 압니다. 남은 것은 올인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Madeleine L’engle이라는 분이 Harlem New York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파나마에서 온 우나라는 학생에게서 질문을 받습니다. 우나는 미국이 인종차별이 심한 것을 보고 많은 회의를 느꼈나 봅니다. 난데없는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전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을 진짜로 정말로 믿으시나요?” 선생님은 답변합니다.

“우나, 나는 진짜로 정말로 하나님을 믿지 모든 종류의 의심을 다 품고….”

이것이 정말로 올인 하는 믿음이 아닐까요? 매번 온갖 종류의 의심이 떠오릅니다. 그 의심에도 불구하고 믿고 행합니다.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입니다. 매번 의심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분들에게 천국은 침노합니다. 천국은 저 멀리의 이야기이기 전에 오늘이라는 시간의 사건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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