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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충성, 큰 충성?

날짜 : 2014.02.02
예배명 : 제직임직식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작은 충성, 큰 충성?
성경본문 : 누가복음 16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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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인 회보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느 분이 자신의 컬럼 서두에 스탕달 신드럼에 대해서 소개하셨습니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처음으로 이탤리 Florence를 방문하였을 때입니다. 그 곳에는 미켈란젤로등 유명한 예술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인데 어느 성당을 방문하여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예술적으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 가운데 종종 일어나고 있음을 후에 어느 정신과 의사가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술작품에 심취하다 못해 일어나는 현상을 스탕달 신드럼이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슈베르트도 어느 날 베토벤 음악을 들으면서 정신을 잃고 비틀거렸다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한번이라도 스탕달 신드럼에 걸려 본적이 있는가?”
물론 아직 없습니다. 어느날 이런 생각을 하니 아쉬운 생각들이 꼬리를 이었습니다. 저로 인해서 스탕달 신드럼에 빠지는 분은 물론 있을수 없지만, 그렇다고 남의 예술작품으로 인해 스탕달 신드럼에 빠지지도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좀 많이 아쉬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 희망이 떠 올랐습니다. 그래도 나로 인해 스탕달 신드럼에 빠질 분은 한 분 계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의 예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라는 삶으로 인해 정신을 잃으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누구일까요…?

오늘 봉독해 드린 예수님의 비유는 아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가장 어려운 아니면 영어로 표현하면 controversial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는 비유입니다.
얼마나 controversial한지, 어떤 신학자는 ‘나쁜 청지기의 비유’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신학자는 ‘분별력 있는 청지기의 비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청지기’인지 ‘분별력있는 청지기’인지 한번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청지기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게 나 있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첫 부분만 보면 당연히 ‘나쁜 청지기’입니다. 이에 주인이 불러서 일을 그만 두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라고 명령합니다. 다행한 것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는 권한은 주었습니다. 이 면을 볼 때 주인은 아주 좋으신 분 같습니다. ‘선한 주인과 나쁜 청지기’의 비유라고 해도 괜찮아 보입니다. 하여튼 청지기는 잠시 자기가 무엇인가 할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동안 불성실하게 일했던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당장 해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싹싹 빌면서 한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애걸하던가, 아니면 주인의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해 보시지 않았겠습니까? 3, 4절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의아한 것은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서는 도리어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할 눈치가 보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정말 나쁜 청지기입니다. 그래도 한번 어떻게 하나 좀 더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그 다음 장면이 펼쳐집니다. 청지기는 빚진 자들을 불러 얼마나 빚을 졌는지 묻습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이라 쓰게 합니다. 밀 백 석 빚진 자에게는 팔십이라 적게 합니다.
끝까지 그는 변한 게 없습니다. 처음부터 불성실하게 일을 해서 주인에게 불려가고 해고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동안도 주인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는데 끝까지 피해를 줍니다. 그는 정말 나쁜 청지기입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수 있나’ 격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격분하고 있는 청중들의 모습을 보고 계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청중들은 깜짝 놀랍니다. 청중들은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정말로 이 청지기를 세상에서 제일 악한 청지기라고 꾸짖고 감옥에 쳐 넣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도리어 이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청중은 어안이 벙벙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청중은 완전히 KO 펀치를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로 자기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임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청중은 깊은 고민에 잠깁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청중은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될줄 압니다. 한 그룹은 도저히 마음에 안 든다고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너무도 엉터리 교훈이라 더 이상 들을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그룹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지혜롭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지혜롭다는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기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는 지혜의 모습을 보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 인해 정신을 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청중은 하나님은 자기들의 의로운 모습을 보시면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로 인해 그들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그동안 너무 모든 것을 악과 선으로 곧 이분법으로 보고 판단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자신들의 관점을 넘은 넓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쉽게 세상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정신을 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들의 눈 앞에 선히 비추입니다. 이제 이들은 결심합니다.
‘더 이상 함부러 이웃을 불의한 청지기라 판단하지 않으리라. 아니 내 눈에 불의한 청지기로 보이는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칭찬하고 계심을 명심하리라.’

저희 집은 세 집과 접해 있습니다. 건너 편 집이 있고 또 좌우로 두 집이 저희 집과 접해 있으니 세 집에 둘러 싸여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세 집 모두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주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서 주차되어 있는 이웃집 차들을 보면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늘도 교회를 안 가셨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난주부터는 좀 달라졌습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제가 산책하노라면 주님께서 각 집 문에서 나와서 저에게 그 집에 대해 칭찬하시기 바쁩니다. 특히 저희 집에서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일들을 풀어 놓으시기 바쁘십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십니다. 스탕달처럼….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너무도 쉽게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시는 우리들 눈에는 그토록 세상이 악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매 순간 세상을 향해 정신을 잃고 빠져 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을 칭찬하기에 정신을 잃고 계신 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처럼 손쉽게 세상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주님을 넘어뜨리는 일들이 어떤 일들일까요? 주님은 무작정 세상 사람들의 지혜에 빠져 들어가실까요? 어떤 일들로 인해서 주님은 너무 흥분하시고 그래서 스탕달처럼 정신을 잃으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조금 속된 표현을 하면 돈을 써서 함께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마음을 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주 묘한 존재입니다. 돈을 다 좋아하지만 그러나 불의한 사람들에게 돈은 더 잘 붙어 다닙니다. 그래서 돈은 의의 재물보다는 불의의 재물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아마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여튼 주님은 돈으로 친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을 너무도 좋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자로 인(仁)이 있습니다. ‘인자(仁慈)하다’ 할 때 쓰는 어질 仁입니다. 사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仁慈–) 2. 감각(感覺)이 있다, 민감하다(敏感–) 3. 사랑하다 4. 불쌍히 여기다.’
그런데 이 인은 ‘두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 인(人) 변에 두 이(二)자가 합해서 인이 되었습니다.
(스크린: 仁 = 人 + 二)
곧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어진 것이고 자애로운 것이고 감각이 있는 것이고 민감한 것이고 사랑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한자로도 증명이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물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이유로 사용되는 물질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물질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물질로 친구와 사귀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더 잘 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세상 사람들로 인해 너무 기뻐하시는 나머지 쓰러지시기까지 하시지 않으시나요?

한편 주님은 이 당신의 생각을 물질에만 국한시키시길 원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주님은 작은 것에 충성된 자들로 인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 이웃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충성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작은 일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좋아 하지 않는 일을 이웃을 위해 할 때 주님은 우리로 인해 쓰러지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감동시키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 작은 일로 주님을 감동시키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제직임직예배로 드립니다. 올 해 저희 교회 표어를 이제는 여러번 들으셨을줄 압니다.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주님은 작은 일로 이웃을 즐겁게 해주는 제직들을 통해 그보다 큰 일도 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주님은 2천년 전에는 우리들의 죄로 인해 쓰러지셨습니다. 이제도 쓰러지시기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작은 일로 인해 쓰러지시길 원하십니다.
이웃을 즐겁게 해주는 작은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귈수 있습니다. 다른 작은 일들로이웃을 즐겁게 해주는 작은 일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귈수 있습니다. 다른 작은 일들로 이웃을 즐겁게 해 줄수 있습니다. 작은 일을 할수 없는 분들은 큰 일도 하지 못합니다. 먼저 작은 일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즐겁게 해 줄수 있습니다. 작은 일을 할수 없는 분들은 큰 일도 하지 못합니다. 먼저 작은 일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쓰러지실 준비가 다 되어있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베스트셀러였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 Robert Fulghum은 자신의 십계명을 작성했습니다. 실제로는 9개의 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계속 생각 중인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린아이들이 만들어 파는 레모네이드는 꼭 산다.
투표권이 있을 때는 항상 투표를 한다.
고등학교 25주년 reunion에 꼭 참석을 한다.
돈을 버는 것 보다는 시간을 더 잘 보내도록 한다.
항상 경치가 좋은 길을 택한다.
구걸하는 분들에게는 꼭 무엇이라도 드린다.
거리의 악사들에게는 꼭 돈을 드린다.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의 존재가 된다.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면 꼭 찾아가 본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한 십계명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자들로 인해 주님은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시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서 행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작은 일의 십계명을 만들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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