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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will laugh

날짜 : 2013.11.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You will laugh
성경본문 : Genesis 17: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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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나고 성은 점령당했습니다. 적의 대장은 어린이와 부녀자들만은 살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성 안의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물 하나씩만 갖고 성을 나가도록 하라!”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모두 귀한 것들을 챙겨들고 부지런히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당장 먹을 쌀이나 돈, 또 돈이 될 만한 귀중품들을 모두 등에 지거나 품에 안고 나갔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남편을 등에 업고 나가다가 성문에서 잡혔습니다.
“남자를 업고 가다니. 너는 법을 어겼으니 사형이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습니다.
“대장께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갖고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에게는 남편이 가장 귀한 보물이라 가지고 가는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대장은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과 여자를 내보내 주었습니다.

흔히 자녀들을 보물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남편을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여인의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금방 마음속에 어떤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 우리의 머리는 다른 생각이 뒤쫓아 옵니다.
‘만약 남편이 아니 배우자가 무능한 사람이었더라도 업고 나갔을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배우자가 무능했지만 보물 같이 여긴 부부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중 누가 더 무능했을까요?

본문 말씀을 접하기 전에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사라가 아이를 못 낳았습니다. 사라가 아이를 못 낳았다고 하면 요즘 의학을 아시는 분들 특히 여성분들은 얼굴을 찡그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원인이 아브라함에게 있을 수 있지….” 생각하실 줄 압니다. 현대의학은 책임을 남자에게서도 찾아냅니다. 그러나 이때는 의학이 발달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자녀를 못 낳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의학의 도움 없이도 사라가 문제였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안 생기는 사라는 자기의 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합니다. 곧 하갈이 임신하였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라인 것이 경험적으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러니 처음 약속을 받은 지 11년 만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물론 하갈에게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복잡해집니다. 아내 사라가 있고 사라의 여종 하갈이 있고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복잡했지만 아브라함은 그래도 이스마엘 때문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 사라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쉽지 않았겠죠.

하지만 사라에게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사랑입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전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 받게 됩니다.

하갈이 아이를 임신하자 자기의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자기가 안방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이 자기를 멸시한다고 불평을 하죠. 이 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기회는 이때다 하고 소박 맞히지 않았을까요? 사라를 버리고 하갈을 본처로 받지 않았을까요? 16: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자기 아이를 밴 하갈을 내쫓아도 좋고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이는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라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젊은 첩도 없어도 되고 무엇보다도 첩이 낳은 아이도 없어도 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힘 때문에 사라는 하갈과 그리고 이스마엘과 함께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를 어느덧 13년이 또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습니다.

99세가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사라에게는 희망이 없고 이스마엘이 자기의 상속인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99세가 되었다는 말씀은 17: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9세가 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5,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후손이 될수 없고 무능한 사라에게서 날 자가 후손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자기의 아내를 통해 자식을 낳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은 전혀 기뻐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혼자서 웃고 맙니다. 자기는 백세가 다 되었으니 틀렸고 사라는 젊어서도 못 낳았는데 이제 90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낳을 수 있겠냐고 하면서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기회는 찬스다 하고,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3살 된 서자 이스마엘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백세 난 남자와 90세 난 여자가 아이를 낳을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 곧 ‘웃음’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아이는 태어납니다.

참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와 아이를 임신한 젊은 여종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택합니다. 그렇게도 소중한 아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13년 후 놀라운 선물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웃고 맙니다.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습니다. 그 이후로 집안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습니다. 이름이 ‘웃음’이기 때문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게 하셨나요? 보통 이렇게 생각하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부인 못합니다. 다시 한 번 19절 하반절 말씀을 살펴볼까요?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삭과 언약을 세우는데 그 언약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곧 이삭과 세운 언약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언약인데 이 언약이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곧 이삭의 모든 후예들도 웃기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이삭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가정은 웃기는 일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 아들의 이름을 ‘이삭’ ‘웃음’이라고 짓게 하신 이유는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이삭’의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약속의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의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 된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년간 발표된 심리학 논문을 어느 분이 조사해 본 것 같습니다. ‘절망, 불안, 분노’와 ‘행복, 기쁨, 만족’ 이 두 가지 주제가 얼마나 발표되었나 조사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18:1이었다고 합니다. ‘절망, 불안, 분노’에 대한 논문이 18편이 발표될 때 겨우 한 편의 ‘행복, 기쁨, 만족’의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아니 가정들이 ‘절망, 불안, 분노’에 매여 살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자료입니다. 이 자료를 보게 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가정을 웃음의 가정으로 만드실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부부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참된 헌신은 웃음으로부터 시작함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여러분의 결혼생활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멋진 코미디를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제목 그대로입니다.

“네가 웃으리라.”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가정만을 위한 멋진 코미디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를 믿으십시다. 하나님은 최고의 코미디 작가이시고 연출가이십니다. 우리는 배우일 뿐입니다. 훌륭한 배우는 작가와 연출가를 믿는 자들이지 않을까요?

연출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고 가던 끝은 웃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 놀라운 웃음의 사건을 위해서 사라가 등장합니다. 하갈이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끝은 이삭입니다. 웃음입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무능할수록 웃기는 일은 더 크게 확대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임신한 하갈을 본 부인으로 삼고 사라를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웃기는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무능한 사라를 업어 주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웃기는 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부부청년부 여러분, 배우자를 종종 업어주세요. 서로 웃기는 일의 주인공임을 고백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정사의 작가이시고 연출가이십니다.

어느 결혼 상담가가 부부생활에 대한 좋은 책을 펴내셨습니다. 당신 가정의 재미있게 부부 생활하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음악이 취미인데 하루는 남편이 디스크자키가 되어서 아내에게 음악을 들려주신 것 같습니다. 그 날의 일기의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디스크자키가 되어 준 남편 옆에 발 뻗고 누워 있으니 행복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선물과 노랫말 때문에……
디스크자키가 베풀어주는 풋풋한 친밀함 때문에……
내 무릎에 누어 음악을 들으며 눈 감고 지휘하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당신 지휘 솜씨가 정말 대단해.
강렬함이 카라얀 같고 섬세함은 세이지 오자와, 유연함은 리카르도 무티 같아.”
부부 친밀감에 빠져 버린 나의 아부성 발언이었다.”

서로 웃겨가며 업어주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러한 대접을 받기에 너무도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웃으리라.”

교우 여러분, 부부청년부 교우 여러분, 가정은 바로 웃음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사실 결혼은 웃기는 일의 주인공들의 만남이라는 것을 밝혀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결혼은 안 하셨지만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타나셔서 결혼의 참 의미를 보여주셨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는데,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갖다 부으라고 하십니다. 밋밋한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웃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결혼한 두 주인공들에게 은연 중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웃으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의 어떤 유통회사에서 ‘부부의 날’을 맞아 부부의 정의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지겹게 싸우다가 서로 닮아 가는 모습에 허탈해져서 웃게 되는 사이’
‘카드 할부금을 평생 함께 갚아 가는 사이’
‘항상 곁에 두고 있어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된장과 고추장’
그런데 수많은 대답들 중에 가장 좋아했던 답이 하나있습니다.
‘부부란 한글의 자음과 모음.’

슬라이드를 보실까요?

(슬라이드1)

두개의 ‘ㅂ’이 있고 또 두 개의 ‘ㅜ’도 되고 ‘ㅓ’ 도 되고, ‘ㅏ’도 되고, ‘ㅗ’도 되는 모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모으느냐의 따라 전혀 다른 단어가 됩니다.

(슬라이드2)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슬라이드3)

반면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부부란 약속된 자음과 모음을 함께 맞추어 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마친 후 한바탕 웃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날 까지 계속 웃으면서 자음과 모음을 맞추어 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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