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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 한 입으로 (II)

날짜 : 2013.07.2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한 마음 한 입으로 (II)
성경본문 : 로마서 15:5-13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721.wmv

지난 번 이곳 뉴잉글랜드 목회자 협의회 수양회에 참석했었는데 어느 목사님이 케냐 선교 보고를 해 주셨습니다. 전기도 아직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사는 마싸이 족 선교를 하시고 오셨습니다. 사진 한 장을 보여주셨는데 목걸이처럼 주머니를 하나씩 걸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무엇 같으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전기도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목에 주머니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닌다면 무엇일 것 같습니까?
휴대폰 주머니라고 합니다. 의아한 것은 전기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요? 질문하게 됩니다.

가끔 전기가 있는 나이로비에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모든 주민들은 그에게 충전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합니다. 충전을 받으면 약 10일간을 사용하고 그 후에는 다음 충전할 때까지 그냥 목에 걸고 다니는 것입니다.

전기가 없고 그래서 냉장고도 없고 형광등도 없는 곳이지만 휴대폰은 사용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 이 땅 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기가 없는 곳까지 휴대폰이 퍼져 있으니 휴대폰은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있구나!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왕 휴대폰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전화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전화기를 Graham Bell이 발명했습니다. 1877년에 일반인들에게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4월 4일 미국 보스턴의 부호 찰스 윌리엄스의 집에 세계최초의 전화기가 설치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전화는 교환대를 거쳐 상대를 호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화기는 설치했지만 윌리엄스의 경우에는 연결해 달라고 할 만한 상대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죠? 전 세계를 통틀어 전화기가 있는 유일한 곳은 그의 집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사무실에도 전화기를 놓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큰마음을 먹고 설치한 전화기가 무용지물, 사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 후 보스턴에 전화기를 놓은 가정이 800가정이 됩니다. 800군데 전화를 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전화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100년이 조금 넘어서 전 세계에 전화벨이 울리게 되었습니다. 130년 만에….

오늘 도미니카 공화국 단기선교단 파송예배를 드리는데 복음전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떻게 되어 왔나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미전도 종족은 2550종족이 있다고 합니다. 약 1억 4천만 명쯤 됩니다. 그런데 확실치는 않지만 마싸이 종족처럼 이들도 이미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복음은 듣지 못했지만….

전에는 기독교가 먼저 들어가고 후에 서구문명이 들어갔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우리 한국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기독교와 상관없이 서구문명이 먼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보다 훨씬 복음 전파는 당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줄 압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도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다닐 줄 압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을 ‘한마음과 한 입으로 II’라고 정했습니다. 지난번 콜롬비아 단기선교단 파송예배에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설교이기 때문에 ‘II’를 붙였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습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는 바로 올해 해외선교의 주제입니다. 6절 말씀을 다시 봉독해 드리면,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크리스천들이 한마음과 한 입이 될 때 아마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크리스천들이 한마음과 한 입이 될 수 있을까요? 한편 5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하나님께서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한마음이 되게 하심을 사도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마음이 되게 하시느냐도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곧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하시고 그 결과 우리는 서로 뜻이 같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한마음의 시작일줄 압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주님을 본받을 때 한마음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을 닮아 가는데 한마음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주님의 어떤 모습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을까요? 어떤 모습을 본받아야 할까요? 7절 말씀에서 주님을 본받는 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죄 많은 우리를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가 막힌 기적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는 죄로 점철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거울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주님의 거울은 우리를 받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아무리 추하고 더러워도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는 순간 우리의 모습은 주님의 신비스러운 거울 안에 들어갔다가 놀라운 모습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의 서재에 큰 거울이 있습니다. 옷장의 미닫이문에 거울이 붙여져 있는 것입니다. 미닫이문을 닫고 책상에 앉으면 저의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제가 눈을 들어 거울을 보면 거울은 어김없이 저를 바라봅니다.
이사간 지 삼년이 지났는데 거울에 비치는 저의 모습이 별로 입니다. 집에서 옷도 아무거나 주워 입고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은 채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곤 합니다. 그러니 제 모습이래도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은 삼년 동안은 늘 미닫이문을 열어 놓고 책상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 대신, 저의 옷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 환갑이 지난 후 저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환갑이 지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나 자신이 만족해하지 않으면 누가 만족해 할 것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닫이문을 닫고 책상에 앉습니다. 가끔 눈을 들어 저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만족해합니다.

오늘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더욱 미닫이문을 닫고 책상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눈앞에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의 참 거울은 주님이시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은 아주 신비한 모습이 되어서 하나님께 비쳐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를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놀라운 체험을 사도바울은 이미 했습니다. 자신은 살인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자신의 거울만을 보면 스데반을 죽인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살인자요 폭행자가 아닙니다. 자신은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께 비쳐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의 고백이 바로 자신을 향한 고백인양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의 고백은 사도바울뿐 아니라 주님 앞에 나오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의 모습이 주님의 거울에 어떻게 반사되어서 하나님께 비쳐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들의 모습이 주님의 거울에 비쳐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니 아마 대단한 모습으로 반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백화점 거울은 더 날씬하게 보이게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 분이 그 백화점에 갔을 때는 잠시 빠졌을 때가 아니었겠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아주 의미 있는 멘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거울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달라진 모습을 하나님께 비춰 주시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너희도 서로가 신비한 거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모습이 나라는 거울을 통해 반사 될 때 놀라운 모습으로 반사가 되는 거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은 휴대폰을 통해서 온 인류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뿐입니다. 더 많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휴대폰이 세계를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합니다. 거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다운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한편 8절 이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이방인들을 위한 거울이 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12 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너무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세계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이웃을 위한 신비스러운 거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사도 바울을 따라서 세계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1800년대 아프리카 선교사인 David Livingstone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는 의사로서 훌륭한 장래가 보장되는 것을 뒤로한 채 선교사로 떠납니다. 그런데 그의 형도 의사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꾸짖습니다.

“너는 네 원대로 너의 인생을 그 정글의 미개인들 속에 묻어 버리겠지만, 나는 이곳 영국에서 명성을 얻을 것이다.”

그의 형은 후에 당대에 알려진 의사가 되었지만 백과사전에 ‘유명한 선교사 David Livingstone의 형’으로만 언급되어집니다. 반면 동생은 자신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머지 신체의 부분을 영국으로 가져와 왕족의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고 그의 유골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중앙제단 옆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신비한 거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은 거울이었습니다.

선교단원 여러분, 주님을 본받아 신비한 거울이 되십시오. 도미니카인들을 위한 신비한 거울이 되십시오. 그들의 모습이 여러분의 거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거울로 비쳐지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되기 바랍니다.

앞으로 몇 년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도미니카 공화국은 크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히 올해는 27명이 신비한 거울이 되어서 찾아가니 말입니다. 27명의 선교단원들이 한마음이 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생길까요?

죄와 생활고에 지친 도미니카 공화국의 주민들이 여러분의 거울을 통해 참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주님의 거울을 통하여 아름답게 하나님께 비쳐지는 놀라운 일을 기대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선교단원 여러분에게 한 가지 거울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주민을 만날 때 이런 거울로 비쳐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도 언젠가 나와 같이 주님을 위한 단기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을 보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도미니카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휴대폰이 아닙니다. 신비한 거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주민들을 대할 때 여러분은 주님을 닮은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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