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3.03.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성경본문 : 사도행전 22:1-8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310.wmv
얼마 전 목사로서 아니 기독교인으로서 낯이 뜨거워지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UN 국제 외교관 김병호 박사님이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체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셨습니다. 김 박사님이 어느 마을의 추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태국과 미얀마 옛날 버마 국경사이에 있는 뽀꼼마을이 있는데 뽀꼼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추장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뽀꼼 마을을 방문해서 보니 그 지역의 전통종교인들 곧 무속인들이 세운 새문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새문은 한국의 장승과 같은 것입니다. 그 지역에 세워져 있던 새문은 다 사라졌는데 마침 한 새문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이 와서 새문을 다 뽑으라고 해서 뽑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새문이 하나 남아 있어서 그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 이 새문을 남겨 놓았냐고…. 조상들이 세운 것이니 조상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뽑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새문을 없애면 서양선교사들이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줄 텐데요.” 김 박사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은 새문을 뽑는다면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준다는 사실을…. 이에 마을 사람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왔소.”
그러면서 새문 하나를 더 세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세운다고 말했습니다. 김 박사님은 손수 돈을 드려서 새문을 하나 세워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새문을 없앴는데 김 박사님은 세워준 것입니다. 사실 김 박사님은 그렇게 하기 쉬웠던 것은 이 분은 종교가 없는 분이십니다. 아니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종교가 없는 것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님은 자기가 새문을 하나 세워줬으니 서양선교사들 못지않게 이 마을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구급약도 갖다 주고 한국의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옷가지도 전달하면서 그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일 년쯤 이렇게 지내면서 이제는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와서 묻습니다.
“닥터 김, 당신은 우리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겠지요?”
“왜요?”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 모두 기독교를 믿기로 했어요.”
그동안 선교사들이 물량 공세를 퍼 부운 후에는 기독교를 믿으라고 해 왔다는 것입니다. 김 박사님도 똑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 박사님은 선교사분들과는 달리 자기들을 진정 사랑하는 분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전에 선교사분들에게 받은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김 박사님을 봐서 기독교를 믿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김 박사님이 원한다면…. 그러나 김 박사님은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김 박사님은 그들 재량에 맡깁니다. 대신 그들은 그를 자기들 마을의 추장으로 세웁니다.
이 글을 한 달 전 쯤 읽었는데 지금까지 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선교사님들로 인해서 그 곳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에 많은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도리어 무신론자인 김 박사님을 추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통해 도리어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때문에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하였는가…?’ 고민하는 저에게 한 가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가장 성공적으로 선교하신 분의 삶에 해답이 있지 않겠는가? 곧 사도 바울의 삶에서 그 해답의 열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아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을 그토록 훌륭한 선교사가 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부족한 것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사도바울은 세 차례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마지막 선교여행의 종착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 후 그는 유대인들에게 붙들립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에 로마 군대 천부장이 나타나서 소동을 잠재운 후 바울에게 자기를 잡은 유대인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이 끝난 후, 더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큰 소동이 일어난 이유는 6절 이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일어난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 이하 말씀입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바울도 표적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마침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데 갑자기 빛이 임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입니다.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신적인 존재가 나타난 것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적인 존재가 인간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얼떨결에 바울이 질문합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이에 신적인 존재가 답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나사렛 예수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바울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듣던 유대인들은 점차 속에서 불같은 분노가 치솟아 오릅니다. 곧 소동이 일어납니다. 반면 이 신적인 존재의 음성이 사울을 바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사실 사도 바울의 뇌리에는 늘 이 주님의 음성이 울리곤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뇌리에 이 주님의 음성이 들리곤 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쉽게 추리해 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유명한 고백은 사도행전에 세 차례 나옵니다. 물론 한 사건입니다. 세 차례 인용이 됩니다. 제일 먼저는 9:5절에 나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 나오게 됩니다. 두 번째가 오늘 봉독한 것이고, 세 번째는 26:15절로 로마로 이송되기 전 아그립바왕와 로마 총독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바울이, 물론 이 당시에는 사울이었죠, 사울이 이 말씀을 들었던 것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니 너무도 소중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 고백은 사도행전의 중심 고백이 된 셈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 세 차례 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얼마나 이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뇌리에 사무친 가운데 살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폐증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자녀를 오랫동안 키운 후 책을 지었습니다. 책 제목이 참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사도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음성도 어쩌면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에 다메섹으로 가던 중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도바울은 최고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시지 않으면 이처럼 나타나실 리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꽃들이 활짝 피인 어느 주일날 성당으로 가면서 자폐증 환자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 때 나이가 스무 살도 넘은 총각이었습니다.
“진한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뭘까?”
“나지.” 엄마는 깜짝 놀라 되묻습니다.
“‘너’어? 누가 그래?”
“엄마가.”
자폐증 환자는 엄마로부터 가장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받아오며 자랐던 것입니다. 바울도 비슷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이 메시지가 남은 평생 따라 다닙니다.
오늘 사순절 넷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 말씀을 통해서 저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안심하라” 말씀하신다는 설교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교우 여러분, 먼저 우리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안심하라.”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면서 세상풍파 가운데서도 잠을 잘 줄 알아야합니다. 잠꾸러기가 되어야 합니다. 풍파를 타고 즐겁게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곧 장난꾸러기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잠꾸러기와 장난꾸러기가 되어야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또 다른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귀를 두 개 주시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음성을 잘 들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안심하라.”
아울러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런데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 안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이 핍박하는 교회가 바로 예수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갓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보스톤한인교회 교우님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님들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핍박하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 바울은 너무도 엄청난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도바울은 돌변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우는 영광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교회에 미쳐버립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전도에 앞장섭니다. 이유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선교사가 되려면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해야 하나요? 우리도 훌륭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먼저 핍박해야 하나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하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인임을 고백하십니까? 이 땅 위에서는 죄의 굴레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함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사순절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참회와 구제와 절제를 합니다. 참회는 바로 사도 바울에게 들려주신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님께 영광 돌리는 자가 됩니다. 듣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가리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 진정 교회를 세워가니 말씀입니다. 사실 스스로 교회를 핍박하는 자임을 깨닫는 자들만이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남은 사순절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우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죄 많은 세상은 아니 주님의 교회는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나 리서치 센터에서 미국에서 ‘성경을 가장 마음에 두는 도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위는 테네시 낙스빌, 2위는 루이지애나 쉬레브포트, 제가 쉬레브포트에 집회차 가 본적이 있습니다. 3위는 테네시 차타누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이제는 가장 비 성경적인 도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동1위는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와 매사추세츠의 뉴 베드포드, 2위는 뉴욕 알바니, 3위는 버몬트 주의 벌링톤, 4위는 메인 주 포틀랜드, 공동5위는 커네티컷의 하트포트와 뉴헤이븐, 6위는 매사추세츠의 보스톤 그 이하는 생략합니다.
뉴욕 알바니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사는 뉴잉글랜드 지역입니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첫 번째 청교도들이 도착한 곳이 왜 이렇게 되었나요?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고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스로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은 이곳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순절 기간 당신이 택하신 자녀들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안심하라.”
말씀을 거둡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북군의 장군이었던 루 월리스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뒤 글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76년 9월 인디애나로 가는 기차에서 당시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잉거솔과 동석하여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는 잉거솔의 박식함에 감탄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감리교인이었지만 정작 신앙에 관심이 없었던 월리스는 이 무신론자의 이야기에 감명 받아 어린 예수가 지금까지 이르는 과정을 담은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쓰리라 결심하고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파고듭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첫 번째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벤허’입니다. 월리스는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위대한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이들이 교회를 세워갑니다. 남은 사순절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