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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날짜 : 2012.04.0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성경본문 : 창세기 39장 7-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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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다드(John Goddard)라는 모험가가 있습니다. 어릴 때 식탁에 앉아서 할머니와 작은 어머니의 대화를 늘 듣곤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이런 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그 일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말을 자주 듣던 존은 나중에 자기는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할머니처럼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꿈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장소, 배우고 싶은 것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목록에다 하나씩 적어 두었습니다. 결국 127개의 꿈 목록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때 나이가 15살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일강, 콩고강, 양자강등 세계적인 강을 탐험하는 것을 비롯, 호주 케냐 필리핀등 원주민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 그리고 에베레tm트산, 킬리만자로산 등을 정복하고, flute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성경을 한번 통독하고, 작곡도 하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달을 방문하는 등 127개의 항목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 중 47세가 되었을 때 104개나 되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현재 그의 나이는 88세인데 나머지를 다 이룰지는 모르지만 그는 늘 다음과 같은 신념에 찬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틀에 박힌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말입니다 .”
15살에 127개의 목표를 세워 놓고 평생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았던 한 소년의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아울러 그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꿈을 이루고 또 새로운 꿈을 꾸는 꿈의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종려, 고난주일이자 사순절 마지막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올 해 사순절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꿈의 소년이었던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은 청소년 시절에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37: 2절을 보면 꿈을 꾸던 요셉의 나이는 17살이었습니다. 어느날도 꿈을 꾼 후 형들에게 말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곧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열한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할 것을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듣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느 날 형들이 멀리 양을 치러 나가 있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먹을 것을 싸 가지고 형들에게 찾아 갔지만 형들은 요셉을 붙잡아 지나가는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팔면 더 이상 요셉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곧바로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 집에 팝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요셉이 오고 나니 보디발 집안은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깁니다. 이 때 요셉의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살이었겠죠.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 전까지의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요셉은 잘 하면 보디발 장군을 통해서 자신의 꿈이 이루워 질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합니다. 요셉은 단호히 뿌리치고 도망 나가는데 실수로 옷을 남긴채 도망 나왔습니다. 아내는 남편 보디발이 오자 요셉의 옷을 보여주면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꿈은 산산 조각이 납니다.
결국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21절 이하 말씀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루 하루 주어진 일에 열심을 가지고 임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지만 그 후의 이야기도 잘 아실줄 압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를 만납니다. 이들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 꿈대로 이루어져서 떡 굽는 자는 곧 처형을 당하고 술 맡은 자는 다시 왕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요셉은 풀려 나가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었습니다. 마침 바로왕이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고뇌하는 바로 왕에게 술맡은 자가 요셉을 소개시켜 줍니다.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드리고 곧이어 바로 왕은 요셉을 자기의 제 2인자로 삼습니다. 그로 인해 세계적인 기근을 무사히 넘기게 됩니다. 한편 야곱의 열한 형이 곡식을 얻으려고 애굽까지 오고 드디어 총리대신인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요셉의 꿈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요셉의 전체 삶이 이해가 됩니다. 모든 사건 사건이 요셉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호기심에 찬 질문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합니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좋은데 왜 꼭 감옥에 가야만 했었는가 질문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감옥을 통해서만 바로왕을 만날수 밖에 없었는가 질문해 볼만 합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존 가다드는 127개의 꿈 중 47세까지 104개가 이루어졌는데 감옥에 가지도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요셉은 꽃다운 20세 나이에 그 거친 감옥 생활을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감히 감옥을 거치지 않고는 요셉은 결코 총리대신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41:1절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만 이 년 후’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한 만 이 년 후일까요? 바로 그 전 귀절을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한 지 만 2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해 준 후 최소한 만2년을 더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 당신 계획의 전부였더라면, 2년을 지체하게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심지어 감옥 밖에서도 만날수 있게 하셨을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술관원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생활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2년씩이나 가두어 놓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꿈을 이룬 것은 바로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2년간의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감옥생활이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아니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감옥생활을 통하여 요셉은 온 가족을 구하는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아니 장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는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2년의 삶은 너무도 값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요셉을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도 큰 꿈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만인을 구원하는 꿈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수가 되셨어야 했습니다. 끝내 십자가에 처형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 후 만인을 구원하는 꿈이 이루어지셨습니다.

오늘 종려 고난 주일로 지킵니다. 주님은 만인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친히 죄수가 되십니다. 죄수가 되신 후 아무 말을 하시지 않습니다. 죄수가 되셔서 빌라도 앞에 서신 장면이 마가복음 15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은 이번만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에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합니다. 또 빌라도가 묻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보통 죄수들 같으면 어떻게든지 살아나가려고 별 간청을 다 하는데 이 분은 달랐던 것입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왜 주님은 아무 말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당신이 가셔야 할 죄수의 길을 가시기로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씀이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당신이 죄수의 길을 갈 때만이 구원자가 되심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더욱 사모하기 위해 우리는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고난주간을 지키는 우리를 보시면서 주님은 얼마나 흐믓해 하실까요? 그런데 정말 그러실까요?

지난주 교회에 있는데 중고등학생을 자녀를 둔 어머님이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두 자녀를 이곳 근처의 학교에 입학시켜 놓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 어머니는 가끔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 제 느낌에는 아직 교인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이 분의 부탁은 그래도 자기 자녀들은 교회에 다니길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자녀가 있는데 한 자녀는 11학년쯤 되었고 또 한 자녀는 6학년이라고 하시면서 11학년 아이는 아직 교회 보낼 생각이 없고 6학년 아이만이라도 교회에 다니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저는 알겠다고 하면서 전도사님에게 연락을 해 놓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왜 11학년 자녀분은 교회에 보낼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원래 두 자녀가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학교를 다녔고 한국인 가디언이 자녀들을 돌봐주고 있었는데, 그 분이 잘 돌 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가디언이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1학년 자녀는 교회에 흥미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6학년 자녀는 아무 것도 모르니 교회에 나올수 있다는 말을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 가디언도 오늘 어느 교회에선가 예배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종려 고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고난을 깊게 마음 속에 기리고 계실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면서 깊은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분이 중고등학생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줄수 밖에 없을까요? 그리고 이 모습이 그 분의 모습뿐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이 가디언의 문제, 아니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저는 이 가디언에게는 분명 주님을 믿는 신앙은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그에게 크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염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 43절입니다.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특히 저는 마지막 세번째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당신은 지금 옥에 갇혀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데 현대 기독교인들은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요즘 우리는 요셉하면 꿈의 사람이요 총리대신으로만 생각합니다. 감옥도 생각은 하죠. 단지 감옥은 운 좋게 술 맡은 관원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만 생각합니다. 반면 요셉의 2년간의 감옥의 삶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11학년 소녀의 눈에 교인들은 잘못된 모습으로 보이게 되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2년씩이나 감옥에 가두었겠습니까? 감옥을 통해서 요셉은 the best가 되어 가지 않았을까요?
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한 말이 있습니다.
“신학교는 the best와 the worst가 모이는 곳이다.”
이번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감옥은 the best와 the worst가 모이는 곳이다.”
그동안 우리는 감옥은 the worst가 모이는 곳으로 생각해 오지 않았습니까? 저희 교회가 여름 수양회를 가는 길인 Route 2를 따라 가다보면 감옥이 하나 보입니다. 한번도 저 안에 the best들이 거하고 있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를 도전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바울도 수없이 여러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가 성경이 되었습니다. 본회퍼도 감옥에서 the best theologian이 되어 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늘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 현실 가운데 있는 감옥속에 갇힌 죄수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순된 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현실적으로 감옥에 있는 죄수를 찾아 가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the best가 되어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종종 지나가는 Rt.2에 있는 교도소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번 일주일만큼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문을 열면 정말로 많은 일들이 널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 제일 많이 사람을 붙잡아 놓는 곳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detention center’입니다. 불법체류자들을 붙잡아 두는 곳입니다. 미국 전역에 350군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1년에 3십8만명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아리조나주는 하루에 3천명씩이나 체포를 해서 가둔다고 합니다. 이 시간 법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어겼건 안 어겼건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매일 미국 전역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설이 열악해서 23일에 한 사람씩 detention center에서 생명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왜 미국 땅에 350개의 detention center가 있어야 하고 매년 38만명이 수용되어야 합니까? the best를 만드는 곳이 필요해서가 아닐까요?
지난 주에는 총회 김선배 목사님 사무실에서 긴급한 이멜이 왔었습니다. 아리주나주에서 한인 여학생이 detention 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학생은 7살에 부모를 따라 왔는데 업무 착오로 아직 영주권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학생은 homeless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고 교회 집사로서 주일학교 교사로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그만 순찰하는 사람에게 붙잡혔던 것입니다. 이들을 구하는 방법중 하나는 일정 기간 중 일정 인원이 싸인을 하면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싸인을 하려고 들어 갔더니 불행히도 싸인 기간이 끝났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에 그 이멜을 저희 교회 정의 평화 환경위원회와 국내선교위원회에 보냈습니다. 참고로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에 많은 관심을 갖자는 의도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싸인 기간이 끝난 이유는 이미 많은 분들이 싸인을 해서 풀려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는 여학생이지만 잠시나마 그 학생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한 시간으로 인해서 이 여학생은 the best가 되어 가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고난주간을 뜻있게 보내십시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만나십시다. 아울러 주변에 있는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해서 기도드리십시다. 인류 구원 역사는 감옥을 통해서 진행 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특히 인류를 구원하는 꿈은 반드시 감옥을 통해서 이루어져왔습니다. 이 꿈이 무르익는 현장을 함께 찾아 가십시다. 우리 개인들을 위한 꿈은 감옥을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루어집니다. 이웃을 위한 꿈 인류를 위한 위대한 꿈은 감옥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질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 군사정권 시대에 정치범으로 20대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형을 마치고 40대에 출옥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감옥에서 쓴 편지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편지가 나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는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가지 스무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 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섭씨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우기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이 신영복 교수님을 존경하는 분이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그때 생각이 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인품의 깊이를 모두다 느끼는것은, 사람의 마음이 다들 비슷한지, 사진만 봐도 어떤 분위기였는지 묻어 나옵니다. 모두 바라만 봐도 행복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신 교수님은 20년간 the best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the best person이신 주님께서 죄수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아울러 지금도 인류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감옥에서 the best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이번 고난주간 우리들의 마음의 발걸음을 감옥으로 향하게 하십시다. 그것에 고난의 주님이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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