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2.03.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야곱의 돌베개
성경본문 : 창세기 28장 10-2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0325.wmv
두 친구가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둘은 문제가 생겨 언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감정이 격해진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 맞은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시원한 물로 갈증을 해소한 뒤 씻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뺨을 맞았던 친구가 발을 헛디뎌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는 늪에서 나와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했다.’
친구가 묻습니다.
“너는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더니, 이번에는 왜 돌에다 적었니?”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는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아주 지혜로운 친구입니다. 뺨을 맞았을 때는 모래 위에다 적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지워지도록…. 한편 도움을 받았을 때는 돌에다 적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도 지워지지 않도록….
우리에게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중요하고 귀한 것은 돌에다 적어 놓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입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 기간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야곱의 삶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이 있는 브엘세바를 떠나 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란으로 향하는 그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물론 이 당시 길이 멀고도 험했겠지만 야곱에게는 더욱 힘든 길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형에게 쫓겨서 도망치듯 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에게 한 일들을 생각하면 차마 부끄러워 눈을 못 뜰 정도입니다.
형에게 두 가지를 훔쳤습니다. 처음에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두번째로는 물론 어머니가 돕기는 했어도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날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바로 얌체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그 댓가로 혼자서 그 험한 길을 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란으로 가도 아직 큰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삼촌이 자기를 반길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야곱은 많은 후회를 안고 스스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장자권은 받아서 무엇하나, 아버지의 축복도 무슨 의미가 있나, 만일 내가 삼촌집으로 가다가 짐승의 밥이 된다면….’
그뿐 아닙니다. 혹시 짐승의 밥이 안 되었어도 자기처럼 얌체를 삼촌이 반기지 않으면 어떡하나 생각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도망쳐 와서 이제는 형 에서의 손에서 벗어났을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해는 져서 밤이 되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두려움도 후회도 다 뒤로 하고 한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이 당시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는 신학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당시는 천사는 땅을 지키는 일을 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국가나 지역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다리를 오르는 천사의 역할과 사다리를 내려오는 천사의 역할이 구분이 되는데, 오르는 천사는 야곱의 고향땅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석합니다. 아울러 내려오는 천사는 앞으로 야곱이 갈 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을 지키는 천사라고 해석을 합니다. 곧 자기의 고향땅을 지키는 천사와 자기가 잠시 살 삼촌이 있는 곳을 지킨 천사, 이 두 천사가 지금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꿈 속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저희 가족도 그렇지만 저희 교회 교우님들 거의 대부분이 이곳 보스톤까지 이사 와서 살고 계시던가 공부하러 오신줄 압니다. 이곳으로 오실 때 누구나 두려운 마음도 들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는 도중 꿈에 야곱처럼 천사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장면을 보았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들의 고향땅을 지키는 천사와 우리가 살 보스톤을 지킬 천사를 만났다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복을 야곱이 받은 것입니다. 아니 그뿐아닙니다. 13, 14절 말씀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야곱이 누운 땅을 야곱과 자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고향 땅에서 아무런 잘 할 것도 없었던 야곱입니다. 얌체짓만 하다가 쫓겨나고 있는 야곱입니다. 자기가 봐도 자기는 아무런 복을 받을 짓을 한 적이 없는 얌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누운 곳을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와 자기 자손으로 인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지금까지 축복하신 축복도 부족해서 이제는 늘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결코 떠나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야곱은 자기의 잘 못으로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 에서는 물론이고, 자의이던 타의이던, 모두 자기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얌체 야곱은 감히 바랄 수 없었던 복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야곱은 순간 잠에서 깹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이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아무 인기척이 없는 시커먼 밤 돌만이 즐비한 곳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는데 사실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곳이 바로 우주의 중심으로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자기가 잠을 잔 곳이 바로 하늘의 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늘의 복이 바로 이 곳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퍼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처럼 소중한 곳을 그냥 지나칠수가 있습니까? 18, 19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지난 밤 신세를 지었던 돌베개를 기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야곱이 글자를 쓸줄 알았더라면 어떻게서든지 돌에다가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
자 이 정도 됐으면 야곱은 새 사람이 되었겠죠. 이처럼 엄청난 복을 받았는데 새 사람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20절부터 야곱의 서원이 나옵니다. 20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예, 정말 야곱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받기만 하던 야곱이 서원을 합니다. 제법입니다. 무엇을 서원하나 볼까요? 계속 20,21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여기까지 보면 역시 얌체기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이렇게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와 같은 얌체를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내가 잔 이 곳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아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얌체짓은 그만하고 이제는 도리어 이웃을 위해 열심히 희생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늘 도와주소서.”
이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뭐라구요?
“나에게 앞으로 잘 해주시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이해가 안 되죠. 그래도 다음에 제대로 된 서원을 다음에 했을지 모르니 끝까지 읽어 보겠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혹시가 역시입니다. 역시 실망입니다. 자기의 돌베게가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선심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한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선심을 씁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를 이렇게 살려 주신다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최소한 말로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정말 모든 것을 다 내 놓으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얌체 야곱에게는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도 아마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빼앗는 사람이니 열에 하나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죠.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만족하셨을지 모릅니다. 워낙 기대를 안 하셨을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본문 말씀에 기록된 야곱의 삶을 살펴 보고 나니 좀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야곱에게서 배울게 없습니다. 배울 것이 있다면, 얌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요?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는 정말 배울게 많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죠. 소돔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사랑의 실패자가 될 때 진실로 주님의 빛과 향기를 발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삭, 이삭은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를 택한 사람이었죠. 말없이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단두대에 올라갔습니다. 단두대에서 자기에게 내려 치는 시퍼런 칼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시퍼런 칼에 자기 대신 희생되는 숫양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삭에게서 단두대에 오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반면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야곱에게는 배울게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래도 야곱에게서 분명히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실 때 세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야곱에게도 우리가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차분히 생각하고 보니, 그래도 하나는 있어 보입니다. 돌, 돌베게로 기둥을 세우고 그 돌베게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처음 소개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친구가 자기에게 못한 것은 모래 위에 적고 잘한 것은 바위에 적었는데, 야곱도 비슷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을 기록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돌에 기록하는 것, 참으로 우리 모두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돌기둥을 세우는 것 정말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모래 위에 기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돌에 기록할 줄 아는 것, 이것을 우리는 야곱에게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위에 있던 아무 돌에다가 기록하였는데 야곱이 기록한 돌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 야곱의 돌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작자 미상의 ‘슬픔의 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슬픔은 주머니 속 깊이 넣어 둔 뾰족한 돌멩이와 같다.
………
때로 그것이 너무 무거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힘들 때는
가까운 친구에게 잠시 맡기기도 할 것이다.
………
이제 당신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까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돌멩이를 꺼내 보고 놀라게 되리라.
그것이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순길과 눈물로 그 모서리가 둥글어졌을 테니까.’
이 시의 내용보다는 제목이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누었을 때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야곱의 돌베게도 슬픔의 돌베게가 아니었을까요? 아니 야곱의 돌베게는 슬픔의 돌베개 그 이상이지 않았을까요?
돌 베개를 베고 주무신 적이 있으신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나무 베개도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돌 베개를 베고 잡니까? 그런데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딱딱한 돌베개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돌베개를 베고 자는 이유는 그동안 자기가 한 모든 얌체 같은 짓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순간 딱딱한 돌은 바로 변하지 않는 자신의 죄성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죄성은 바로 돌, 그 자체였습니다. 곧 자신의 죄성이 바로 자기를 돌베개를 베고 자게 만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슬픔의 돌베개입니다. 그러나 슬픔의 돌베개 이전에 죄성의 돌베개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 갑니다. 그런데 고통 가운데 잠이 든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깜짝놀라 잠에서 깬 후 돌베게로 기둥을 세웁니다.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도리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둥을 세웁니다. 이것이 야곱에게서 배울 점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들의 믿음과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의는 도저히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그 얌체와 같은 죄성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셋 중에 우리들에게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야곱처럼 쌍둥이 중 동생이라서 야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야곱이 좋습니다. 야곱처럼 자신의 죄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수 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 하나님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만 당신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시기에 저의 하나님이 될수 있기 때문에 저는 우리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한편 야곱이 돌베게를 세워서 기둥이 되게 하였다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둥, 기둥은 언젠가 세워질 주님의 십자가를 상징하지 않을까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할 때 성경의 풀이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죄성과 십자가의 만남을 내다 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돌 같은 자신의 죄가 사함 받게 될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죄가 해결되지 않은 곳에 이미 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시는 하나님, 곧 자기의 과거의 죄도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해 주시는 하나님을 돌베게를 베고 자는 동안 만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되어야 하고 이삭 처럼도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야곱이 되어야겠습니다. 야곱처럼 나의 돌과 같은 죄성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하나님을 만나야겠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죄성에 늘 시달리지만 도리어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바로 옆에 함께 계시는 십자가의 주님을 자랑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흉내내십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우리도 모두 얌체이지 않습니까?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소풍을 갔습니다. 한 아이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시냇물은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요?”
선생님은 대답합니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은 물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교우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돌, 죄성이라는 돌에 하나님의 은총의 물이 흐를 때 아름다운 소리를 발합니다.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물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들의 죄성도 하나님의 은총의 물을 만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발합니다. 우리들의 돌 같은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십니다. 야곱을 본받으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