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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빛

날짜 : 2012.02.2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아브라함의 빛
성경본문 : 창세기 18장 20-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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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이 지은 ‘진정한 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벌들이 깊은 산속 바위에 외따로 집을 짓고 사는 스승벌을 찾아갔습니다.
“스승님, 안녕하세요.”
벌들은 스승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습니다.
“고맙다. 너희들로 복 많이 받아라. 그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정한 벌이 될 수 있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승은 온화한 미소가 흐르는 얼굴로 제자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결코 게으리지 않아야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줄기에 알을 낳고 사는 송곳벌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스승은 말없이 그게 아니라는듯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땅벌이 뒷다리를 바짝 치켜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내가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냥 잘하기로 소문난 사냥벌이 일어나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스승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입을 여는 벌이 없었습니다. 집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스승은 오랫동안 지그시 눈을 내려감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놈들! 벌써 몇해째냐? 다들 물러가거라! 내 물음에 답할 수 없으면 다음엔 아예 찾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라!”
스승의 얼굴엔 실망과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어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맨 뒷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일벌 한 마리가 부끄러운듯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스승님,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왜 우리 벌들이 꽃을 찾아가 달콤한 꽃 가루와 꿀은 가져가고 은은한 빛과 향기는 그냥 놔두고 가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꽃에서 나는 단 것 외에도 빛과 향기까지 가져갈 수 있어야만 진정한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오, 그래, 네 말이 맞다! 빛과 향기마저 가져갈 수 있는 벌이 진정한 벌이다. 내 너희들에게 이제 가르침을 다했다. 이제야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스승은 일벌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었습니다. 그제서야 편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놀라운 지혜가 담긴 이야기입니다. 꿀벌, 하면 우리 모두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을줄 압니다. 하나는 ‘꿀’, 꿀을 채취해서 저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꿀벌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침’, 자기들을 해친다고 생각하면 꿀벌들은 지체하지 않고 쏩니다.
왜 우리는 ‘꿀벌’ 하면 이 두 가지가 생각이 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꿀벌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우리들의 이 모습을 너무도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아니 안타깝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꿀벌의 모습에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잘못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꽃의 향기와 빛까지 전하는 모습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일줄 압니다. 꿀만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전하여야 하는 꽃의 빛과 향기를 다시금 회복하는 절기일줄 압니다.
올 해 사순절을 통하여 잃어버린 향기와 빛을 다시 회복하는 축복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특히 올해는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하여야하는 빛과 향기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빛과 향기가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소돔을 벌하시겠다는 말씀과 이에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오늘의 이야기의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곧 세번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 이삭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방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시키셨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됩니다. 20,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의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조금 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태어날 이삭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나라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말씀을 소화할 시간을 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번이 세번째로 약속을 재확인하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25년동안 세번째라면 그렇게 자주하는 것도 아닙니다. 잊어버릴만 하면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전에는 막연하게 약속하셨지만 이번에는 1년 후에 아들이 태어난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시간까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1년을 어떻게 기다릴까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시간을 주시지 않고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소리가 들렸겠습니까?

저희 집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제가 귀가길에 때로는 어떤 일로 골몰합니다. 운전하는 도중 저의 머리를 꽉 채운 생각을 안고 집에 들어가는데, 집 사람은 집 사람대로 자기가 골몰해 있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제가 귀가하니 예의상 묻습니다.
“오늘 모임 좋았어요?”
저는 있었던 일을 한 마디 건넵니다. 물론 좀더 설명하려는 마음으로 몇 마디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 집 사람은 자신이 골몰해 있는 이야기를 문득 꺼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니 저도 예의상 듣는척합니다. 그러나 아직 저는 제가 골몰해 있던 주제로 머리는 꽉차 있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또 저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렇게 대화가 오고가다가 한 사람이 양보하면 그제야 통일된 주제로 대화는 시작되곤 합니다. 말은 오고 가지만 머리는 딴 데 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자기의 소원이 이루워진다는 이야기를 방금 들은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자손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주제를 바꾸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타락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저 같으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저의 이야기로 돌아 갔을 것입니다.
“저의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게 될까요? 부모가 모두 나이가 들었는데요? 저의 아내에게 보약을 먹이는 것이 좋겠죠?”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나요? 22, 23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여기서 엿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꿀은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꿀도 소중했지만 향기와 빛도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답변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은 자기의 자식인 이삭에만 골몰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돔 안에 거하는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더욱 강하게 닥아왔습니다.
그는 고심 끝에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벌써 1년 후 나을 아들에 대해서는 잊은듯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26절 말씀입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50명이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에 하나님은 또 답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삼십 명으로 내려갑니다. 이십 명으로 내려갑니다. 32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잘 아시다시피 소돔성은 십 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괜한 시간을 하나님과 보내면서 씨름한 것일까요?
꿀만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꿀을 얻지 못하면 헛수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은 헛된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못 다이룬 자신의 소원이었지만 이 대화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빛과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코가 석자가 아닙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눈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1년을 기다려야지만 눈 앞에 보입니다. 그러나 1년이라는 기간만 받은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곧바로 소돔성에 멸망당하는 자들의 모습에 골몰합니다.
하나님과 힘든 바겐을 해서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모든 자들이 살수 있는 약속까지 받아냈습니다. 애석하게도 열 명이 없어서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온 세상에 인생을 사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원했던 것을 얻지 못했지만 빛과 향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꿀만을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꿀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아는 자들에게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향기도 엄연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과 향기는 꿀을 채취하지 못할 때 우리를 찾아 오는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패한 것 처럼 보일 때 그 때 바로 빛과 향기가 발해지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 내 자신이 어느새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꿀을 허락하셨습니다. 아울러 인생은 꿀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웃을 사랑하다가 실패케 하신 것입니다. 그 때야 비로서 빛과 향기를 소유한 사람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꿀도 빛도 향기도 소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두 가지 큰 감사 제목이 있을줄 압니다. 하나는 백세에 아들 이삭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삭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만민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성을 위한 실패한 중보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은 바로 빛과 향기를 발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꿀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삭과 같은 웃기지도 않는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남의 떡이 커 보여서 그렇지 가만 살펴 보면 우리 각자에는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꿀이 있습니다. 그러나 꿀만으로는 우리들의 삶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빛과 향기를 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빛과 향기는 우리의 실패와 더불어 찾아 옵니다. 이웃을 향한 실패가 필요합니다.

사순절은 이삭의 축복만을 사모하며 살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과감히 사랑의 실패자가 되는 결단을 하는 절기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빛과 향기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사랑의 실패는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서 배신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만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배신하고 도망 갔습니다. 그 제자들의 배신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온 세계를 구원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사랑의 실패자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상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의 실패를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사랑해서 실패하지 않을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꿀은 맛볼지 몰라도 진실로 빛과 향기를 잃어가지 않습니까?

지난 주 어느날 여느 때처럼 교회 주변을 한 바퀴 삥 돌고 있었습니다. 던킨 도너츠 상점앞에 왔는데 길 건너 편에 서 있는 한 흑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자주 던킨 도터츠 앞에 서 있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위 homeless입니다.
그런데 한 백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더니 멈추어 서서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였습니다. 멀리서도 들을수 있었는데,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자기 길을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백인의 모습이 저의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나는 과연 저렇게 악수를 할수 있는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사실 homeless people을 사랑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지나가다가 1불짜리 집어주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서서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묻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homeless people들은 아무리 사랑을 해도 열매를 못 맺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이 흑인이 자기를 사랑한 백인에게 보답을 못하기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인은 헛 수고를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백인은 도리어 빛과 향기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멀리서나마 이 분으로부터 나오는 빛과 향기를 맛볼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실패도 감수하며 담대히 악수를 하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예수님처럼 되어가는 절기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되어 가는 절기입니다. 과감히 사랑의 실패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절기입니다. 이는 곧 빛과 향기의 사람이 되는 결단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담대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이효재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저서로는 ‘효재처럼 살아요’, ‘효재처럼 손으로’, ‘효재처럼, 보자기 선물’, ‘효재처럼’, 마지막으로 ‘효재처럼 풀꽃 처럼’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 마지막 책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책 제목을 보고 안 살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이효재씨의 글과 사진들로 엮여진 책인데 자신의 정원의 꽃 사진과 함께 자신의 사진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최근 유행하는 아이돌처럼 예쁘고 날씬한 몸매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아이돌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진과 꽃 사진을 섞어서 예쁜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가가 이러한 책을 낼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본인은 자신이 빛과 향기를 발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듯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런 책을 냅니까?

사실 이 분의 책을 읽어 보았지만, 어느 귀절을 따로 소개할 만한 그런 멋진 글은 나오지 않습니다. 꿀은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책 전체에서 흐르는 빛과 향기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꽃들을 사랑하다가 받은 실패가 도리어 그를 빛과 향기의 사람이 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저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영길처럼’이라는 책을 펴 낼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적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감히 ‘아브라함처럼’ 되십시다. 이삭의 축복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종종 사랑의 실패를 겪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사랑의 실패를 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실패자 아브라함은 고백합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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