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7.2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아름다운 발
성경본문 : 이사야 52장 7-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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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입니다. 세 사람이 밤에 말을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나그네를 만났습니다. 그 나그네는 그들에게 얼마 가지 않아 마른 시내 하나를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 말합니다.
“당신들이 그곳에 도착하거든 말에서 내려 시내에서 자갈들을 주워 자루와 호주머니에 채우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계속 여행하다가 해가 뜰 때 당신들이 주운 자갈들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해할 것이오.”
그 나그네와 헤어진 뒤 잠시 후 세 사람은 그 나그네가 말한 대로 마른 시내에 도착했고 그들은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많은 자갈들 중에 몇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밤새도록 말을 타고 긴 여행을 마쳤습니다. 다음날 해가 틀 무렵 그들은 주워 온 자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깜짝 놀랍니다. 그 자갈들은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등의 영롱한 보석들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만났던 나그네의 말을 떠 올린 그들은 그제야 그 나그네의 말을 이해합니다. “당신들은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해 할 것이오” 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은 주워온 자갈들이 보석으로 변해 있어서 기뻐했습니다. 한편 애석해 합니다. 더 많이 주워오지 않은 것을….
우리들의 인생은 돌을 줍는 여행이라고 이 전설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우리들이 주운 돌이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자갈이 보석이 되어 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요? 보석은 자갈이 되어갑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신비스러운 인생이라는 여행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인생을 마친 후 우리는 기뻐하기도 하고 애석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보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갈이 되어 있고 자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보석이 되어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자갈을 덜 주었기에 한편 보석을 너무 많이 주었기에 애석해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보석과 자갈을 가르는 수수께끼입니다. 이 인생의 수수께끼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된 소식을 안고 산을 넘는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말씀드린 중국전설에는 시내가의 자갈로 비유하였는데 이사야는 산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애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복음을 들고 시내를 건너 산을 넘는 자의 발은 아름답다. 그들은 많은 자갈을 밟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언젠가 보석처럼 빛난다.”
오늘 콜롬비아 단기선교단 파송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콜롬비아를 향하여 이르기를’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콜롬비아로 떠나는 우리 선교단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의 말씀일까요?
여기에서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신학자들마다 좀 차이가 있지만 이번에 제가 참고한 어느 주석을 중심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을 향하여 복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이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루살렘에서 복된 소식이 밖으로 나가야지 왜 예루살렘으로 복된 소식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간단히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드리면,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 이사야서는 바벨론 포로 전, 포로당시, 포로 후기의 역사들이 모두 기록이 된 책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52장에 나오는 배경은 막 해방이 되어서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머물어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식으로 ‘해방’하면, 일제 36년이 지난 후 한국은 하루 아침에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해방이 선포된 후 일부만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바벨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곧 일부는 이미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냐 하면 바벨론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빨리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떠나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일차 귀환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짓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주위나라 사람들이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큰 절망에 빠집니다. 이들에게 누군가가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바벨론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그 긴 여행을 하려면 첫째로는 건강이 받쳐주어야 합니다. 가정에 몸 약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울러 그 긴 여행을 하려면 돈도 장만을 하였어야 합니다. 돈이 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바벨론에 정착이 잘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재산들과 직업을 놓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바벨론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벌써 예루살렘에 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두 그룹 다 그 나름대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 곧 바벨론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더 큰 문제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어떻게 보면 먼저 예루살렘에 가 있는 사람들이 더 충성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덜 충성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에게 축복의 선언을 하시고 계십니다. 아니 누가 더 충성스러운 사람이냐는 것은 우리들이 판단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누가 더 충성스러운 자냐가 아닌줄 압니다. ‘누가 복음을 들고 떠나는 사람이냐’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줄 압니다.
10년 전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지금 떠나느냐에 있습니다. 떠나는 자들의 발걸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언젠가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밟은 자갈들은 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지 못하고 있던 바벨론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이제 기회가 왔으니 새롭게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남의 발걸음은 많은 보석을 남기는 아름다운 발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안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산을 넘어 떠나는 자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귀한 보석을 남기는지 살펴볼까요? 8절 말씀입니다.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예루살렘 성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시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 증거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바벨론에 머물던 사람들의 산을 넘는 발입니다. 자기들 보다 뒤 늦게 출발한 발걸음이지만 그 아름다운 발을 보면서 예루살렘의 파수꾼들은 일제히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한편 바벨론에 머물던 사람들은 바벨론을 떠나자마자 자기들의 발걸음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이들의 떠남은 두 그룹 모두에게 기쁨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더 크게 외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바벨론에 머물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바로 하나님의 발걸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완전한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통하여 구원이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렵게 바벨론을 떠난 사람들은 용기 백배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겁이 많아서 떠나지 못했었는데 뒤늦게 떠나는 자기들의 발걸음을 이처럼 축복하시고 또 상상하지 못하던 일들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황송한 마음이 가득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들로 인해서 예루살렘의 구원이 완성되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겠습니까? 가슴이 뿌듯해 있는 이들에게 이사야는 계속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구원의 완성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자기들의 출바벨론을 전 세계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바벨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정신을 잃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정신을 잃어서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짐을 싸고 있었는지 짐을 풀고 있었는지 여기가 바벨론인지 예루살렘인지 온통 혼동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1, 1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행길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행은 하나님의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들의 산을 넘는 발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감을 갖고 미련없이 바벨론을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출바벨론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함과 아울러 전 세계인의 구원을 선포하는 위대한 발걸음이 된 것입니다.
콜롬비아로 떠나는 우리들의 발걸음도 매한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콜롬비아인들보다 더 낫기에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콜롬비아 인구의 97%가 기독교인입니다. 그중 90%가 카톨릭입니다. 어떻게 보면 콜롬비아인들은 신앙적으로는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해 사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름이 없습니다.
먼저 기독교국가가 되었지만 많은 신앙적으로 어려운 여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복음의 소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필요해졌습니다.
바벨론에 아직 살던 자들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오늘 우리들의 삶에 현장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에서 사는 자들도 바벨론을 종종 떠나야 합니다. 그 때 그들의 발걸음은 보석이 되어갑니다. 아울러 예루살렘주민들에게는 그들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발걸음이 되어 갑니다.
교우 여러분, 선교단원 여러분, 여러분의 발걸음은 콜롬비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이것은 첫번째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떠날줄 아는 자들은 자갈을 보석으로 바꾸는 기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떠남은 콜롬비아를 비롯한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멧세지를 밝히는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시내를 건너며 산을 넘을 때 자갈들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갈들은 보석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열흘간의 짧은 떠남이지만 자갈을 보석으로 바꾸기에 너무도 충분한 아름다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떠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한국의 선교’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인데, ‘콜롬비아의 선교’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브루스 올슨(Bruce Olson)이라는 선교사인데 콜롬비아에서는 ‘브루코(Bruchko)’라고 불리워지는 선교사입니다. 브루코 선교사는 모틸론즈(Motilones)라는 식인종 종족을 선교한 분입니다. 아무도 모틸론즈를 만난 다음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토록 지독한 식인종 중에 식인종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30개 선교팀을 이 식인종들이 이웃 종족에게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22개 언어로 이웃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중 18개 종족이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종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유는 바로 그가 떠남에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역사가 이루기까지 얼마나 험한 자갈밭을 브루코 선교사님이 걸어갔겠습니까? 그의 전기에 보면 많은 어려운 고비들을 넘긴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죽음이 늘 그를 스쳐지나 갔습니다. 그러나 가끔 보석과 같은 시간도 갖습니다. 이 시간에는 자갈밭이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한 가지 보석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한 원주민이 예수를 믿고 브루코 선교사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바비(Bobby)라고 부릅니다. 하루는 정글을 걸어가고 있는데 바비가 멈추어 섰습니다. 약간 몸을 떨더니 입에서 무어라고 중얼거립니다.
“바비, 무슨 일이야?”
“Nothing.”
다시 길을 걸어갑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부루코 선교사는 기분이 좀 이상해집니다. 잠시 후 소리가 들립니다.
“부루코, 나의 이름은 ‘in the Heavens’입니다.”
선교사는 서서 뒤를 바라봅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이 그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서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계속 바비는 말합니다. “내 이름입니다.”
“너의 이름은 보바리쇼라(Bobarishora)이쟎아?”
“No my real name is ‘In the Heavens’.”
그리고는 바비는 설명합니다. 모든 모틸론 원주민들에게는 비밀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비밀 이름이 진짜 이름입니다. 아버지와 몇몇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밀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비밀의 이름을 알면 그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관계가 된다고 합니다.
바비는 선교사에게 비밀의 이름을 알려줌으로 완전한 형제애의 관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부루크 선교사도 깊은 형제애를 체험하게 됩니다. 수많은 자갈 속에서 보석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석은 자갈로 변하지 않는 보석입니다. 아울러 수많은 자갈은 언젠가 보석으로 변하지 않았을까요? 바비의 진짜 이름처럼 ‘In the Heavens.’
선교단원 여러분, 여러분의 발걸음은 때로는 자갈밭을 걸을 것입니다. 가끔 보석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만난 자갈은 보석으로, 보석은 더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할 것입니다. 떠나는 자들의 진짜 이름은 ‘In the Heaven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이 아름다운 이름을 주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