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5.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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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이 지은 ‘다람쥐 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첫 부분은 생략합니다. 도토리를 배불리 먹은 다람쥐는 고요한 달빛 아래 수북이 똥을 누었습니다.
“아휴, 이게 뭐야? 내가 똥으로 태어났잖아! 아니 하필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 덩어리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좀 더 기다렸다가 내년 봄쯤 아름다운 꽃으로 태어나면 그 얼마나 좋아.”
그 때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낙엽들이 앞다투어 다람쥐 똥 곁을 떠나갔습니다.
“도망가지 마, 나랑 같이 놀아. 나 더럽지 않아.”
다람쥐 똥은 혼자 있기가 싫어 도망가는 낙엽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러자 낙엽들은 바람을 데리고 더 멀리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다람쥐 똥은 자신을 똥으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이 무척 원망스러웠습니다.
가을은 깊어갔습니다. 온 산이 더욱 붉게 물들었습니다. 아기 단풍도 노인 단풍도 참단풍도 모두 붉게 물들었습니다. 상수리나무 바로 옆 동네에 있는 단풍나무 숲 속에는 프로펠러처럼 생긴 조그마한 단풍나무 씨앗이 속으로 아주 단단하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숲 밖으로 멀리 날아가야지.’
단풍나무 씨앗은 비행기처럼 아주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단풍나무 씨앗은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 듯 빙글빙글 돌면서 사람 손바닥처럼 생긴 엄마 품을 떨어져 나왔습니다.
‘아주 멀리멀리 날아가야지. 이 숲속은 너무 답답해.’
단풍나무 씨앗은 자신이 마치 비행기라도 된듯 신나게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멀리 날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그치자 그만 가까운 상수리나무 숲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다람쥐 똥 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에이, 기분 나빠. 왜 하필이면 똥 위에 떨어진 거야? 정말 재수 없어.”
단풍나무 씨앗은 다시 멀리 날아가기 위해 몸을 힘차게 움직였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도 불어오지 않았지만, 똥 덩어리 속에 너무 깊숙이 빠져 날아갈래야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지?”
단풍나무 씨앗도 다람쥐 똥처럼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다람쥐 똥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 나도 그래. 하필이면 똥 덩어리로 태어나게 할 게 뭐람.”
“그러게 말이야. 다른 데 다 두고 왜 하필이면 똥 위에 떨어지는거야.”
그들은 서로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한 몸이 되어 눈 속에 파묻힌 채 겨울을 났습니다. 봄이 찾아왔습니다. 다람쥐 똥에 파란 싹이 돋았습니다. 단풍나무 씨앗이 다람쥐 똥을 먹고 그만 싹을 틔운 것입니다.
“하하, 나도 쓸모가 있었어. 하느님이 널 싹틔우라고 나를 똥으로 태어나게 하셨어.”
“하하하, 영양가 많은 널 먹고 싹을 잘 틔우라고 하느님이 나를 똥 위에 내려주셨어.”
“그래, 맞아, 맞아. 하하하!”
다람쥐 똥과 단풍나무 씨앗은 아지랑이 아른대는 봄 들판이 떠나가도록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졸업축하 예배인데 다람쥐 똥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들 특별히 졸업생들에게는 좋은 멧세지가 담겨 있는 이야기이기에 전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다람쥐 똥’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단풍나무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졸업하는 교우님들이 바로 단풍나무 씨앗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정착하는 곳이 어디가 되든지 아름다운 단풍나무가 되어서 멋지게 자라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씨앗이나 땅에 떨어지면 훌륭한 나무가 될까요? 어떤 씨앗들이 훌륭한 나무로 자랄 수 있는지 말씀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디를 가나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8절 말씀에 디모데에 대한 자신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정말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직하고 확신이 있는 자에게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벌들이 자기의 사업을 물려주려면 정말로 믿음직한 사람을 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종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지 않는 재벌도 있지 않습니까? 믿음직한 자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적 재벌은 아니었지만 복음의 재벌, 이런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복음의 재벌, 말씀의 재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유산 어떻게 보면 고난의 유산을 물려줄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찾아냈습니다. 디모데였습니다. 그에게 자기의 전 재산을 공개합니다.
사도바울의 재산 목록이 기록된 책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곧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전 재산이었습니다. 유산이었습니다. 그에게 남긴 유산 내지 유업들이 콩알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유산 목록을 살피진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디모데가 사도바울의 유업을 물려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7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도리어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사도바울은 당신의 재산을 넘겨주길 원했습니다. 우리도 재산이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소유한 자였기에 당신의 엄청난 유업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어떻게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답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이 믿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 된 이유는 바로 삼세대 가정에서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성경에 수많은 곳에서 삼세대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특히 쉐마의 밤에서 성경에 나타난 삼세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이 삼세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삼세대의 자녀들이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두려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능력와 사랑과 절제의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뿐 아닙니다. 심리학자들도 이를 강조합니다.
제임스와 다이에나 메이(James & Dianne May)라는 심리학자 부부가 다음과 같은 실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있는데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늘 자기가 일찍 죽고 아이들이 엄마 없이 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 늘 지내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수 시간 꼼짝달싹 못하고 슬퍼합니다. 엄마를 잃을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운전도 하지 못합니다. 운전하다가 교통사고가 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교통사고로 죽으면 자녀들은 고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자신의 두려움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친구가 묻습니다.
“너 어릴 때 너의 친 엄마를 여의었니?”
순간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여인은 어릴 때 입양되어서 양부모 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아픔이 늘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이제는 자녀들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심리학자들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삼세대의 사랑을 받아온 사람들이 두려움을 쉽게 극복합니다. 그러면 어느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삼세대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들에겐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Yes & No.
그러나 삼세대 가정에 속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삼세대 공동체에 속하면 됩니다. 삼세대 공동체를 이루어가면 됩니다. 가정의 삼세대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삼세대는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을 통해서 신앙의 삼세대에 속하신 분들 너무도 축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의 삼세대는 함께 이루어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졸업축하예배로 드립니다.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졸업장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는 두려움을 없앨지라도 더 큰 두려움이 늘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신앙의 삼세대 공동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면 더욱 감사함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가족을 넘어서 삼세대 공동체에 속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재미있는 두 가지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호랑이와 사자 중에 어느 동물이 좋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생각을 하셨으면 첫 질문을 드립니다. 호랑이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가 싸우면 어느 동물이 이깁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호랑이 다섯 마리와 사자 다섯 마리가 싸우면 어느 동물이 이깁니까?
일대일로 싸우면 호랑이가 이긴다고 합니다. 5대5로 싸우면 사자가 이긴다고 합니다. 사자는 힘을 합해서 호랑이 하나 씩을 처치하지만 호랑이는 힘을 합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삼세대 공동체는 사자를 키워내는 공동체입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호랑이를 키워내려고 합니다. 호랑이는 사탄의 무리가 달겨 들면 꼼짝 못합니다. 교회는 사자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이 나은 사자의 가슴을 소유한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안중근 의사입니다. 삼세대 믿음의 가정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중근 의사는 훌륭한 부모님으로 신앙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부모님 밑에서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성장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헐벗고 굶주린 데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항상 그에게 용기를 주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추운 겨울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겨우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기거하는 방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 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제가 왔어요.”
어머니는 방문을 열지도 않고 방안에서 냉랭하게 내뱉습니다.
“내 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러 나가고 없다. 아직 큰일을 이룩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단 말이냐.”
안중근 의사는 서글프고 기가 막혔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크게 깨닫습니다.
“그렇다, 어머님 말씀대로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큰 공을 세울 때까지는 모든 것을 잊고 전념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를 치루게 되고 6개월간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있던 기간 중에 모든 일본인 형리들이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감화되었고 그에게 극진한 예우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동양평화론을 기고하였는데 사형 이틀 전에 서론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는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사형집행을 15일 연기해 줄 것을 청원했는데 그 청원을 일제가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사실은 역시 일본 형사 사상 유례없는 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일본인들이 얼마나 감화되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사건 직후부터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안의사는 체중이 1.2kg나 늘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그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어머니에게 대한 사무친 애정만이 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22]
안중근 의사가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도리어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삶을 산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은 부모로부터 전해 받은 삼세대 신앙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 이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승리자로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졸업생교우 여러분, 늘 삼세대 공동체의 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승리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한편 여러분이 장년이 되었을 때 젊은 청년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소유한 위대한 사람들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어디로 보내시든지 늘 삼세대 공동체에 속하시기 바랍니다. 심겨진 곳에서 아름다운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그 동안 청년들을 위해서 수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작년부터 청년부를 위해서 교우님들이 자원해서 점심을 제공해주고 계십니다. 신앙의 삼세대의 축복을 만끽하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청년들은 단지 한 끼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삼세대의 공동체를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예산을 세워서 하는 것도 좋겠지만 어떻게 보면 교우님들의 사랑의 손길이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세상으로 향하는 우리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두려움 없이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우게 될줄 압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동물들이 떼를 지어 있을 때 부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 school(학교)이라고 합니다. 악어 떼를 congregation(회중)이라고 합니다. 왜 물고기 떼가 학교가 되고 악어떼가 회중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 코뿔소 떼를 crash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호랑이와 사자들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호랑이 떼를 ambush(잠복)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 밖에 함께 싸울 줄을 모르니 잠복해 있다고 공격만 할줄 아니 ‘잠복’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반면 사자는 무엇일까요? Pride, 저는 ‘자신감’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사자들은 자신감을 갖고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것입니다.
삼세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사자의 무리들이 아닐까요? 자신감을 안고 이 세상 어디에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당당히 가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자들의 무리입니다. 이 시대는 이러한 사람들을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함께 신앙의 공동체에 속하십시다. 삼세대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십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